66. Midsummer(2)
“그럼 이제, 태정 모비스와의 배터리팩 리스 업무 협약 건에 대한 발표로 이어지겠습니다.”
도시락 하나 떨렁 던져 주고 몇 시간째냐.
송정태는 앞에 놓인 커피를 쭉 빨아 마셨다. 대전 연구소에서 출장 업무를 마치고 바로 퇴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부회장 소집 긴급 임원 회의가 열렸다.
전지 사업부의 자동차 영업팀의 홍성준 팀장이 연단에 섰고, 아래 직급의 오 과장이 빠르게 회의 자료를 돌렸다.
잔뜩 긴장된 얼굴로 자료를 돌리는 오 과장에게서 서류를 받아 옆자리의 서문도 전무에게 전달을 하는데 서 전무의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어디가 불편한가.
대전 연구소에서 업무 보고를 들었을 때는 이례적일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지금은 매우 심기가 틀어진 것처럼 보였다.
언뜻 집중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지만 서 전무를 오래 보좌한 정태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매우, 몹시,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저 세로로 그어진 미간의 주름이 하나도 아니고 둘. 한 번씩 돌리는 펜과 누구 하나 아작 낼 것 같은 싸늘한 눈빛.
“전무님.”
서류를 전달하는데 씹, 하고 낮게 욕을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편히 먹으라고 앞에 놓아준 도시락은 뚜껑도 열지 않은 채였다.
먹은 것도 없을 텐데, 배도 안 고픈가. 정태는 괜히 눈치를 보았다.
송정태의 짐작대로 문도는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속이 타는 기분에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들어 쭉 마시는데 식어 빠진 커피조차 속 시원히 나오지 않았다.
“이번 업무 협약의 핵심은 배터리팩의 리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태정 모비스에서는 GK 모빌리티에 전기차를 판매…….”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었다. 실시간 자료 공유의 시대에 PPT를 띄운 석간 회의라니. 산업통상자원부 주관 업무 협약 보고 들어간 지가 언제인데.
서중호가 한 장 한 장 자료를 넘겨 가며 화면을 보았다. 문도는 한 번 더 미간을 구겼다. 이선우에게 8시 전후로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 출발해도 8시 반이 넘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문도는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창을 열었다.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라고 보낸 메시지 아래로 네, 하는 선우의 대답 아래로 화이팅을 외치는 토끼 모양의 이모티콘이 보였다. 문도는 피식 웃은 뒤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더 늦어질 듯.]
잠시 후 읽었다는 표시로 숫자 1이 사라지더니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괜찮아요, 노래를 부르고 있는 분홍색 토끼였다.
[마음 쓰지 마시고 천천히 오세요. 저는 괜찮아요.]
토끼 아래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선우의 목소리와 말투로 읽어지는 메시지였다.
문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마음을 어떻게 안 써. 기다리고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잠깐 멈춰 봅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게 배터리팩을 대여했다가 수거해서 ESS로 만들어 재활용을 하는 거다, 그건가? GK는 태정에서 전기차 떼다가 택시 사업을 하고?”
“네, 그렇습니다.”
한 달 전에 보고 들어간 걸 이제야 확인하는 서중호를 보며 문도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회의가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녁밥 한번 먹기 더럽게 힘드네. 그 생각을 하며 문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 * *
이선우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땐 밤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놀이터 옆으로 차를 댄 문도는 시동을 끄고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무 늦었네. 저녁은 다음에 사 줄게요.’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아……. 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여기까지 왔다. 아, 하고 살짝 당황해서 내는 것 같은 그 한 음절의 소리 때문에. 혹시 아쉬워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광화문에 있는 회사에서 서울 북쪽에 위치한 이선우의 집까지는 빨리 달려도 30분이 넘게 걸렸다. 이선우의 집에서 이태원의 본가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회의 중간에 기다리지 말고 저녁을 먼저 먹으라 메시지를 보냈으니, 사실상 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약속은 이미 빠그라졌고 만날 시간은 언제라도 있으니.
그런데 얼굴 한 번 보려고 한 시간 반을, 그것도 이 늦은 시간에.
비효율의 끝판왕이라 생각했지만 핸들이 저절로 틀어졌다. 시간 낭비일 게 뻔한데, 내일의 컨디션을 생각하면 이대로 들어가 통화나 잠깐 하고서 쉬는 게 맞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기다렸을 테니까.
문도는 차에서 내렸다. 습기가 많은 미지근한 밤공기가 뿌옇게 차 있는 밤이었다. 선우의 집이 있는 통로 쪽으로 걷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무님?”
뒤를 도니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 차림의 이선우가 보였다. 전에 없이 입술에 반짝이는 립글로스까지 바른 이선우가 검은색의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선우가 말했다. 시간 낭비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차 타고.”
“아.”
농담이라 봐줄 수도 없는 말에 말문 막힌 이선우가 예뻤다. 옅은 화장을 한 얼굴에 외출복을 입은 것만으로 분위기가 색달랐다. 신경 써서 데이트를 준비한 모습이었다.
