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내내 그 목소리가
선우는 터덜터덜 숙소동으로 돌아왔다. 몹시 피곤했다. 그리고 멍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오늘부로 잘렸다는 것.
그리고…….
모르겠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해고라는 말 외엔 전부 머릿속에서 엉켜드는 기분이었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방에 불이 켜져 있고, 장 여사와 조리사 아주머니가 차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우가 들어가자 자동으로 두 사람이 선우를 바라보았다.
“다녀왔습니다.”
선우는 지친 미소를 보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조리사 아주머니의 시선이 선우의 팔로 향했다.
“다쳤다면서. 어쩌다 그랬어. 조심을 했어야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우를 보면서 말을 해 주는데, 마음에 뜨거운 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다.
“그러게요. 조심할걸 그랬어요.”
이런 이유로 잘리게 될 줄 알았다면 조심을 할걸 그랬다. 서유라를 감싸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고 바깥에서 구경이나 할걸. 그랬더라면…….
당신은 나를 자르지 않았을까.
“고생했어, 선우 씨. 막내 아가씨가 걱정하더라. 내가 반나절 쉬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내일은 점심 먹고 천천히 본관으로 와.”
“네. 감사합니다.”
서유라는 언제까지 본관에 머무르게 되는 걸까. 운동복이며 촬영 장비 같은 게 전부 별채에 있는데 가지고 가야 하나. 그런 생각 끝에 선우는 장 여사에게 물었다.
“유라 씨는 언제쯤 별채로 돌아오나요?”
“내일 별채 대청소를 하려고. 전무님도 유럽 출장 가시고 막내 아가씨도 본관에 있으니까. 이 김에 업체 불러서 싹 한번 청소하게. 한나절이면 끝나. 저녁엔 별채로 가셔야지.”
네, 하며 장 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말은 하나였다.
서 전무가 유럽으로 출장을 간다는 말.
2, 3일 시간을 주겠다는 건 돌아오기 전에 나가라는 뜻이었구나. 그러니까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었어. 찾아가 다시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도 못 하겠네.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이 피곤해 보였는지 장 여사가 안쓰러운 눈으로 선우를 보며 말했다.
“올라가서 쉬고, 내일은 천천히 나와요.”
“그래, 늦잠도 좀 자구.”
조리사 아주머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네, 그럴게요. 대답을 하면서 선우는 선선히 웃었다.
며칠이 지나면 아주머니들도 못 보게 되는 건가, 그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일단 덮어 놓았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진짜로 헤어지게 될 때나 해야 할 것 같았다. 벌써부터 하면 못 견딜 것 같으니까.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느 평범한 날의 밤처럼 선우는 아주머니들에게 인사를 했다. 계단을 오르며 씻어야겠다는 생각만 고집스럽게 했다. 씻고, 어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씻고 나와서 지친 몸을 침대에 누였을 때, 선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눈이 쑥 파이는 것처럼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선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둠이 더 어두워지도록. 어둠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밀려들었다.
서유라에게는 언제 말을 해야 하나. 2, 3일이라고 했으니 3일째에 나가면 되나.
명 실장님에겐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할까. 아니면 알아서 찾아오는 건가. 아주머니들에겐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쇼핑을 할 시간이나 있을까.
여기가 정말로 끝인 걸까.
길게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정리를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왜 나는…….
재고는 하지 않겠다며 돌아섰던 서문도를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떠올랐다. 실은 돌아오는 길부터 내내, 머릿속에는 서문도 그 남자뿐이었다.
‘다치고 싶어서 환장했어? 왜 가만히 있지를 않아! 왜 자꾸!’
그때 그 순간 남자의 눈에서 보였던 불꽃 같은 것이, 점점 커지던 목소리와 눈을 질끈 감으며 씨발, 하고 욕설을 뱉던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난다.
아니, 아닐 거야.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다친 자신을 걱정할 리가 없다. 자신 때문에 심란해할 그런 남자는 아니지 않나. 그런 이유로 해고하는 건 아닐 거였다.
일순간 자신을 잘라 냈던 남자였다.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서 출퇴근 시간까지 조정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미련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끓는 눈동자 같은 거, 자신이 만들어 낸 환영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아주 작은 미련이라도 남은 거라면. 여전히 자신을 원하는 마음이 남자에게 남아 있는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선우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뭐 하고 있니, 이선우. 그 사람은 널 잘랐어. 꼴도 보기 싫다는 뜻이야. 거기다 내일이면 유럽으로 날아가 버린다잖아. 그런데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선우는 감고 있던 눈을 한 번 더 질끈 감았다. 그래도 서문도는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어질 뿐.
감긴 눈 안에서 서문도가 가볍게 웃는다. 노을을 등지고 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은 왜 내게 그렇게 웃어 주었을까. 이렇게 잘라 버릴 거였으면서.
울컥하고 목이 메어 왔다. 못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못된 사람이라고.
그러니 기대 같은 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선우는 눈을 꾹 감았다. 꿈 없는 깊은 잠이 간절한 밤이었다.
* * *
다음 날은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최대한 늦게 움직이겠다 생각하고 일어났는데도 아침 8시였다.
