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62화 (62/168)

62. 아주 긴 여름의 오후

촤르륵.

베란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자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가득이었다. 어두컴컴했던 집에 오후의 햇살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선우는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계절이 지나도록 돌보지 않은 집은 공기부터 텁텁했다.

선우는 손에 쥐고 있던 고지서와 우편물들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맞은편 주방 쪽 창문도 열었다.

관리비. 가스비. 보험 고지서. 전에 살던 사람과 집주인 앞으로 온 우편물들.

꼬박꼬박 월세만 냈을 뿐 계절이 흘러가도록 한 번도 들르지 않았던 집에는 우편물이 가득이었다.

선우는 싱크대에 기대어 우편물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버려도 되는 것들은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고 집주인 앞으로 온 우편물들은 따로 챙겨 두었다.

우편물을 정리한 뒤 싱크대에 기댄 채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매미 소리가 귀를 찌를 것처럼 울려 퍼진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누나, 매미가 귀에 붙은 거 같아.’

이 집에서 보내는 첫 번째 여름에 민우가 말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아파트의 4층에서는 아파트만큼 키가 큰 나무가 보였다. 둘이서 나란히 베란다에 서서 플라타너스나무에 붙은 매미를 찾아내기도 했었다.

우리 둘이 열심히 살자고, 언젠가 엄마 아빠를 만나게 되면 우리 정말 씩씩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어깨 펴고서 말해 주자고 그랬었는데.

그땐 그게 생의 가장 큰 시련이 될 줄 알았다. 부모님을 잃고 단둘이 남겨진 것. 삶의 전부였던 춤을 접어야만 했던 것.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선우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와 보이는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성한 나뭇잎이 짙푸르다. 다만 이제는 민우가 곁에 없을 뿐.

문득문득 선우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흘러가는 강물에 띄워진 종이배 같다는 생각도 한다.

‘정말 내 옆에 있고 싶어?’

울리는 매미 소리 위로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러고 싶다고 대답을 하기 전에 눈을 질끈 감았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남자는 계속해 보자고 했다. 간절함이 닿았기 때문인지, 그저 변덕이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꾸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을 한다.

“자, 그럼.”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선우는 혼자 소리를 내서 말하며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

“청소부터 해 볼까.”

주방을 겸한 작은 거실에 서서 선우는 크게 숨을 마셨다.

청소를 한 뒤에는 화장실 청소와 냉장고 정리도 해야 하고, 배터리가 닳아 버렸을 차도 점검을 받아야 했다.

할 일이 많은 오후였다. 매미는 여전히 귀가 따갑도록 울고 있었다.

* * *

리마트강의 물결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파랬던 하늘이 주황색과 분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문도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병맥주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앞자리에 앉은 강선욱 과장이 멀리 하늘을 보며 말했다.

“밤인데 해가 안 지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며칠째 아주 긴 오후를 보내는 기분이라며 선욱은 콜라를 마셨다. 저녁 8시 반. 취리히의 하늘은 이제야 해가 지고 있었다.

출장 4일 차가 저물어 간다. 주요한 일정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남은 일정은 현지 법인이 접대의 의미로 준비한 벤처 견학 정도.

중요한 일은 끝냈으니 맥주 한 병 정도 가볍게 마셔도 되지 않느냐는 송 팀장의 의견에 따라 호텔 근처의 루프탑 카페 앉은 참이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강가에는 사람들 많이 있었다. 피크닉을 나온 듯 매트를 깔고 앉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고,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레고가 스위스 거였나?”

옆에 앉은 송정태 팀장이 강가를 따라 지어진 집들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콜라를 마시던 선욱이 응대를 하였다.

“아닐걸요? 왜요?”

“집들이 말이야. 창문이랄까. 지붕이랄까. 뭔가 레고스러운 것 같아서.”

스위스는 아닐 거다, 검색을 해 보자, 미국이 아니냐, 덴마크였던 것 같다, 쓸데없이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들으며 문도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4일째.

그날의 통화를 끝으로 문도는 이선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일부러였다. 이 출장이 끝나고 돌아가는 그날까지 연락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덴마크 거네요.”

“그렇지? 어쩐지 비슷하다 했어. 유럽적인 어떤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해가 저물어 가면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정말 출장을 보름쯤 늘려 버릴까, 직원들은 먼저 다 돌려보내고 유럽 지사에 몇 주 더 머물러 버릴까. 문도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예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웃기게 이 지경이 되었어도 저항하고 싶고 버티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새로 시작한 관계에서는 이선우의 마음만 닳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기다리게 하고 싶었다. 애가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연락이 언제 올까 서성였으면 좋겠다.