“농담이고,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왔어요. 김밥?”
선우가 손에 쥐고 있는 비닐봉지 안에는 누가 봐도 김밥이 들어 있었다. 은박지에 둘둘 말린 김밥을 사서 들어오는 길이라는 건, 이제까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건데.
“기다리지 말고 먹으라 했을 텐데. 저녁 아직 안 먹었어요?”
문도의 말에 선우가 웃기만 했다. 연한 미소에 심장이 뻐근해진다. 먹으라면 먹을 것이지 미련하게 뭘 기다려.
“아까는 배가 별로 안 고팠어요.”
선우가 말했다. 아파트 가로등 불빛에 선우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편한 옷차림이 아닌 몸에 붙는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는 이선우의 목에는 그가 선물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실처럼 가는 줄에 달린 자그마한 리본이 선우와 잘 어울렸다. 하나로 모아서 묶은 머리는 단정했고, 쭉 뻗은 팔은 우아했다.
“회의는 잘 마치셨어요?”
“그럭저럭.”
회의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실무 효율성을 떨어트리는 임원 회의를 싫어했는데, 이번 기회로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언제 끝나나, 내내 그 생각을 했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문도는 얼굴 봤으니 이만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밥 봉지를 쥐고 있던 선우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쉽게 머물러 주고 싶지 않았다.
이선우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마음과는 별개로 심술궂은 마음이 늘 있었다. 원하는 걸, 좋아하는 걸 쉽게 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짓인가 싶긴 한데 그랬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서고, 애가 타서 잡는 건 이선우였으면 한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선우가 문도에게 물었다.
“전무님은 식사하셨어요?”
“이제 들어가서 해야죠.”
웃으며 대답을 하자 선우가 그를 보았다. 들고 있는 김밥을 잠깐 보더니 망설이며 문도에게 물었다.
“저……. 괜찮으시면, 김밥에 라면 드시고 가실래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문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니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히 물어봤나, 너무 뻔한 제안이었나. 선우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을 읽으며 문도는 입을 열었다.
“먹고 갔으면 좋겠어요?”
문도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더 계셨으면 좋겠어요.”
빤히 바라보자 선우가 살짝 긴장을 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를 보았다. 그렇게 보면 내가 갈 수가 없잖아.
“장 여사가 라면 먹지 말라고 했거든.”
문도는 잠깐 사이를 띄웠다. 거절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선우가 입술 끝을 작게 씹었다.
“내가 그 말을 이렇게 어기네.”
붙잡는다면 잡혀는 줄게.
문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선우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겹쳤다. 바스락, 비닐을 쥐는 소리가 난다. 짧은 입맞춤이 달콤한 밤이었다.
* * *
물이 보글보글 끓는데, 라면을 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무님.”
“응.”
문도는 대답을 하며 선우의 입술을 비스듬하게 바꿔 물었다. 사람을 먹게 된다면 입술이 제일 맛있는 부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선우의 입술이 달았다.
“물이……. 하아…….”
자그마한 얼굴을 쥐고서 다시 입술을 포갰다. 깊이 밀어 넣은 혀로 선우의 혀를 비볐더니 선우가 문도의 셔츠를 꼭 쥐었다.
사선으로 스며든 주방의 불빛이 어두운 방을 희미하게 밝혔다. 선우의 얼굴 위로 음영이 드리워진다.
“물이, 끓는 것 같아요.”
말을 하는 선우도 문도의 어깨에 팔을 감고 있었다. 알아. 대답을 하면서 문도는 선우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선우는 타액도 달았다. 달콤한 과즙 같아 자꾸만 훔쳐 오게 된다.
“아.”
원피스 위로 가슴을 쥐니 선우가 얕게 신음 소리를 냈다. 입술을 턱으로 목으로 내리며 아래로 내려가는데 꼬르륵, 선우의 배에서 물소리가 났다. 선우가 흡, 하고 숨을 쉬었다. 문도는 동작을 멈추고 웃었다.
“배가…… 고파서.”
선우가 민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도는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들어와 냄비에 물을 올리고 상을 차리는 이선우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것이 화근이었다.
“제가 할게요.”
라면 봉지를 찢고 차례로 스프를 털어 넣으니 선우가 급하게 말했다. 면까지 넣은 문도는 핸드폰을 들었다. 타이머를 맞춘 뒤 다시 내려놓고 선우에게 다시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3분만 더.”
이선우가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문도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웃을 만한 일이 아닌데 웃음이 나왔다.
끓는 물. 급하게 털어 넣은 라면. 그 와중에 맞춰 놓은 타이머. 위잉위잉 돌아가는 낡아 빠진 선풍기. 이 방, 이 집, 이 계절의 공기와 미지근한 열기가 그를 웃게 했다.
“더 해 달라고 해.”
문도는 입술이 스칠 것만 같은 거리에서 말했다. 시선이 얽히며 웃음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선우가 기꺼이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더 해 주세요.”
그 말에 문도의 등이 저릿거렸다. 입술을 겹치자 선우가 문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무래도 불어 터진 라면을 먹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