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딜리트 키(Delete key)
자신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7시에 맞춰 건너오겠지, 라는 예상은 6시 반에 깨졌다. 이선우는 그 이른 시간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무님. 아주머니도 일찍 건너오셨네요.”
차분히 그에게 인사를 건넨 뒤, 이선우는 식사를 차려 주는 조리사 아주머니에게도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차이점이라면 그에게는 예의 바르지만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했고, 조리사 아주머니에게는 예쁘게 미소를 짓는다, 정도.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 이선우는 조리사 아주머니를 돕거나 거실에 앉아서 책을 보았다.
그동안 의식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선우는 일하는 직원들과 꽤나 사이가 좋은 듯했다.
“선우 씨, 통 좀 들어 줄 수 있을까?”
“선우 씨, 나 깜빡하고 디저트를 안 가져왔는데. 숙소동에 잠깐 다녀와 줄 수 있어?”
“선우 씨, 이따 점심에 묵밥 차갑게 할 건데, 괜찮아?”
조리사 아주머니도 장 여사도 이선우에게 간단한 일들을 자주 부탁했다.
그때마다 이선우는 선선히 웃으면서 네, 라고 대답을 했다. 사근사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같이 반찬통을 나르며 이야기를 하다가 웃기도 했다.
슬쩍슬쩍 일을 시킬 때마다 부려 먹을 사람이 없어서 서유라 전용으로 고용한 사람을 부려 먹느냐는 말이 목 끝을 스쳤지만, 문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 여사를, 조리사 아주머니를 따르는 이선우의 얼굴에 불만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어느 날은 이선우가 먼저 도와 드리겠다며 나서기도 했다. 본인 일이나 잘할 것이지.
아니지. 본인 일은 너무 잘하지.
메일로 보내오는 보고서에 의하면, 서유라의 식단을 따로 챙기고 있단다. 바디 프로필인지 뭔지를 찍기 위해 운동 시간을 늘렸고, 야식과 술은 줄이기로 했다고.
그래서인지 밤늦은 시간에도 별채의 불이 밝은 날이 많았다.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이끌고 2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서유라의 목소리가 2층의 홀까지 크게 울렸다.
“야, 이거는 아니지. 나 아까부터 매운 떡볶이 먹고 싶었다고. 점심에 잘 참았잖아. 글고 맥주는 술이 아니야. 음료야.”
이선우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서유라가 아아아앙, 하고 애교를 부리거나 몰라 몰라 뻗대는 소리를 내는 것만 중간중간 들려왔다.
“아니이, 니가 왜 내 폐를 걱정하냐구. 나 풍선 엄청 잘 불거든? 야, 담배 몇 대 더 핀다고 오래 살 거 같으면 난 빨리 죽고 담배 필 거야. 아니, 서문도 그 새끼도 피잖아. 근데 왜 나만!”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서유라가 아오,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어서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렸다.
하루는 일부러 주방의 뒷문을 열고 들어간 날이 있었다. 회식이 있어서 술을 조금 마셨던 날이었다.
주차장에서 2층으로 바로 올라가려다 일부러 본관을 들렀다.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보고를 하고서 느리게 별채를 향해 걸었다.
별채를 밝히고 있는 불빛이 유난히 환하다고 생각을 하며 뒷문을 열었을 때, 이선우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는데 서유라의 코 먹은 소리가 들렸다.
“뭐야, 누구 왔엉?”
“아, 네. 전무님 들어오셨어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한 뒤, 이선우는 이내 서유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유라 씨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저 아직 칼 들고 있어요.”
“어우, 알았어. 눈썹 날아가면 안 되지. 나 얌전히 있을게.”
저벅저벅 걸어서 주방으로 들어가도 둘은 소곤소곤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였다.
“팩은 뭘로 해 드릴까요?”
“그거 좋더라. 쌀겨 그거. 얼굴 좀 환해지는 거 같어.”
“네. 마무리하고 나서 준비할게요. 눈썹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응. 예쁘게 잘됐네. 나 잠깐 방에 갔다 올게. 팩 준비해.”
서유라 같은 인간에게 뭘 그리 친절할까 싶을 정도로 이선우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언젠가 저와 비슷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전무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고 물었을 때.
주절주절 하루를 어찌 보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멈추자 반짝이는 눈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지.
시답지 않은 기억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어 떨쳐 내는데, 이선우가 주방으로 걸어왔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아일랜드 위에 놓여 있던 가루와 작은 그릇 같은 것을 들더니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거실을 향해 서 있는 그의 뒤에 이선우가 등을 돌리고 섰다.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신경이 올올이 일어서 전부 등 뒤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 한번 엿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도는 허리를 세웠다.
냉장고에 붙은 디스펜서에서 조르륵 물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릇에 물을 받고, 숟가락으로 가루를 개고, 다시 조금 더 받는 동작들이 보이지 않는데도 눈에 선명히 그려져서 문도는 속으로 욕을 씹었다.
이게 뭐라고 숨이 막히나.
짜증이 치밀어 올라 일부러 크게 걸음을 옮겼다. 씨팔, 욕을 중얼거리자 이선우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 미세한 반응도 반응이라고 눈에 쏙 들어오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뭐 하셨어요?”
등을 돌려서 2층을 향해 걷는데,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부터 돌아갔다.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선우의 눈동자는 방에서 나오는 서유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미친놈. 왜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어? 아니, 난 그냥.”