출근을 한 옥수댁 아주머니와 마주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한창 방영 중인 드라마 이야기를 들으면서 커피도 마셨다.
옥수댁 아주머니가 청소를 감독하러 별채로 건너간 뒤에는 조리사 아주머니들과 함께 식재료를 다듬었다. 양파를 까고, 소박이용 오이를 다듬고, 부추를 물에 씻었다.
점심으로는 늙은 오이 무침과 고구마 줄기 무침을 넣고서 밥을 비벼 먹었다.
매운 고추장을 넣어서 부채질을 해 가며 맛있게 먹고 후식으로는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반나절의 휴식 시간을 보낸 뒤에 선우는 숙소동을 나섰다.
별채가 아닌 본관 쪽으로 난 길을 처음으로 걷는데, 꼭 다른 집에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긴, 다른 집이 맞지.
바보 같은 자신의 생각에 피식 웃으면서 본관의 정원을 걸었다.
소박한 숙소동의 정원이나 심플하고 넓은 별채의 정원에 비해 본관의 정원은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이었다.
화단처럼 길게 설치된 물길도 있고, 잉어가 노니는 연못도 있고, 파고라와 조각상도 있는 본관의 정원에는 이름 모를 정원수들이 푸르게 우거져 있었다.
한 바퀴를 빙 둘러보는데 별채와 본관을 나누는 담을 따라서 능소화가 주렁주렁 피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에서 넘어왔던 거구나.
푸른 잔디만 있을 뿐, 꽃도 나무도 없는 별채의 후원에서 유일하게 화려함을 뽐내는 존재가 벽을 뒤덮은 능소화였다.
새하얀 회벽을 뒤덮은 붉은 노을색의 꽃이 태양 아래에서도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있었다.
눈을 아리게 하는 주황빛 꽃을 잠시 바라보다 선우는 벨을 눌렀다. 어서 들어와요, 장 여사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삑 소리가 나며 현관문이 열렸다.
“우 대표님 오늘 쉬는 날이시거든. 선우 씨 대표님 뵌 적 있나?”
주방에서 나와 선우를 맞아 주던 장 여사가 선우에게 물었다. 아니요, 라고 말하며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서문도 전무의 서재에서 액자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럼 인사부터 드려요.”
선우에게 작게 말한 장 여사가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앤틱 가구로 고풍스럽게 꾸며 놓은 다이닝룸이 보였다.
“대표님, 이선우 씨가 인사드린대요.”
선우는 장 여사를 따라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우현희 대표는 가로로 긴 식탁 한쪽에 앉아 노트북을 펴 놓고 있었다.
노트북 옆으로는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김이 오르고 있는 커피 한 잔과 예쁘게 깎아 놓은 복숭아가 접시에 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서유라 씨 담당하고 있는 이선우입니다.”
선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현희예요. 어제 이야기는 장 여사님께 들었어요. 팔은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고개 들어 우현희 대표를 보는 순간, 선우는 서문도 전무를 떠올렸다. 길고 늘씬한 체형도, 갈색의 눈동자도, 잘생긴 이목구비도 서문도를 떠올리게 했다.
다만, 우 대표의 눈빛은 강인한 듯 부드러웠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래서 때로는 숨을 막히게 하는 서문도의 눈빛과는 다르게.
“유라 아가씨는 아직 기상 전인 듯하니 게스트룸 거실에 편히 있어요. 장 여사님, 선우 씨도 커피 한 잔 내려 줘요.”
“그럴게요. 어때요, 대표님. 제 말대로죠?”
장 여사가 주방 쪽에서 목소리로만 물었다. 무슨 소리일까 싶어 선우는 주방 쪽을 보았다.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장 여사가 나왔다.
“그러네. 장 여사님 말대로 선우 씨 곱고 예뻐요. 그리고 또 내 눈에는.”
우 대표의 시선이 머쓱해하는 선우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 시선이 서문도와 다른 듯 비슷해서 마주하는 동안 선우는 숨을 쉬기가 불편해졌다.
“이선우 씨, 단단하고 강해 보이네. 문도가 유라 아가씨 옆에 두는 이유를 알겠어요.”
아직 우 대표에게 자신을 해고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나 보다. 장 여사도 그렇고 우 대표도 그렇고 그만두는 것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선우는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감사하다고만 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우 대표가 이만 물러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에게 향했던 시선은 이내 숫자 가득한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다.
“선우 씨, 이쪽으로. 회장님은 지금 침 맞으시는 중이라 나중에 인사드리면 될 거야.”
선우는 장 여사의 안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웅장한 본관답게 공간은 몇 군데로 나뉘어 있었는데, 장 여사를 따라가니 별도의 작은 거실을 가진 게스트룸이 나왔다.
“아가씨 일어날 때까지 쉬고 있어.”
“네.”
장 여사가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선우는 소파에 앉았다. 혼자가 되자마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가만히 있지를 않아. 왜 자꾸.’
그 뒤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욕설로 대신했던 그 말은 무엇일까.
해고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뒤에 말이 무엇이든 자신은 나가야 했다. 그러니 이렇게 자꾸만 떠올리는 것도 아무런 쓸모없는 일임을 알지만.
선우는 눈을 감았다. 내내 그 목소리가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