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죽지 마
저녁 회의가 끝났다.
남은 건 분리수거를 해야 하는 플라스틱 도시락과 웅성웅성한 소음.
내일로 다가온 스위스 출장을 앞두고 서도 이노테크의 AI 연구소 김경민 단장과 마지막 체크를 하는 자리였다.
이노테크의 수석 연구원들과 김경민 단장이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고, 전략본부1팀의 막내 사원인 김창민 사원이 도시락과 물컵을 수거하고 있었다.
다들 물러가는 가운데, 송정태 팀장은 일어날 생각 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서문도 전무의 눈치를 살폈다.
서 전무는 한 손에 턱을 괴고서 회의실 탁자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뚜껑 닫힌 펜을 테이블 위로 쿡, 쿡 내리찍고 있었다. 얼핏 보면 회의 내용을 복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송 팀장은 알았다.
저건 회의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다. 풀리지 않는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면 서문도 전무는 요 며칠 계속 저런 상태였으니까.
회의 때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사람을 바짝 조였다가 웃기도 했다가 정색도 하면서 질문도 하고, 확인도 하고, 답을 들으며 메모도 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거침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가 잠깐의 빈틈이 생길 때면 저렇게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 퇴근을 해야 할 땐데…….
스위스 출장이 있는 내일은 하루 종일 이동을 해야 했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취리히까지 열다섯 시간을 이동한다. 공항에서의 대기 시간을 합하면 거의 만 하루를 이동에 쓰는 셈이다.
그러니 이만 퇴근해서 짐도 챙기고 쉬기도 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할 때였다. 툭, 하고 테이블 위로 펜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나지막한 욕설이 들려왔다.
“씨발, 진짜…….”
서문도 전무가 눈을 꾹 감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뜨더니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거지 같네.”
그러고는 헛웃음을 웃는다. 뭔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삽시간에 발밑으로 살얼음이 깔린 것 같다.
뭐가 틀어졌지? 태정 모비스 일인가? 출장 일정이 비틀어졌나? 아님 회장가에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지만 송정태는 조용히 숨만 쉬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무사히 이 회의실을 나가고 싶었다.
“송 팀장님.”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문도는 송 팀장을 불렀다.
“네.”
“간 김에 유럽 법인 좀 돌고 올까요? 한 보름 정도만.”
“네? 아니, 네? 왜, 왜요?”
송정태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휴트론과의 미팅 일정만 해도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그뿐인가. 취리히 공과대학의 교수들과 컨퍼런스 자리도 있고, 현지 법인에서 잡아 놓은 스타트업 업체들 방문 일정도 있었다.
가는 데 하루, 오는 데 하루. 중간에 닷새. 일주일도 힘든데 보름을 더 머물자고? 갑자기?
“아, 그, 다녀오셔서 태정 모비스랑 GK 모빌리티 업무 협약 건 준비하셔야 합니다. 합작 법인 건으로 중국도 다녀오셔야 하고.”
더듬더듬 말을 잇는 송 팀장을 보다가 문도는 한숨을 쉬며 실소했다.
안다. 대학생 자유 여행도 아니고 일정 조정이 마음대로 될 리 없다는 건 잘 안다. 보름치 일정을 뺄 수도 없거니와 빼서도 안 되는 것도 잘 알고.
“압니다. 그냥 해 보는 소리예요.”
답답해서 그랬다. 명치를 누가 커다란 쇳덩이로 막아 놓은 것 같았다. 숨을 깊이 쉬어도 소용이 없었다.
화병도 아니고 체증도 아닌 이상한 증상으로 컨디션도 엉망이고 집중력도 바닥이었다.
그런 이유로 하루에도 몇 번씩 이선우를 잘라 버리는 상상을 한다. 마주치지 않는 정도로 해결이 안 된다면 아예 치워 버려야지. 그래야 맞지.
셈으로는 그게 맞았다.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심란하기만 한 여자, 다시는 만날 일 없게 만들어 버리고 일에 집중하는 게 맞다.
이선우에게는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해 주면 되고, 서유라는 제멋대로 살라고 내보내면 된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될 게 분명한데.
그 간단한 일을 미루는 이유는.
문도는 생각을 접어 버리듯이 회의용 자료들을 덮었다. 깊이 기대앉았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송 팀장에게 말했다.
“내일 공항에서 뵙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출입문으로 향하는 문도에게 송 팀장도 내일 뵙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파일의 끝으로 툭,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서문도에게서 옅은 피로가 느껴졌다.
무슨 일일까.
잠깐 궁금했지만 이내 호기심을 떨쳐 내고 송정태는 걸음을 옮겼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 밤이었다.
* * *
“받으라고! 미친 새끼, 안 받지? 어, 그래 안 받아! 아아아악!”
괴성에 가까운 서유라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선우는 옥수댁 아주머니와 난감한 시선을 교환했다.
“유라 씨 괜찮을까요?”
선우는 작게 옥수댁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오늘까지 서유라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았지만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건 처음이었다.
“안 괜찮을 거 같아.”
옥수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선우보다 오래 이 집에서 일을 해서인지 전에도 이런 서유라의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방금 전까지 기분만 좋더니 갑자기 왜 저러실까.”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의 옥수댁 아주머니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옥수댁 아주머니에게 말을 해 줄 수는 없었지만 선우는 그 이유를 알았다. 서유라를 저렇게 만든 건 한 줄의 기사 제목이었다.
최지상이 보고 싶다며 핸드폰으로 최지상의 이름을 검색한 서유라가 응? 하고서 느슨했던 자세를 바로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뭐지, 이게? 뭐야 이거?’
풀려 있던 눈매가 사납게 변하며 손놀림이 빨라졌다. 심상치 않은 얼굴이라 선우도 식탁에 놓여 있던 서유라의 태블릿 패드로 최지상의 이름을 검색했다.
