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이제 그만
시선을 서유라에게 고정한 상태로 서문도가 걸어오고 있었다.
두 손은 팬츠 주머니에 넣고서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서문도의 슬리퍼 밑에서 유리 조각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뚝 멈춰 있는 서유라 때문인지, 난장판이 된 방 안은 일시 정지가 된 화면 같았다.
그 화면 안에서 서문도 전무 혼자만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할 때였다.
“죽어 버릴 거야! 다 죽여 버릴 거야! 최지상 불러와, 그 새끼 데려오라고!”
서문도의 등장에 얼어 있던 것도 잠시, 서유라가 다시 발작하듯 괴성을 질렀다.
“진정해요, 유라 씨. 이러지 말아요.”
발악하는 서유라의 힘은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셌다. 피를 뚝뚝 흘리며 허공으로 거울 조각을 휘두르는 서유라 때문에 선우의 몸도 함께 휘청거렸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느린 건가, 빠른 건가. 침착한 건가, 화가 난 건가. 걸어오는 모습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남자가 다가올수록 서유라의 발악도 세어진다는 걸 알 뿐이다.
“최지상 데려와! 확 죽어 버릴 거니까!”
“유라 씨, 그만해요. 이러다 진짜 다쳐요.”
선우가 서유라를 저지하려는 사이 서문도가 두 사람 앞에 멈추어 섰다.
발악을 하던 서유라도 막상 서문도가 눈앞에 서자 높이 든 팔을 휘두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죽어, 그럼.”
서문도가 서유라를 보면서 말했다.
맹수 앞에 서면 이런 기분이 들까.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선우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서유라를 보는 시선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이익, 하고 소리를 낸 서유라가 팔을 더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못 할 거 같아? 내가, 어?”
서유라는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거울 조각으로 눈앞의 남자를 그어 내릴 것만 같았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서유라를 말없이 응시했다. 허공에 들린 서유라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 말아요, 유라 씨. 네?”
선우는 서유라에게 간절히 말했다. 서유라가 서문도 앞에서 더 이상 발악을 하게 둘 수 없었다.
남자는 서유라를 병원으로 보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극을 해서는 안 된다.
일단 저 거울 조각을 뺏어야 하는데. 선우는 팔을 높이 뻗었다. 유리 조각에 손끝이 닿으려 했을 때였다.
“뭐 하는 짓인지.”
서문도가 말했다. 어이가 없는지 잠깐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서유라의 손목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대로 팔을 당기자 서유라의 몸이 쭉 끌려갔다. 너무 간단해서 허무할 지경이었다.
“놔, 이 새끼야.”
서유라가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몸부림은 남자의 악력 앞에서 무의미했다.
“놓으라고 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서유라의 손가락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으,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여전히 서유라의 손목은 서문도에게 잡혀 있었다.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내린 서유라의 피가 서문도의 손을 적셨지만 남자는 손목을 놓지 않았다.
아으, 서유라는 고통에 못 이긴 신음을 내며 항복하듯 말했다.
“아, 아파. 아파. 아프다고!”
아프다고 호소하는 서유라를 남자는 아무런 감정이 비치지 않는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허공에 들린 서유라의 손이 붉어지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해 갔다. 서유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는데도, 남자의 눈에는 일말의 감정이 없었다.
선우는 처음으로 남자가 무서웠다. 무감한 눈동자로 서유라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는 이대로 서유라의 손목을 바스러뜨릴 것만 같았다.
멈춰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정말 부러질지도 몰라. 겁이 덜컥 난 선우는 남자에게 말했다.
“놓아주세요.”
선우의 말에 서문도가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눈동자가 선우를 향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무감하다고 생각했던가. 감정이 없어서 무섭다고 생각을 했었나. 아니었다.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 뒤로 검은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이만 놓아주세요.”
눈빛에 압사를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선우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서 말했다.
남자가 가늘게 웃는 것 같았다. 손목을 더 힘주어 잡는 건지 서유라가 아악, 비명을 질렀다. 허옇게 얼굴이 질린 서유라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파하잖아요. 제발 놓아…….”
일순간 서문도가 서유라의 팔목을 팽개치듯이 놓았다.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던 서유라가 풀려나며 선우에게로 무너졌다.
선우는 비틀거리며 서유라의 몸을 안았다. 때마침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사님, 이쪽이에요. 아유 이걸 어째.”
“아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방이 이렇게…….”
옥수댁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던 장 여사가 헉 소리를 내며 멈췄다.
“전무님! 손에, 피가!”
“저는 괜찮고요.”
장 여사가 부랴부랴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내밀었다. 서문도는 무심하게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침착하다 못해 담담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장 여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 모두 본관으로 데려가세요. 간호사 선생님께 치료 맡기고, 필요하면 오 박사님께 부탁해서 의사 부르시고요.”
