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AW
느지막이 일어난 서유라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며 거실로 나오다가 선우를 보고는 눈을 찡긋하며 인사를 했다.
“으응. 그랬구나아. 진작 말을 하지 그래썽.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만 의심했지 모야. 아이, 미안하다니까. 웅웅. 마니 다쳐쏘. 어제 스무 바늘도 넘게 꼬맸궁. 자기가 나중에 호 해 줘야 해? 알았지?”
소파에 풀썩 앉으며 나누는 서유라의 대화가 선우의 귀를 의심케 했다. 하루 만에 최지상과 화해를 했다고?
“그래 들어가궁. 응응. 올라올 때 꼭 연락하궁. 응응. 나도 따랑해.”
혀가 반 토막이 난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서유라는 전화를 끊었다. 손에 감긴 붕대만 아니었으면 어젯밤의 그 난동이 꿈인가 싶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래요? 스캔들은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응. 그렇대. 좀 있음 기사 뜰 거야. 울 쟈기가 열받아서 난리 쳤대. 좀 이따 정정 기사 뜰 거구, 걘 서우철이랑 사귀는데 그것도 곧 터질 거래. 둘이 만나는 자리까지 데려다준 거래. 난 기사랑 사진 벌써 받아서 봤징.”
머리를 벅벅 긁더니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울 쟈기가 그럴 리 없지. 아, 배고프다. 오늘 점심 뭐 준비했는지 물어봐봐. 졸라 매운 거 먹고 싶은데. 야, 우리 닭발 시킬래? 아휴, 괜히 지랄했네.”
맥이 탁 풀린다. 이렇게 금방 손바닥 뒤집듯이 하하호호 웃을 거였으면 왜 그런 난리를 피웠는지.
다치는 것도 감수하고 뛰어들었던 자신의 마음은 무엇이었으며, 발을 동동 굴렀던 아주머니들은 또 무엇이었나. 목으로 뜨거운 것이 치받치는 기분이었다.
그 일로 인해 서문도 전무에게 밉보이는 바람에 자신은 잘리게 되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허무하고도 허탈했다.
“야, 뭐 해. 닭발 주문하라니까.”
끓어오르는 마음을 식히느라 가만히 있는 선우에게 유라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래도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서문도 전무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유라가 난동을 부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 좋아지고 있지 않냐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냐고. 목소리 높여서 항의를 했었는데.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까. 그때의 비웃음이 너무나 생생했다.
“아, 주문하라고!”
서유라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선우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장 여사에게 서유라가 매운 닭발을 먹고 싶어 한다고 전달을 하고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명치 근처를 문지르며 숨을 깊이 마셨지만 좋아지지 않았다.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꽉 막혀 있었다.
“닭발 시켰어요. 배달 오면 가져다주신대요.”
계단을 마저 올라가서 말했더니 유라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으로 빠르게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삐용삐용 커다란 전자음이 게스트룸의 거실에 울렸다.
선우는 유라와 떨어진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초록색의 물감을 힘차게 휘갈긴 것 같은 여름의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억세고 질긴, 힘이 넘치는 계절이었다. 생명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무성해지는 계절.
짙푸른 정원을 바라보는데 가슴속에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이렇게는 떠날 수 없다. 살아남아야지. 저 푸른 생명들처럼 질기고 강하게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하나 해고하는 일쯤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는 서문도 전무.
그 난동을 피워 민폐를 끼치고도 낄낄거릴 수 있는 서유라.
이렇게 무도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고.
자신을 한낱 소모품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눈치 같은 거 보지 말고, 진심 같은 거 다하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고.
그러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집에 하루라도 더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선우는 그 생각만 하기로 했다.
* * *
이륙을 마친 비행기 안은 이내 어두워졌다.
프랑크푸르트의 깜깜한 밤하늘을 밝히는 건 비행기의 날개에서 깜빡이고 있는 붉은색의 등뿐이다.
“아니, 얘들은 덩치도 좋은 애들이 왜 이렇게 자리를 좁게 만들어. 이게 비즈니스석이 이게. 다리를 어디다 올려야.”
야구선수처럼 체격이 좋은 송 팀장이 구시렁거렸다.
비즈니스석치고 좁은 좌석 때문인지 엉덩이를 이리 댔다 저리 댔다 하며 자리를 잡다가 문도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한 시간이면 도착하니까요. 잠깐 눈 붙이세요.”
취리히까지 가는 밤 비행기 안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듬성듬성 미등이 켜진 자리가 보일 뿐이다.
문도는 시트를 뒤로 기울여 몸을 눕혔다. 붉게 깜빡이는 날개등이 시야의 끝에 걸렸다. 한국은 지금쯤 새벽일 테니, 이선우는 자고 있겠지.
자신을 바라보던 이선우의 얼굴은 깜빡이는 등처럼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단단한 눈동자로 항의를 했다가, 마지막에는 멍하니 서 있었다.
과한 처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잘릴 만큼 잘못한 것도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이미 고용인과 한집에서 뒹굴 결심을 했을 때부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물 건너가지 않았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이선우를 멀리하기란 자학에 가깝다. 내가 내 집에서 왜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데.
취리히의 호텔에 도착을 하면 명 실장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이선우도 없겠지.
