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만 내려가세요
이제 그만 나가 달라니.
선우는 눈만 깜빡이며 문도가 한 말을 생각했다. 잘못 들었던 것 같다. 아니,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설마 지금 해고를 하는 건 아닐 테니.
어디에서 나가란 말인가. 이 거실에서? 별채에서?
그래. 아마 그런 뜻인가 보다.
꼴 보기 싫으니 2층에서 내려가라는. 별채에서 나가라는. 얼굴 보기 싫으니 눈에 띄지 말라는 그런 뜻.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하는데, 서문도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퇴직금이나 상여금에 대해선 조만간 명 실장이 알려 줄 거고, 2, 3일 정도 정리할 시간 줄 테니 준비되는 대로 천천히 나가세요.”
아주 멀리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귀로 흘러 들어온 목소리는 금방 해석이 되지 않고 머리를 울렸다. 그 와중에 유난히 크게 들리는 단어가 있었다.
퇴직금. 상여금.
선우는 멍한 시선을 들어 일어서는 서문도를 바라보았다. 등을 완전히 편 남자는 키가 커서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니 너무나 잘 알겠다. 남자는 자신을 해고하는 중이었다.
“혹시 오늘 일 때문인가요?”
문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고 있는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왜 갑자기 잘려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납득을 하는 데 대답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잘 아시네요.”
“유라 씨가 다쳐서요?”
가벼운 웃음이 났다. 서유라가 다친 게 대수일까. 서유라의 상처는 그에게 아무런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문도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자 선우가 다시 물어왔다.
“혹시 유라 씨가 난동을 피워서 그러세요?”
문도는 급히 물어오는 여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지쳐 있는 얼굴, 이리저리 피가 묻은 옷, 무엇보다 팔뚝에 감겨 있는 붕대.
그 안의 상처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길게 찢어진, 붉은 피가 흘렀던 상처. 뜨끈하게 그를 베는 것 같았던 이선우의 상처.
“네. 그래서 이럽니다.”
문도는 간단히 긍정했다. 이유를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서유라가 난동을 피우는 것도 지겨웠고, 이선우에게 흔들리는 것도 그만두고 싶었다.
문도가 짧게 대답을 하자 선우는 급하게 해명을 시작했다.
“유라 씨가 난동을 피우긴 했지만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최지상 씨가 다른 여자랑 사귀고 있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전화를 안 받아서, 연락이 안 되니까 화가 나서.”
문도는 물끄러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선우는 구구절절 설명을 하고 있었다. 서유라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이선우는 모르겠지만 서유라의 발광은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악플을 받아서, 돈이 필요해서,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을 해서 등등. 주기적으로 그래 왔다. 아마도 평생 저럴 테지.
하지만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오늘로 끝이다. 더는 봐줄 수 없었다.
서유라도, 눈앞의 이선우도 이 집에서 싹 다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평온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유가 있으면 난리를 쳐도 될까요? 난리를 친다 한들, 내가 왜 그걸 다 받아 줘야 하죠?”
“받아 달라는 게 아니라…….”
“됐습니다. 더 이상은 받아 줄 수 없다는 게 내 결정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이만 내려가세요.”
문도는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여자와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저리 같은 서문도가 튀어나올 테니.
아니, 실은 벌써 튀어나와 있었다.
실제의 이선우를 마주한 뒤로 눈을 못 떼고 있는 서문도가.
팔에 칭칭 감긴 붕대만 보고도 가슴이 지끈거리는 서문도가 이선우의 주변을 서성거린다. 그러니 빨리 들어가야 했다.
“유라 씨는 어떻게 되나요?”
돌아서는 그에게 선우가 물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를 따라 쫓아왔다.
“병원으로 보내실 건가요?”
다급해 옷자락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문도는 걸음을 멈추고 피곤한 한숨을 쉬었다.
꼭 모진 말을 해야 떨어져 나갈 건가. 왜 한 번에 물러서지를 않아.
“이선우 씨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 잘 알 텐데요. 오늘부로 해고라는 말, 꼭 해야 하나요? 좋게 좋게 말하면 알아들어야지, 왜 이렇게 구차하게 굴어.”
상처받는 표정이었다. 상처받으라 한 말이기도 했다. 상처받아도 상관없었다. 문도는 다시 등을 돌렸다. 이젠 떨어져 나가겠지. 후련하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했다.
차갑게 말하며 돌아서는 문도의 뒷모습을 보다가 선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해고를 당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서유라를 돌보는 길었던 시간 중에 단 한 번 있었던 난동이었다. 한 번의 일로 이러는 건 너무한 일 아닌가.
“전무님.”
선우는 멀어지는 서문도를 쫓아갔다. 또 무슨 일이냐는 듯 걸음을 멈추며 서문도가 인상을 썼다.
짜증을 감추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동안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 없었다.
“유라 씨 좋아지고 있었어요. 아시잖아요.”