제일 윗줄에 한 줄짜리 기사 제목이 보였고, 그 아래로 언론사만 다를 뿐 전부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있었다.
‘떠오르는 신예 배우 최지상, 연은지와 심야 데이트’
연은지는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다. 클릭을 했더니 어두컴컴한 사진 속에 커다란 차 한 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래로 이어지는 사진에서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쓴 최지상이 내렸고, 그다음 사진에서 연은지가 모자를 꾹 눌러쓰고 내렸다.
‘드라마 ‘바람소리’를 촬영 중인 최지상과 연은지가 열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디어 파파라치는 어젯밤, 촬영을 마친 최지상과 연은지가 촬영장 인근의 펜션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포착.’
기사의 내용을 다 읽어 내리기도 전에 서유라는 발작하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시지를 잔뜩 보내 놓은 화면이 얼핏 보였다.
‘와, 이 씨발 새끼 너 오늘 뒤졌어.’
최지상이 확인을 하지 않자, 강박적으로 버튼을 누르며 제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저렇게 히스테릭한 괴성을 지르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옥수댁 아주머니와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통화를 하는 듯한 서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어디냐고! 이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바람을 피네? 와, 너 내가 살려 준 거 잊었어? 야, 니 핸드폰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지 모르냐고! 너 진짜 대가리에 총 맞았구나? 니가 그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이어서 퍽,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해명 같은 소리 하네? 너 지금 딱 기다려. 연은지 그년 내가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 지금 너 내 앞에서 연은지 그년 감싸는 거야? 그런 거냐고! 너 정신 나갔구나? 너 내가 말만 바꾸면 넌 뒤지는 거 알지? 어디 한번 연예계 생활 끝장내 줘?”
퍽, 하고 무언가가 계속해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옥수댁 아주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선우를 보았다.
“아유, 이걸 어째. 장 여사님을 불러야 하나. 이걸 어쩔까!”
들려오는 서유라의 목소리에 아슬아슬한 내용들이 있었다.
날뛰는 서유라의 모습이 겁난다기보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일에 대한 내용을 듣고 싶었다. 선우는 옥수댁에게 말했다.
“우선 제가 들어가 볼게요. 여기 계세요.”
“아유, 안 돼. 저러다 자해하고 막 그래. 지난번에도 죽겠다고 난리였어. 장 여사한테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가서 상황 파악해 보구요. 위험해 보이면 바로 나와서 알려 드릴게요.”
선우는 괜찮다고 옥수댁 아주머니를 안심시키며 게스트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유라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밑에서 빌어먹던 호스트 새끼가 바람을 펴? 서우철? 썅, 그걸 누가 믿냐고!”
선우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갖은 물건들이 다 널브러진 방이 보였다. 서유라의 목소리가 들리고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최지상의 목소리도 들렸다.
“뭐? 마음대로 해?”
— 누나 진짜 왜 이래요. 아니라고 하잖아. 아, 이제 나도 지쳤어. 믿든지 말든지 누나 맘대로 하고, 계속 이런 식이면 나 누나 안 볼 거니까! 진짜 사람 말을 왜 그렇게 못 믿어!
“이, 이 미친 새끼가!”
서유라가 끊어진 전화를 다시 눌렀다. 최지상이 여러 번에 걸쳐 받지 않자 서유라는 그대로 힘껏 화장대를 향해 핸드폰을 던졌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대 거울이 날카롭게 깨졌다.
“아아아아아악!”
서유라가 몸을 쥐어짜며 소리를 지르더니 손에 집히는 대로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화장대 위의 컵이 박살 나고 노트북이 두 동강 났다.
“아주머니, 본관에 전화 좀 걸어 주세요!”
선우는 뒤를 돌아 옥수댁 아주머니에게 말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유라 씨, 진정해요.”
쨍그랑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힌 화장품이 깨지고, 라이터가 날아들었다.
담배가 들어 있던 소주병이 빠르게 공중을 날아 선우의 옆을 스치며 벽에 부딪혔다. 초록색 파편들이 날카롭게 퍼지면서 담뱃재가 섞인 소주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정은 무슨 진정, 나 오늘 그년 놈들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아니다, 내가 죽어 버리면 되겠네! 아 그래, 그러면 되지!”
서유라의 눈은 희번덕거리고 있었고 바닥을 밟은 발에선 피가 나고 있었다.
화장대로 휘청이며 다가간 서유라는 맨손으로 깨진 거울의 조각을 집어 들고 위로 높이 들었다. 마치 그대로 자신을 그을 것만 같은 동작이었다.
“유라 씨, 안 돼요. 그건 안 돼!”
선우는 유라에게 다가갔다. 슬리퍼 밑으로 유리 조각들이 박히는 느낌이 났지만 피해 갈 겨를도 없었다. 히스테릭하게 웃는 서유라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손목을 그어 버릴 것 같았다.
“안 돼요!”
유라가 손목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선우는 유라의 등을 안았다.
몸부림치는 서유라를 막는데 팔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치는 느낌이 났다. 마구잡이로 소리를 지르던 서유라가 괴력으로 선우를 떨쳐 냈다.
쿵, 하고 벽에 부딪히자 등으로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벽을 짚어 휘청이는 몸을 세우려는데 팔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길게 베인 상처가 화끈거리며 아파 왔지만 선우는 기를 쓰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지 말아요!”
죽지 마. 당신은 이렇게 죽어서는 안 돼. 다쳐서도 안 돼. 내 남은 희망을 이런 식으로 깨트리지 마.
다시 한번 서유라를 끌어안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짐승 같던 서유라가 흠칫 몸을 굳혔다.
두 손을 팬츠 주머니에 찔러 넣은 서문도가 표정 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