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조금 더 지켜보려고요
본관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박소영의 부축을 받으며 회장이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무……문도, 구……굿모, 닝.”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은 서 회장이 말했다. 비록 박소영의 부축을 받아 가며 흔들흔들 걷고 있긴 하지만 휠체어 없이 두 발로 서 있는 회장은 오랜만이었다.
“회장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나 봐요.”
“으응, 굿뜨. 베리 굿뜨.”
아닌 게 아니라 처음 집으로 왔을 때 비하면 생기가 흘렀다.
마른 가죽 같았던 얼굴에 살이 올랐고, 회색에 가까웠던 안색도 뽀얗게 폈다. 붕어즙과 장어탕의 효능일까.
“기력 좋아지신 걸 보니까 마음이 좋네요. 작은할머님도 고생하셨어요.”
나란히 걸으며 말을 건네자 박소영이 호호 웃었다. 다이닝룸 쪽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에 회장이 킁킁 코를 벌름거렸다.
“부, 불고기 냄새가, 아주 좋아. 부, 불고기는 놋쇠에 유, 육수를 부어서 머, 먹어야지 디, 딜리셔쓰.”
식탐 가득한 눈동자로 회장이 말했다. 오로지 불고기 생각밖에 없는지 홀린 듯이 다이닝룸을 향해 걷는다.
“파, 파채를 드, 듬뿍 오, 올리라고 했는데.”
금방이라도 침을 흘릴 것처럼 입을 헤 벌리고선 회장이 말했다. 괜히 문도의 눈치를 보면서 박소영이 말했다.
“아유, 회장님이 요즘 입맛이 도시나 봐. 끼니마다 고기를 찾으시는데 잡숫기도 얼마나 잘 잡수시는지. 이게 다 건강이 좋아지신다는 증거 아니겠어?”
느린 걸음에 맞추어 도착한 다이닝룸에는 달큰한 불고기 냄새가 가득이었다.
휴대용 인덕션 위에 무쇠로 만든 불고기판이 올라가 있고, 아직 색이 붉은 고기가 푸릇한 파채를 머리에 얹고서 그 위에 얹어져 있었다.
“호오…….”
장 여사가 주전자를 들고 와서 육수를 붓자 회장이 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이거, 이거야, 이거. 말을 하면서 벙긋벙긋 웃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쥐고선 흔들림 없이 불고기판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나오셨어요?”
출근 준비를 마친 우현희도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박소영과 장 여사에게도 눈으로 인사를 한 뒤에 문도에게 말했다.
“할 얘기도 있으니 아침은 간단하게 2층에서 먹을까.”
그 말에 문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서 회장이 더듬더듬 말했다.
“노, 노린자…….”
“노린자요?”
박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응. 노린자…….”
회장의 말에 우현희가 장 여사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 노른자 생으로 가져다 드리세요. 불고기 찍어 드시려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회장의 눈동자가 번질거렸다. 탐욕과 집착이 가득한 눈이었다. 살아나고자 하는 발버둥 같기도 했다. 이러다 진짜 불로장생하는 건 아닌지.
“식사 맛있게 하세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문도는 고개를 숙여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 회장의 얇은 입술에서 침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서도 개발 지분도 정리 중이라고?”
“네.”
우현희가 쓰는 서재에 마주 앉았다. 장 여사가 미리 세팅을 해 놓았는지 테이블 위에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서용호 중심의 건설과 중공업, 서중호 중심의 화학과 금융으로 그룹이 양분되다시피 한 지금, 서용호 일가는 중공업과 건설 쪽의 지주회사 격인 서도 산업 개발의 지분까지도 건드리는 중이었다.
“이번 투자에 올인 하려는 모양이에요.”
지난번 타임 레코드 공매도 건으로 제법 돈을 번 서용호 일가가 과감해졌다.
“‘스타라이트’에서 웹툰 제작사도 인수한다며.”
“네. 조만간 계약서 쓴다고 하더라고요.”
스타라이트는 서창도가 인수한 OTT 서비스 플랫폼이었다. 서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업에 도전하겠다고 거창하게 인터뷰까지 했었지. 네오를 통해 번 돈을 들고 공격적인 인수에 나서고 있었다.
단순한 컨텐츠 유통에서 벗어나 종합 제작사로 성장을 하겠다며 드라마 제작사, 연예 기획사까지 손을 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만한 결과물 없이 돈만 꼬라박고 있는 수준이었다.
“예전부터 그렇게 방송국을 좋아하더니.”
우현희가 커피잔을 들면서 말했다.
서용호의 방송가 사랑은 재계에서도 유명했다. 혼전 임신을 앞세워 강행했던 아나운서 고은주와의 결혼도 그랬고, 각종 방송 예술 쪽 행사에 후원자와 투자자로 얼굴 들이미는 것으로도 그랬다.
서용호 일가가 헤지펀드까지 인수해서 거액의 투자금을 넣기 시작한 게 올해 초.
그러니까 회장이 쓰러지고 나서부터 서용호 일가는 이쪽 창고에서 저쪽 창고로 부지런히 도토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승계 구도에서 밀릴 게 뻔해지니, 그 잘난 장남 자존심에 아예 서도를 끊어 내고 문화 엔터 사업으로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적성 찾아가는 거죠, 뭐.”