다시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제 방에서 나오던 서유라가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선우가 뭘 어떻게 하는지 서유라가 당황한 소리를 낸다.
“야. 야. 아니, 왜. 아니, 야.”
“담배 피우셨어요?”
“아니, 나느은……. 아 씨, 진짜. 그래. 피웠다. 어쩔래? 담배 피우는 게 죄야? 어? 내가, 내 맘대로 그 정도도 못 해?”
“며칠 동안 금연하시겠다면서, 왜 자꾸 피우세요. 담배 피면 말려 달라면서요.”
“아, 몰라, 안 해. 야 그리고 니가 무슨 상관이야. 니가 울 엄마야 뭐야. 어디서 트레이너 주제에 잔소리질이야.”
저게 지금 얻다 대고 성질이야.
계단을 오르다가 서유라 말하는 싸가지에 슬슬 성질이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이선우가 서유라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했다.
“기분 많이 상하셨어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거든?”
팩하고 돌아서는 서유라를 이선우가 붙잡았다.
“걱정이 돼서 그렇죠. 사진도 잘 나왔으면 좋겠고요. 지금 너무 잘 하고 계신데 잔소리 자꾸 해서 죄송해요.”
“야, 니가 진짜 몰라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참는 줄 알아? 에이 씨, 바디 프로필인가 먼가 그딴 건 왜 한다고 해서는. 아오, 씨벌.”
그러고 보니 보고로 받은 메일에서 서유라가 사진을 찍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었지. 그것 때문에 저 난리를 치고 있나 보다.
이선우는 성질을 내는 서유라를 오냐오냐 받아 주더니 솜씨도 좋게 소파에 눕혔다. 머리맡에 앉아 팩을 발라 주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담배는 아주 조금만 줄이셨으면 좋겠어요. 건강을 위해서.”
“알아썽. 내가 한번 노력은 해 볼게.”
“온도는 괜찮으세요? 너무 차갑진 않으세요?”
“응. 딱 좋아. 이거 바르고 나 패드로 유튜브 좀 틀어 줘. 야, 너 그거 봤냐? 개그맨들 성대모사 하는 거? 디게 웃기드라. 내가 함 보여 줄게. 진짜 웃겨.”
다정히 지내는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 아니, 서유라 같은 인간에게 뭘 저렇게 잘해 주는 건데? 둘이 사이좋다고 유세라도 하는 건가? 나한테는 저런 적 없었잖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게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이선우는 서유라만 보는데, 자신은 그런 이선우에게서 시선을 못 떼고 있다는 자각이 들자 그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문도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멀어지는 서유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난간 가까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조심스레 서유라의 얼굴에 무언가를 펴 바르는 이선우와 누워서 입만 조잘거리는 서유라가 보였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니 10시를 훌쩍 넘긴 10시 반이었다. 퇴근 시간도 지났는데 언제까지 저러고들 있을 건가.
중문을 닫고 들어왔는데도 아래층이 신경에 거슬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신경 쓰이는 거지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씹. 뭐가 이따윈지.
시계를 풀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선우는 태평한데, 저렇게 제 할 일 야무지게 다 하고 있는데, 혼자서 이랬다저랬다 비 맞은 중마냥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이 웃겼다.
고작 일주일인데 집에 와도 온 것 같지 않고,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기분은 또 어떻고.
잠은 얕아지고, 신경은 얄팍해지고, 피로는 쌓여만 갔다. 정말이지 엿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돌아가면 힘들어서라도 쓰러져 잠이 들겠지 싶었던 밤. 새벽 늦게 들어가 기진맥진한 몸을 침대에 누였을 때.
‘안아 주세요.’
이선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욕을 하면서 눈을 감았더니 얼굴도 보였다.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이었다.
그의 입으로 손으로 데워 놓은 몸을 파르르 떨면서 이선우가 그를 보았다.
곤란해하는, 수줍어하는, 어색함을 다 떨치지 못한 그런 얼굴로 낯을 붉힌다. 낯을 붉히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선우는 그랬다.
물이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로 그를 깊이 들여다본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단단하게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사라지지 않는 환영에 기가 막혀 웃음을 웃으면서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눈을 덮고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이선우를 안아 들고, 다리를 벌리고, 몸을 묻는 상상을 하며.
감긴 눈꺼풀 안에서 이선우는 허리를 휘었고 신음을 냈다. 속도를 높이자 고개를 저으며 그를 불렀다.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그에게 매달려 온다. 아아, 가느다란 소리가 자꾸만 높아지려는 그때.
문도는 참지 못하고 브리프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단단하게 일어선 자신의 분신을 쥐어 두세 번을 흔들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씨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마지막 부탁이고 지랄이고 그냥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허탈하게 천장을 보고 있을 때였다.
딩동.
알람음과 함께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메일이었다.
발신인은 이선우. 제목은 ‘서유라 님 일과보고서’. 타이밍 한번 기막히게 도착한 메일이다.
신경을 끄고 싶은데, 왜 자꾸 알짱거리나.
누워 있던 그대로 핸드폰을 들었다. 아침에 어쩌구 점심에 어쩌구 저녁에 어쩌구 하는 내용을 눈으로 훑는데 한 글자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이선우가 또박또박 보고서를 쓰는 동안 팬티 안에 손이나 처넣고 있었다는 자괴감만 들 뿐.
문도는 신경질적으로 메일을 삭제했다. 가능하다면 이선우라는 존재 자체에 대고 딜리트 키(Delete key)를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