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완벽한 패배
전화벨이 울린 건 문도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팀원들과 내일 좋은 컨디션으로 만나자며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게 조금 전이다.
이 시간에 누가, 라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 문도는 핸드폰이 놓인 테이블을 보곤 우뚝 멈추었다.
‘이선우.’
액정에 떠 있는 글씨가 눈을 찌르는 기분이다. 잠깐 멈춰 서 있다가 무시하고 소파에 앉았다.
맥주를 반 정도 쉬지 않고 마셨다. 열다섯 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피로는 충분히 쌓였다. 이 한 캔을 전부 비우면 시트를 푹 뒤집어쓰고 잠을 잘 테다.
끈질기게 울리던 벨 소리는 어느 순간 멎었다. 비어 있는 캔맥주를 내려놓는데 이번에는 비행기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메시지 착신음이다.
전화가 안 되니 메시지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서유라 씨 관련한 일로 여쭤볼 것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시간 되실 때 전화 주세요.]
건조하고 사무적인 메시지였다.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대체 뭘 기대했던 건가. 다시 생각해 달라는 말? 이대로 일을 계속하게 해 달라는 말? 그도 아니면.
한심해서 웃었더니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서유라 관련한 일이라니 전화를 해야겠지.
돌이켜 생각하니 웃겼다. 언제는 이선우가 개인적인 용건으로 연락을 해 온 적이 있었나 싶어서.
문도는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히 용건만 들을 생각으로 거는 전화인데 웃기게도 목 뒤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 네, 전무님. 이선우입니다.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문도는 눈을 감았다. 씨발, 열다섯 시간을 날아왔는데 왜 이렇게 가까워.
“서유라 관련한 일, 말씀하세요.”
— 회장님께서 별장에 가신다고요. 유라 씨도 데려가신다고 하시는데, 저도 같이 가도 되는지 여쭤보려고요.
벌써 그때가 되었나.
회장은 여름 휴가철이 되면 맑은 공기 타령을 하면서 박소영과 평창에서 며칠씩 머물다 오곤 했다. 서유라를 데려간 적도 꽤 있었고.
문도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선우가 말을 덧붙였다.
— 유라 씨는 제가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고 있어서요.
문도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명 실장에게 일찍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돌아오지 못할 휴가를 보내 놓고 내일이든 모레든 시간이 날 때 명 실장에게 해고 처리를 하라고 연락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이선우에게 말했다.
“따라갈 필요 없습니다. 며칠간 휴가드릴 테니 이선우 씨는 집에 가서 쉬고 있어요.”
— 네?
“휴가가 끝나는 대로 해고 처리하겠습니다.”
— 그럼 저는…….
“오늘로 업무는 종료되었다는 뜻입니다.”
아,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깨달음의 소리인지 당혹스러움의 표시인지 구분은 잘 되지 않았다.
— 오늘 나가라는 뜻인가요?
이선우가 멀리에서 묻는다. 문도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깨끗한 흰색의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오늘부터 쉬면 됩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둘로 나뉜 공간에 같은 시간이 흘렀다. 통화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끊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끊어야지. 문도는 소파 깊이 묻었던 상체를 세우면서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잘 지내길 바랄게요.”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였다.
— 전무님, 잠시만요.
이선우가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 * *
선우는 무작정 남자를 불렀다. 부르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무는데 수화기 건너편에서 남자가 말했다.
— 말씀하세요.
시간이 흐른다.
1초. 2초. 3초. 그리고도 몇 초 더. 서문도가 낮은 한숨을 쉰다. 모르겠다. 우선은 한 번 더 부탁을 할 수밖에.
“제가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유라 씨 난동 피우는 일 없게 할게요. 잘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멀리에서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웃었다.
— 무슨 노력을 더 합니까. 거기서 더 무슨 노력을 해. 이선우 씨 할 만큼 했어요. 그만하면 됐습니다. 미련 버려요. 더 할 말 없으면 끊겠습니다.
“잠시만요. 잠시만.”
선우는 급하게 문도를 붙들었다. 머릿속이 뜨겁다. 어떻게 해야 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나를 다시 돌아봐 주나. 선우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했다.
서유라의 트레이너로서 노력하겠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면.
업무적인 관계는 이미 이렇게 끝나 버린 거라면. 선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뜨면서 입술을 뗐다.
“제가 정말로 싫으세요?”
미련이 잔뜩 남은 여자가 되어 남자의 발목을 잡아 본다. 이래도 잘리고 저래도 잘린다. 그게 오히려 용기를 주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면 던지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어이없는 소리 한다고 비웃는다면 잠깐 창피하면 될 일이었다.
— 그걸 지금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끝난 이야기고.
왜냐면.
어째서 가만히 있지 않느냐 자신을 향해 사납게 화를 냈던 목소리가 생생하니까.
불꽃 일렁이던 눈동자도 자꾸만 생각이 나니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내게 아직은 마음이 남은 것처럼 보이니까.
