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Midsummer(1)
커다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낮고 긴 파도가 간간이 밀려왔다. 선우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다 터져 나가 산산이 부서진 기분. 시간조차 멈춘 것 같은 순간에 남자가 선우의 몸을 당겨 안았다.
허리에 남자의 팔이 감겼다. 등 뒤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허리를 타고 올라온 남자의 손이 선우의 가슴을 자연스럽게 덮었다.
아릿한 정점이 남자의 손끝에서 나른하게 비벼졌다. 선우는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더우셨죠?”
“조금.”
문도가 대답하며 선우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발갛게 물든 부분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다가 가볍게 쥐었다.
몇 번을 더 지분거리며 부풀어 있는 정점을 비볐다. 아릿한 쾌감이 다시 고여 들어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어컨을 틀었어야 하는데, 잠시만요.”
에어컨 핑계를 대면서 그만 일어나려는데 몸이 뒤로 끌려가듯 당겨졌다. 다시 서문도의 품 안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정사의 열기까지 더해진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오래되어 보이는 선풍기와 벽에 붙어 있는 에어컨이 멀뚱멀뚱 자신들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왜 그러고 있냐고.
“저는 좀 더운 것 같아요.”
“참아.”
참으라니.
조금 어이없어하는데 목 뒤로 따뜻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간질이는 숨과 함께 목덜미에 입술이 찍혔다.
“아.”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소리를 냈다.
“잠시만요. 전무님. 씻으셔야.”
다리를 모으는 선우의 뒤에서 문도가 웃었다.
“조금 있다가.”
문도는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에 머리를 묻었다. 흰 목덜미에서 이선우의 살내음이 났다. 살에 대고 숨을 쉬었더니 선우의 몸이 움찔거렸다.
문도는 고개를 더 숙였다. 등으로 입술을 옮겼다. 흡, 하고 선우가 숨을 삼켰다.
귀엽긴.
문도는 점점이 입을 맞추다 선우의 몸을 돌렸다. 마주 보고 누운 자세에 문도의 팔까지 베게 된 선우의 얼굴에는 곤란함이 가득이었다.
문도는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선우의 머리카락을 떼어 주고는 말없이 선우를 보았다.
대체 너는 뭘까.
이런 적은 없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경험은 처음이다. 감정에 휩쓸려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는데 후회가 되지 않았다. 한 줌도 안 되는 이 작은 여자를 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찌르륵찌르륵 울고 있는 매미 소리도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선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문도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만만했어요?”
“네?”
“몇 번 더 찍으면 넘어올 것 같았어요? 싫다는데 뭘 그렇게 막무가내로 매달려.”
이번에는 선우가 아무 말도 못 했다. 문도가 웃으며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내가 그렇게 쉬워 보였나?”
그건 아니었다. 선우는 가볍게 웃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쉬울 리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냥.”
선우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포기하면 후회할 거 같아서.”
서문도는 선우에게 민우의 핸드폰이었다. 가려진 진실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선우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목표였고 절실한 소원이었다.
“가만 보면 근성 있어. 미련할 정도로.”
아이러니하게도 맞는 말이었다. 선우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감싸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연습에 연습. 시도에 시도. 발레 동작 하나하나 쉽게 된 적이 없었다. 될 때까지 꺾이고 넘어지며 비틀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전무님은…….”
선우의 눈에 비친 서문도는.
“어려워요. 많이 어려워요. 그래서 처음 발레 배웠을 때 생각이 나요.”
서문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보면서 선우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쉬운 적이 없었어요. 단 한 번도. 그런데 포기가 안 되었어요. 자면서도 연습하는 꿈을 꿨었어요. 어렵고 힘든데, 그래도…… 좋았어요.”
그 말에 남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좋았다는 것을 빼면 정말이었다.
진심을 다해 부딪치지 않으면 움직여 주지 않는 어려운 상대였다. 허락한 만큼씩만 겨우겨우 다가갈 수 있는 것도 꼭 닮았다.
문도가 고개를 숙여 선우의 입술을 찾았다. 겹쳐지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선우의 입술이 문도의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생각이 흩어진다.
“내가 그렇게 좋았어?”
입술을 뗀 문도가 속삭이듯 물었다.
“네.”
그렇게 좋았어요.
선우의 대답은 이내 문도에게로 삼켜졌다. 얽혀 드는 문도의 혀를 받으며 선우는 눈을 감았다. 여름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알람 소리가 오래도 울렸다. 선우는 눈을 감은 채로 옆을 더듬었다. 잠이 쉽사리 깨지 않았다.
알람을 꺼야 하는데. 생각을 하다 설정해 놓은 알람이 없다는 걸 기억했다.
붙은 눈을 간신히 떠서 핸드폰을 찾았다. 알람이라 생각했던 소리는 벨 소리였다. 핸드폰의 화면에는 서유라의 이름이 떠 있었다.