장 여사에게 다시 손수건을 건넨 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선우에게 말했다.
“이선우 씨는 치료받고 2층으로 올라오시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멍하니 바라만 볼 때 서문도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선우 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팔은 또 왜 다쳤고.”
장 여사가 방을 둘러보며 선우에게 말했다. 서유라가 어엉— 울음을 터트리며 선우에게 안겨 들었다.
언제 챙겨 왔는지 빗자루를 가져온 옥수댁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방을 쓸기 시작했다.
선우는 서유라의 등을 감싸며 장 여사를 바라보았다. 서문도가 머물렀던 몇 분 동안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손에서 축축하게 땀이 나고 있었다.
팔의 상처도 이제야 화끈화끈 아파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할 말이 너무나 많은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유라 씨 먼저 치료하고요.”
장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치 기운은 다 쓴 느낌이었지만 선우는 서유라의 손을 묶을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급한 대로 장 여사가 들고 있던 손수건을 받아 서유라의 손에 감았다. 깊게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고, 하얀 손목에는 선명한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프겠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서유라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선우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뭐라고 탓을 할 기운도 없었다.
“그 새끼가 바람을 폈잖아. 그렇다고 이렇게 세게 잡냐. 미친 새끼. 으흑, 나 손목 부러지는 줄 알았어.”
“가요. 가서 치료부터 받아요.”
선우는 절뚝이는 서유라를 부축했다. 밖은 어느새 어둠이었다.
* * *
사색이 된 박소영은 바로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선우는 장 여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최지상의 기사가 뜬 것부터 팔을 다치게 된 경위까지 모두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친 선우의 모습이 지쳐 보였는지, 장 여사는 잘 알겠으니 이만 치료를 받고 푹 쉬라는 말을 했다.
필요하면 내일 하루 휴가를 낼 수 있도록 서문도 전무에게 말을 해 주겠다고도 했지만 선우는 괜찮다고 답을 했다.
서유라는 찢어진 손바닥을 스무 바늘 넘게 꿰맸고, 선우의 팔은 깊이 베인 건 아니라 꿰맬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닦달을 해서 덩달아 꿰맸다.
발바닥 치료까지 마친 서유라는 본관에 남겨졌다. 엉망이 된 게스트룸 정리를 이유로 본관에서 자라고 했지만, 다시 한번 사고를 칠까 봐 감시를 겸해서 남겨 두는 것 같았다.
장 여사의 지시에 따라 본관에 빈방이 빠르게 준비가 되었고, 선우는 서유라를 본관에 두고 다시 별채로 돌아왔다.
“다친 데는 잘 치료했어?”
방을 치우고 나오던 옥수댁 아주머니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선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는 데는 다 치웠는데, 아무래도 내일 다 들어내고 한 번 더 꼼꼼히 치워야 할 것 같아. 침대 밑이며 화장대 안으로도 파편이 들어갔을 수도 있으니까.”
“저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어요.”
“에이, 선우 씨가 왜.”
“제가 빨리 대처를 했으면…….”
서유라가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쫓아가서 막았더라면. 통화가 안 된다고 날뛸 때 그러지 말라고 막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좀 덜 날뛰었을까. 자해를 안 했을까. 그러면 최소한 서문도 전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이고, 그걸 어떻게 대처를 해. 이런 일 전에도 있었어.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어여 올라가. 전무님 기다리실라. 나는 먼저 건너갈게.”
“네, 들어가세요.”
선우는 주방의 뒤쪽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는 옥수댁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았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된 계단이 오늘처럼 막막해 보인 적이 없었다.
마주치기 싫으니 늦게 와서 일찍 가라는 소리를 들은 게 얼마 전이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도 못마땅해하는 판에, 이런 일까지 생겨 버리니 마음이 심란했다. 서유라가 다친 게 전부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았다.
올라가서 다시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겠지. 화가 난 서문도 전무가 서유라를 병원에 보내겠다고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안 들게 앞으로 신경을 더 기울이겠다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딛다 보니 어느새 2층이었다. 선우는 활짝 열려 있는 2층의 중문을 바라보았다. 막상 들어가려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선우는 침을 한 번 삼킨 뒤 중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거실 TV 앞,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서문도가 보였다. 선우가 들어오는 모습을 빤히 보는 서문도의 손에는 아직도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선우는 천천히 서문도의 앞으로 걸었다. 말없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숨이 막혔다.
적당히 떨어진 자리에 선우는 멈춰 섰다.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눈빛에 하얗게 머리가 바래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먼저 경과보고를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뗐을 때였다.
“아까 일은…….”
“이제 그만 나가 주시죠.”
선우가 입을 떼는 동시에 서문도가 말했다. 선우는 멍한 눈으로 서문도를 바라보았다.
분명 두 귀로 들었지만, 환청인 듯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