“저는 전무님 좋아해요.”
침묵이 흘렀다. 대답이 없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다시 못 볼 사람, 던질 수 있는 건 다 던져 볼 거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조금 더 대담해지는 것도 같다. 멀리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서문도 전무는 가슴 시리게 하는 싸늘한 표정을 전하지 못할 테니.
“처음부터 좋았어요. 좋아해서 그랬어요.”
거짓된 고백을 하면서 선우는 남자가 흔들리기를 바랐다.
눈앞에 있는 내가 거슬렸다는 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다는 건, 아직도 나를 원한다는 거잖아.
대답이 없는 남자를 향해 선우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냥 가까이에 있고 싶었어요. 여기서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전무님을 가져 보고 싶었어요. 주제넘은 짓인 거 알면서 그랬어요.”
긴 침묵만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이 침묵이 자신의 편이길 선우는 간절히 빌었다.
아직 내게 미련이 남아 있기를 바라. 나를 원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를.
“그냥 계속하면 안 돼요? 저는 전무님만 있으면 돼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척을 하면 된다. 할 수 있었다. 몸도 주었는데 마음이라고 못 줄까. 어차피 남은 것도 얼마 없는 마음이었다.
전부를 줄 테니까 다시 나를 불러 줘. 마음이 졸아붙는다. 선우는 침묵을 견디며 문도의 대답을 기다렸다.
— 뭘 계속해. 이제 와서 뭐를.
간절한 선우의 귓가에 남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스몄다. 비틀린 웃음소리였다.
스스로를 비웃고, 이런 지저분한 관계를 비웃고, 이렇게 구차하게 매달리고 있는 선우를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
밀려나는 기분에 선우는 주먹을 꾹 쥐었다. 눈을 감고 숨을 쉬었다.
“좋아해요. 전무님.”
— …….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아주 잠시라도 좋아요.”
남자는 말이 없다가 낮게 웃었다.
— 내가 왜.
그 말을 남겨 놓고 전화는 끊어졌다. 뚜— 뚜— 이어지는 신호음 소리가 선우의 심장을 내리긋고 있었다.
* * *
이게 무슨.
핸드폰을 부서질 것처럼 쥐고서 문도는 헛된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리가 뜨겁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선우가 좋아한다, 그 말을 날리는 순간부터 뇌가 기능을 멈춘 것만 같았다.
벌떡 일어난 문도는 미니바를 열어 맥주 캔을 뜯었다. 그 자리에 서서 벌컥벌컥 한 번에 들이켰다. 맥주 캔 너머로 새하얀 천장이 눈앞에 보이는데,
‘좋아해요.’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지난날의 이선우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베란다에서 바람처럼 춤을 추었던 이선우. 몇 번이고 차를 들고 올라와 무작정 들이댔던 이선우. 스킨십에 서툴렀던 이선우. 동이 트는 아침에 건너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동으로 돌아갔던 이선우.
천천히 눈을 뜬 문도는 뜨거운 웃음을 삼켰다. 그래. 졌다. 이제 더는 못 해 먹겠다. 이제는 그만 백기를 들고 싶었다.
유구한 역사의 호구 유전자를 이렇게 증명한다. 허탈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넘어가고야 말 거, 의미 없는 저항은 왜 그래 오래 했는지.
애초에 염병첨병을 떨면서 잘라 내겠다고 지랄을 했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걸 갖은 저항을 다 해 보고서야 깨닫다니. 병신 새끼가 따로 없지.
한숨을 삼킨 문도는 뒤를 돌았다. 방으로 들어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선우.”
— ……네.
이선우의 대답이 느렸다. 넌 왜 목소리도 어여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문도는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는 말, 진심이야?”
문도는 무의미한 질문을 던졌다.
— ……네.
이선우가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그거면 됐다. 더 무엇이 필요할까.
거짓일 수 있다는 거 안다. 뛰어난 연기일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어쩔 건가. 이미 마음에 담아 버렸는데.
거짓말 잘하고 연기 잘하는 여자를 좋아하면 되는 거지. 순수하게 내가 좋아서 그랬다는 그 말, 믿는 척하면 되는 거지.
그러다 어느 날에 질리게 되면, 그때 끝을 내면 되는 거지.
“정말 내 옆에 있고 싶어?”
— ……네.
옆에 못 둘 게 뭔가. 지저분한 관계가 아니면 되지 않는가. 자신은 결혼을 한 유부남도 아니고 죽음을 앞둔 늙은이도 아니었다.
심지어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돈과 섹스가 오가는 거래가 아닌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연애를 하면 되지 않나.
“계속할까.”
— ……네.
눅눅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밀어내는 이선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도는 이제 순순히 물살에 몸을 던지기로 했다. 막을 수 없는 물길이라면 길을 터 주는 게 답일 테니. 이렇게 흘러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멈추기도 하겠지.
“그래. 계속해.”
문도는 백기를 들었다. 차라리 후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