“네. 이선우입니다.”
— 야, 왤케 전화를 늦게 받어?
“잠깐 잠이 들었어요.”
— 뭐야, 지금이 몇 신데 처자냐?
그러게요. 선우는 속으로 대답하며 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 어제 늦게까지 놀고 그런 거야? 나 없다고 아주 신났네?
“그냥 늦게 잠이 들었어요.”
선우는 대답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이 흘러내리자 맨몸이 드러났다. 가슴 위로 붉게 물든 자국들이 보였다. 새벽까지 이어진 정사의 흔적이었다.
마지막에는 맥없이 늘어져 숨만 간신히 쉬었다. 나른하게 몸을 일으켰던 남자가 선우의 위로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씻는 물소리를 듣다가 눈을 감았던 기억이 난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다독였던 손길도 어슴푸레 기억이 났다.
— 적당히 놀아라. 나 진짜 화낸다.
“네. 그럴게요.”
선우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약하게 틀어져 있던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짙은 녹색의 잎새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들이쳤다.
“언제 돌아오세요?”
— 몰라. 아빠가 갈 생각을 안 해. 공기만 마셔도 건강해지는 것 같다나? 기운이 쌩쌩해졌는지 갑자기 산을 타자고 하잖아? 한 5백 미터 걸었나? 나 별장 가서 휠체어 가지고 올라왔잖아. 그거 밀고 가는데 환장하는 줄.
서유라는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산모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늙은이들만 있는 별장이 얼마나 무료한지, 회장과 박소영이 얼마나 눈꼴 사나운 애정 행각을 벌이는지.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곧 돌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선우는 욕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칫솔 옆에 꽂힌 푸른색 칫솔이 보였다.
늦은 시간,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어서 24시간 김밥집에서 밥을 먹고 그 옆의 편의점에서 샀던 것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욕실 안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거울 속 이선우는 목에 가느다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다시 사 줄게.’
차에 두고 왔던 선물은 목걸이였다. 면세점 아무 곳에서 대충 샀던 거라며 남자는 다른 걸로 새로 사 주겠다고 했지만 선우는 가느다란 금색의 줄과 작은 리본 모양의 펜던트가 부담스럽지 않고 좋았다.
마음에 든다고 말했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서문도는 마지못해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때의 간지럽던 느낌이, 멈춘 듯 느리게 흘렀던 시간이 정말로 존재했었던 걸까 싶은데 거울 속의 이선우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푹 자요, 연락할 테니.’
목걸이를 받고, 밤새 몸을 나누었어도 사실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다시 시작하게 된 게 맞나. 이제 다시 밤마다 그와 몸을 나누는 관계로 돌아간 것이 맞나.
자신을 보았던 남자의 다정한 눈빛과 가벼웠던 미소 같은 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까.
‘네가 좋아.’
남자가 뱉어 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함께 밤을 보내는 관계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말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너와의 잠자리가 아직은 좋다는 뜻 정도일 테니.
서문도가 그녀에게 준 것은 작은 기회일 뿐이다.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지난번처럼 바보같이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선우는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핸드폰으로 메시지창을 켰다.
[전무님, 잘 들어가셨어요? 어제는 인사도 못 드렸어요.]
거기까지 적은 뒤 천장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써야 하지? 한마디를 덧붙이면 좋겠는데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연락 주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런 말들을 떠올렸지만 마땅하지 않았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말을 덧붙인 뒤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잠시 뒤에 메시지가 왔다.
[5분.]
5분 뒤에 연락을 하겠다는 건가.
잠자리에 기운을 모두 썼는지 허기가 돌았다. 선우는 냉장고에서 복숭아를 꺼냈다. 물에 씻어서 과도로 껍질을 벗겼다. 복숭아를 먹고 나서 컵라면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서문도 전무였다. 선우는 과즙으로 끈적해진 손을 씻고 전화를 받았다.
“네.”
— 점심 먹었어요?
“아니요. 이제 일어났어요.”
건너편에서 남자가 웃었다. 그리고 잘했네, 라고 말했다.
— 저녁 뭐 먹을래요?
“시간이 괜찮으세요?”
밤늦은 퇴근이 기본이었던 남자였다. 평일 저녁에 시간이 될까.
— 장담은 못 하겠는데, 8시 정도? 좀 더 늦을 수도 있고요.
“저는 괜찮아요.”
— 그럼 이따 봐요.
“전무님.”
선우는 문도를 불렀다. 벽에 걸린 달력은 3월에 머물러 있었다. 여름이 이렇게 깊어졌는데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제자리걸음만 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 말해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더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기회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선우는 여기가 무대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이 될 무대라고. 맡은 역할은 사랑에 빠진 여자. 상대역은 서문도 전무.
“조심해서 오세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고 싶어요. 기다릴게요.”
막은 올랐고 극은 시작되었다. 선우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