문도의 말에 우현희가 웃었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먹고 커피잔을 들면서 문도에게 물었다.
“막내 아가씨는 언제까지 별채에 둘 생각이니?”
한 번쯤 짚어 볼 때가 되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처음 데려온 게 3월이었나. 2월이었나.”
“2월 말 정도 될 거예요.”
아직 봄도 아니었을 때 별채로 끌고 들어왔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정말 한 마리 짐승 같았는데.
“회장님 건강 좋아지시면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네가 보기엔 어때?”
오래 데리고 있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겨울에 데려왔는데 여름이 되었으니 생각보다 오래되긴 했다.
이렇게 길게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게 다…….
생각은 너무 쉽게 이선우를 향해 뻗어 간다.
물에 흠뻑 젖었던 면접 날의 이선우. 화장실에 갇혔던 이선우. 그렇게 버텨 내는 바람에 서유라를 병원에 보내 버릴 기회를 날리게 만든 이선우.
그 당시 장 여사에게서 들려오는 이선우에 대한 이야기는 처참했었다. 주스를 뒤집어쓰고, 뒤섞여 곤죽이 된 음식물을 먹고, 옷과 신발이 찢기고.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다. 그 인내심 한번 대단하다고.
대체 돈이 얼마나 절박하기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견뎌 내나, 어쩌다 이선우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만.
문도는 필름처럼 이어지는 이선우에 대한 생각을 끊어 내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아직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요. 그런데 서유라 이야기는 왜 갑자기 하세요?”
“요즘 잠잠하다 싶어서.”
우현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라고 했더라, 그 트레이너.”
생전 궁금해하지도 않으시더니 하필 오늘 같은 날. 문도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이선우 씨요.”
“그래. 선우 씨. 장 여사님이 한 번씩 말하는데 이름을 자꾸 잊어버리네.”
장 여사는 여기에서도 이선우 이야기를 했나. 무슨 말을 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지만.
“선우 씨가 생각보다 잘 돌보고 있다며. 그 트레이너 아가씨 덕분인지, 막내 아가씨가 정신을 차리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잘 지내는 것 같으니, 슬슬 거취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제 그만 내보내자는 이야기였다.
문도는 눈앞에 놓인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서유라를 내보낸다는 건 이선우도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서유라 씨 트레이너는 계속하고 싶어요. 부탁드립니다.’
머그잔 위로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깊이 숙였던 머리도, 떨렸던 목소리도 생생했다.
문도는 진하게 내린 검은색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서유라 엉망이에요.”
“응?”
“잘 지내 보이는 건 트레이너 덕분이고, 내보내기엔 아직 일러요. 고삐 풀면 바로 사고 칠 겁니다.”
“그 정도니?”
우현희의 눈동자가 문도에게 향했다.
서유라는…….
어머니의 말이 맞다. 회장은 건강을 회복하고 있고, 승계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서용호 일가의 자금을 묶어 두는 일도 몇 겹으로 차근차근 준비해 두었다.
회장에게 보여 주기 위한 형식적인 돌봄은 다했으니 사실 이제는 내보낼 때였다. 이선우와 얽혀 뒹구는 일만 없었으면 진작 내보냈을지도.
밖으로 나가 사고를 친다고 해도 이제는 회장의 건강과 크게 상관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완전하게 내쳐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여자의 마지막 부탁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계속 일해도 좋다고 했던 건 자신이었다. 하루 만에 그 말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문도는 담담히 말했다.
“병원으로 보내기엔 상태가 좋고, 내보내기엔 아직 위험한 정도. 조금 더 지켜보려고요.”
머리까지 숙여 가며 부탁을 했던 여자의 등을 떠미는 짓은 아직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달, 혹은 두 달. 길게는 말고 그 정도만이라도.
“때가 됐다 싶으면 말씀드릴게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슈트의 재킷을 들었다.
* * *
그 시간 선우는 별채의 2층에 있었다. 여러 날을 별채에 드나들면서 알게 된 사소한 틈들이 있었다.
서문도 전무가 본관으로 건너가서 식사를 하는 날의 아침 시간. 조리사 아주머니가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되는 날.
옥수댁 아주머니가 출근을 하기 전, 새벽과 아침 사이의 시간. 그때가 그런 빈틈 같은 시간 중의 하나였다.
들키면 어떡하지.
숨죽여 계단을 오를 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선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여전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들키면 뭐라도 변명을 하면 되겠지.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되겠지. 정 안 되면 서문도 전무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 올라왔다고 해도 되고.
의심스러워한다면 그때는 서문도 전무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의심을 한다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릴 각오도 하고 있었다.
서 전무에게 미련이 남아서 2층까지 올라오는 그런 여자가 되면 되는 일 아닌가.
최악의 경우에는 해고일 텐데, 그냥 잘리나 뭐라도 찾아보고 잘리나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단연코 후자였으니.
중문을 연 선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소리 없이 몸을 돌려 넓은 드레스룸 앞에 섰다.
마스터룸과 그 안쪽의 욕실은 대충이나마 거의 다 보았고, 욕실 안쪽의 드레스룸까지 들어가는 너무 위험했다.
딱 30분만.
스스로 정해 놓은 규칙을 되뇌면서 선우는 진열장 아랫단의 서랍을 당겼다. 색색의 타이들을 눈으로 훑고 다음 서랍을 열었다.
째깍째깍.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