이제 간신히 자신에게 마음을 연 서유라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
병원이라니. 핸드폰을 찾아야 하는 자신의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삭막하기만 할 병원이 서유라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유라 씨 많이 노력 중이었어요. 운동도 하고, 식단도 조절하고, 담배도 줄였고요. 그런데 병원으로 보내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텐데. 이제까지 해 왔던 게 전부 수포로 돌아갈 거예요.”
픽,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진심을 조롱하기엔 조소만 한 게 없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마음이 쓰릴 리가 없을 테니.
“누가 서유라를 병원에 보낸다고 했었나.”
병원이 아니면 어디? 생각을 하다가 다른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다는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계속해도 좋다고 해 놓고, 사실은 해고를 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른 트레이너를 구하실 생각이세요?”
“이선우 씨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요.”
왜 상관이 없어.
선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몇 개월을 고생하며 돌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선우였다.
뭐라도 알아내고 싶어서 접근을 했지만, 서유라를 돌보는 일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주스를 뒤집어쓰고, 음식이라 부르지 못할 것들을 꾸역꾸역 먹었던 것은 눈앞의 남자가 아닌 자신이다.
때로는 눈물을 참아 가며, 때로는 목을 조르고 싶은 마음을 눌러 가며 서유라를 돌봤다.
서유라에게 술을 줄여라, 담배를 줄여 보라 부탁을 하는 것도 자신이었고, 어쩌다 한 번씩 어깨 으쓱이며 담배 안 피웠다고 하면 손바닥 부르트게 박수를 치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는 동안 민우의 일과는 별개로 선우는 서유라가 건강해지기를 원했다.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원했다. 최지상 같은 남자를 끊어 내기를 원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들까지 매도할 수는 없는 거였다.
“병원도, 다른 트레이너도 서유라 씨에게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거예요.”
그 말에 서문도가 웃었다. 아주 많이 웃긴 얘기를 듣기라도 한 듯이, 그래서 웃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웃고 나서 선우에게 물었다.
“뭐지. 이선우 씨가 서유라에게 최선이라는 뜻인가?”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갑질이었다.
대체 이 집에 들어와서 자를 거라는 말을 들은 게 몇 번이던가.
누군가에겐 생계일 수도 있는 일을, 정당하게 면접을 보고 들어와서 성실히 일을 하는 사람을, 이렇게 제멋대로 뗐다 붙였다 할 수는 없는 거였다.
하아. 문도가 가는 한숨을 쉬었다.
“이선우 씨가 단단히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내가 지금 서유라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이러는 걸까요? 응? 내가, 서유라를 잘 모시고 싶어서 여기에 두는 걸로 보여?”
남자의 눈동자에 서슬이 퍼렇게 섰다.
“지금 내가 서유라가 발광을 했다고 이선우 씨를 자르는 걸까? 뭔가 대단히 착각하나 본데, 이선우 씨 능력 없어요. 그래서 지금 잘리는 거라고.”
선우는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뭔가 멍해진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고?
“하지만, 이제까지 서유라 씨와 이렇게 오래 있었던 사람은 없었어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서유라 성질 참아 주고, 받아 주고, 오냐오냐해 주는 그거? 비위 맞추면서 별 잡스런 일 대신 해 주는 그거? 그게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동안의 노력들도 전부 그렇게 생각을 했었나.
선우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이 남자의 눈에는 자존심도 뭣도 없이 참아 내던 모습들이 무능력으로 보였을까.
문도는 그런 선우를 비웃으며 신랄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래. 날뛰는 서유라를 무슨 수로 제압하겠다고 혼자서 그 방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상황 판단이 안 되나? 머리가 안 돌아가? 이 집에 상주하는 경비 인력이 몇 명인데, 혼자 들어갔지? 죽겠다고 지랄을 떨고 있으면 사람부터 불렀어야지! 장 여사한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나?”
아니. 그렇게 무모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선우는 문도의 말에 반박을 했다.
“불렀어요. 옥수댁 아주머니께 본관에 전화해 달라고 하고서 들어갔습니다. 서유라 씨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들어갔고, 그런 일로 해고를 하시는 건…….”
“불렀으면 기다렸어야지! 뭘 잘한다고 거길 기어들어 가! 다치고 싶어서 환장했어? 왜 가만히 있지를 않아! 왜 자꾸!”
씨발. 문도는 욕설을 내뱉으며 말을 멈추었다.
누가 그딴 노력을 바랐다고. 길게 찢어진 팔의 상처를 보았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했다.
순간 뚝,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지.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는 말을 실감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결정적으로 해고를 결심한 사유였다.
치워 버려야겠다. 너는 매번 나를 그렇게 만들 테니, 눈에 안 보이게. 어지럽지 않게. 더는 등신처럼 굴지 않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도록.
이래서 길게 마주 보고 싶지 않았는데.
“저는…….”
선우는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멍했다.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여전히 일렁거리고 있는 불꽃만이 보일 뿐이다.
멍하게 서 있는 선우에게 문도는 싸늘하게 말했다.
“재고는 없습니다. 이만 내려가세요.”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선우는 그저 닫힌 방문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