문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오늘은 명 실장이 올까.
아침 일찍 별채로 건너온 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금방이라도 잘라 버릴 것처럼 굴었던 서문도 전무였으니, 명 실장에게 바로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어제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선우는 쑥 꺼지는 것 같은 눈동자를 손으로 꾹 눌렀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지 머리에 뿌연 수증기가 낀 것 같았다.
명 실장에게 연락이 오면 못 나가겠다고 우겨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아직 7시도 안 된 시간에 인터폰이 울리다니.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더니 장 여사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선우 씨, 막내 아가씨 깨워요. 회장님께서 작은 사모님이랑 평창 별장엘 가시겠대. 어지간한 건 거기 다 있으니까 갈아입을 옷이랑 화장품 같은 거나 챙겨서.
“네?”
— 일단 아가씨부터 깨우고, 얼른.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야기였다. 갑자기 별장에 간다고? 아무런 통보도, 준비도 없이?
“잠시만요, 별장에 가신다고요?”
— 응, 응. 회장님 곧 출발하신다고.
“유라 씨도요?”
— 그래. 막내 아가씨도 가야 한다니까. 회장님이 데려가시겠대. 회장님 성격 급하셔. 준비 서둘러요. 바로 출발하실 것 같아. 아, 집사님, 잠시만요. 그거 그쪽 아니야.
장 여사가 금방이라도 통화를 끊을 것 같았다. 선우는 급히 다시 물었다.
“혹시 저도 같이 준비를 해야 할까요?”
— 그러게. 그건……. 네, 사모님. 지금 가요. 선우 씨, 그건 전무님께 여쭤봐요. 내가 좀 바쁘네. 번호 알지?
본관 안쪽의 소란함이 인터폰을 통해서 들려왔다.
“아, 그런데.”
전무님은 출장 중이신데요, 라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인터폰이 뚝 끊겼다. 선우는 신호가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서문도 전무와 통화를 할 수 있다고? 이렇게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지? 별장까지는 따라가고 싶다고 할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어야 할까?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진다.
일단 서유라를 깨우자. 복잡하게 엉키는 생각을 멈춘 선우는 일단 게스트룸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유라 씨. 일어나셔야겠어요. 유라 씨.”
두어 번을 노크해도 기척이 없어서 선우는 문을 열었다. 해가 절반 이상 들어온 침대 위에 안대를 쓰고 자고 있는 서유라가 보였다.
“유라 씨. 별장에 가셔야 한대요.”
“으으…….”
“어서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아으……. 무슨 준비.”
“평창에 가셔야 한대요. 별장에요.”
평창이라는 말에 돌아눕던 서유라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안대를 벗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뭐?”
“본관에서 연락이 왔어요. 별장에 가셔야 한대요. 서둘러 준비하래요.”
“나도? 나도 같이 가야 된대? 그 산골짝에? 지금?”
“네. 금방 출발하실 건가 봐요. 빨리 준비하라고 인터폰 왔어요.”
서유라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왜? 내가 왜!”
선우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서둘러 여행용 트렁크를 꺼냈다. 그사이 서유라는 박소영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손을 다쳤는데 왜 휴가를 가냐고! 좋기는 뭐가 좋아! 거기 공기를 마시는데 왜 상처가 빨리 낫는 건데? 말이 되냐고! 거기 병원이 있어 뭐가 있어! 아, 그냥 나 못 간다고 그러라니까!”
징징거리며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뚝 끊겼다. 드레스룸으로 터덜터덜 걸어온 서유라가 하아, 하는 긴 한숨을 쉬더니 선우에게 말했다.
“그거, 뭐야. 3일 정도 머문다니까 대충 알아서 싸. 화장품은 선크림하고 기초만 챙기고, 핸드폰이랑 패드 충전기도 챙겨 놔. 다 챙겼으면 건너가서 니 짐도 싸고.”
당연히 선우도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선우는 수납장 안쪽에 있는 트렁크를 꺼내며 유라에게 말했다.
“저는 못 갈지도 몰라요.”
“왜? 뭐야, 너만 안 가려고?”
“아뇨, 그게 아니라 장 여사님께서 일단 전무님께 허락 맡으라고 하셔서요.”
“그놈의 서문도. 졸라 짜증 나. 아, 몰라 대충 하고 짐이나 싸 놔.”
서유라가 욕실로 향했다. 선우는 서유라의 짐을 챙겼다. 손으로는 바쁘게 짐을 싸면서 머리로는 전화 통화할 생각을 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어떤 말을 해야 조금이라도 그 남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짐을 다 싸 놓은 뒤 선우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명 실장에게 연락이 올 것 같아 가지고 왔는데,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핸드폰을 손에 쥔 선우는 거실로 나왔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통화를 하고 싶었다.
마땅한 공간을 찾다가 지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았다. 언젠가 박소영이 머물렀던 작은 방을 생각해 낸 선우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을 닫아걸고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걸기 전에 시간 계산을 해 본다.
스위스는 자정 근처. 전화를 하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못 할 시간도 아닌 그런 시간이었다.
서문도 전무의 번호를 찾아서 화면에 띄웠다. 쿵쿵쿵쿵, 심장이 세게 뛰었다.
결심을 굳힌 선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