그러다 영영 오지 않는 연락에 마음이 바짝 졸아붙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맥주 한 병이 다 비워졌다. 한 병을 더 주문하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선우.’

세 글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문도는 핸드폰을 들고 옥상의 난간 쪽으로 향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대답을 했다.

“네.”

— 전무님, 이선우입니다.

안다. 너라는 거. 문도는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너머에 시선을 주었다.

“말씀하세요.”

— 유라 씨 휴가가 길어진다고 해서요. 회장님께서 당분간 별장에 머무시겠다고 하셨대요.

청정한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서유라를 생각하자 픽, 웃음이 났다. 그 뒤로 말없이 듣고만 있으니 이선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 제 휴가는 언제까지인지 여쭤보려고 전화드렸어요.

이쪽이 9시를 넘겼으니, 서울은 지금 새벽 4시 정도. 저 말을 하려고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걸까.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어요?”

— 네. 업무 시간은 아니실 것 같아서요.

이선우의 대답은 투명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 외에 다른 용건이 있을 리 없지 않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문도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대답을 했다.

“휴가는 연장할 테니 더 쉬고 있어요.”

— 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문도는 왁자하게 거리를 지나는 관광객들을 내려다보았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이만 끊죠.”

— 전무님.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쳤다. 서로 입을 다물었는지 다시 적막이 흐른다. 문도는 이마를 매만지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요.”

— 언제쯤…….

이선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것만으로도 신경이 팽팽해진다. 문도는 등을 세우고 핸드폰을 바꿔 쥐었다.

—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왜.”

무뚝뚝한 대답에 이선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문도는 멀리 시선을 주었다. 석양에 반짝이는 강의 물결을 보고, 물살을 그리며 노니는 백조를 보았다.

— 기다리기가 힘들어서요.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가 뜨거운 물처럼 속을 훑으며 내려갔다. 하늘은 이제 검푸른 잉크를 풀어 놓은 것 같다.

강 건너 레고로 만든 것 같은 집들에 하나둘 노란 등이 켜지는 것을 보며 문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 돌아오시면 뵐 수 있는 거…… 맞죠?

선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가면 연락 줄 테니 기다려요.”

네, 하고 대답을 한 이선우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어서 말했다.

— 조심히 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문도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아주 긴 여름의 오후가 끝나 가고 있었다.

* * *

대형마트에 들른 선우는 생수와 복숭아를 샀다. 햇반과 라면도 골랐다.

계산을 마친 뒤에는 자율포장대에서 커다란 박스를 집어 들었다. 그 박스 안에 복숭아도 담고 라면도 담고 햇반도 담았다.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 빨간불이 들어온 횡단보도 앞에 멈춘 선우는 거리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켜지는 시간. 멈추어 쇼윈도를 보는 젊은 여자 둘이 보였다.

쇼핑을 하고, 친구와 수다를 떨고, 거리를 걸었던 일이 오래전의 일처럼 아득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꽃이 피는 봄이 한창일 때 같은 국립발레단 동기였던 지혜와 빨간색 플랫슈즈를 샀던 기억은 났다.

놀이터 앞에 주차를 하고서 장을 본 물건들부터 가방에 담아 먼저 옮겼다. 생수와 복숭아를 냉장고에 넣고 라면과 햇반은 수납장에 넣었다.

그것만 했는데도 무더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직 박스가 남았다. 선우는 다시 내려와 박스를 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깨끗하게 청소해 두었던 민우의 방문을 열었다. 안방 겸 거실로 쓸 수 있는 큰 방은 선우에게 양보하고서 옷장 하나, 책상 하나를 두고 바닥에 이불을 깔면 꽉 차는 공간에서 지냈던 민우였다.

선우는 옷장 문을 열었다.

민우의 옷을 꺼낸다. 학교의 로고가 새겨진 점퍼와 민우가 아껴 입었던 청바지를 박스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몇 벌 되지 않는 옷에 마음이 아파서 중간중간 크게 숨을 쉬었다.

책상에 꽂혀 있는 전공 서적도 넣고 엄마 아빠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넣었다. 아직 반병이 남아 있는 향수도 넣는다.

스물세 살, 민우의 삶은 박스 하나로 정리가 되었다.

선우는 박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골판지로 이루어진 박스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민우야. 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정리를 할게. 그래야 누나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깊이 숨을 마신 선우는 박스를 닫고 테이프를 둘렀다. 밀봉한 박스를 베란다 창고에 넣고 문을 닫았다.

선우는 그 문에 등을 기대고 한참을 있다가 손목을 들었다. 워치를 누르고 30분 전쯤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주소 보내요.]

서문도 전무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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