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52화 (52/168)

52. 끝을 내고 싶어서

내게 무엇이 그리도 절실한지, 당신은 모르겠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차를 들고 올라왔는지. 첫 밤을 보냈던 날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스스로를 부숴 가면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당신은 모르니까.

선우는 눈을 감아 고이려는 눈물을 참았다. 아프게 침을 넘긴 뒤 천천히 눈을 다시 떴다.

“그럼……. 적어도 이유를 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리 잠깐 스치듯이 관계를 맺었던 여자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예고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잘라 내면서 설명도 없는 건 너무하잖아.

“이유.”

짧게 말을 한 남자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선우를 보고 있었다. 빤히 바라만 볼 뿐,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유라.”

한 번 더 말을 한 서문도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무언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입매를 비튼 뒤에 선우에게 말했다.

“끝을 내고 싶어서?”

말꼬리를 올리며 서문도가 말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이제 내가 제정신을 차린 거라고 생각하세요. 처음부터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건 이선우 씨가 제일 잘 알 테고.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고개를 기울여 묻는 서문도의 눈빛이 서늘했다. 닫힌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천천히 정신이 든다.

제발 다시 받아 달라고 구걸을 하려고 올라온 자리였다.

시계 같은 거, 카드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속물적으로 굴지 않을 테니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겠냐고 매달리려고 왔었다.

우습게도 아직 자존심이 남았나 보다.

발밑에 엎드려 받아 달라고 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나를 그 방 그 침대에서 안아 달라며 옷이라도 벗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소용없을 것 같았다.

엎드려 빌어도, 구차하게 매달려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소용없을 짓을 꾸역꾸역해서 남자의 경멸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한심한 이선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을 했으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 한심했다.

막연히 어느 날이려니, 지금은 아니려니 안일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바보 같다.

찰나에 타올랐던 남자의 욕망에, 그 덧없는 열기에 마음을 기댔던 것도 한심했다.

적당히 베푼 친절에 외로움을 녹였나. 야트막한 다정에 마음을 내어 주었나.

그러니까 묻고 싶은 거겠지.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냐고.

어떤 것도 물을 수 없는 관계인 주제에 마치 무엇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묻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한마디도 뱉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므로.

남자의 눈에 이선우는 그저 돈 몇 푼 벌기 위해 서유라의 곁에서 비굴하게 버티고 있는, 그러다 재벌 3세를 물어 보려고 제 몸을 던진 여자일 뿐이니까.

“늦었습니다. 이만 내려가요.”

서문도가 말했다.

이제 더는 너에게 흥미가 없다. 잠깐의 불장난은 여기가 끝이다. 그러니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그만 내려가라.

그게 이 남자의 결론이라면. 이 자리가 남자와 여자로서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자리라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선우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기로 했다. 서유라의 트레이너에서 물러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면 그때는 정말 절망이었으므로.

서문도가 눈을 찌푸렸다. 할 말이 뭐가 더 있냐는 표정이었다.

“서유라 씨 트레이너는 계속하고 싶어요.”

그 자리에서까지 잘릴 수는 없었다. 미련스럽게 다시 시작하자고 매달리다가 내쳐지느니, 그거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래야 아주 작은 기회라도 다시 얻을 수 있을 테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전무님이 불편해하시는 일 없도록 할게요.”

선우는 머리를 조아렸다. 비참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다. 이를 꾹 물어서 참았다. 얼마든지 비굴할 수 있어. 끝이 아니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리를 조아린 채로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나는 아직 찾아야 하는 게 있어.

“그래요. 일은 계속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정리를 합시다.”

네, 하고 선우는 대답을 했다. 고개를 들 수는 없었다. 울고도 싶고 웃고도 싶은 무너지는 마음이 고스란히 보일 것만 같아서.

남자가 돌아설 때까지 선우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 * *

창가의 윈도우 벤치에 앉으면 후원을 지나는 여자가 보였다.

한 번쯤 뒤를 돌아 별채를 볼 만도 한데, 여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한 번씩 손으로 눈물을 밀어내면서 걷는다.

마치 진짜 사랑이라도 한 것처럼.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상처 입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뺨 위로 흘러내리던 투명한 눈물이 상상되는 순간 문도는 욕을 씹었다.

왜 이렇게 몹쓸 짓을 한 기분이 드는지.

명 실장이 뭐라고 그랬더라. 현명한 판단이라고 했던가. 잘 생각하셨다고 했던가.

서유라의 새 트레이너를 알아보는 일을 보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 명 실장이 답을 보내왔었다.

그래. 생각이 난다. 주제넘은 의견이지만 이선우 씨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었다.

특별한 이슈가 없으면 이대로 고용을 유지하는 게 어떠실지요, 라고 했었고.

여러 번에 걸쳐 사람을 구해 왔으니 누구보다 잘 알겠지. 이선우 이전의 여섯 명의 트레이너들이 잘해 보겠다며 들어왔다가 며칠 안에 떨어져 나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명 실장이었다.

특별한 이슈가 없으면.

문도는 눈으로 여자를 좇았다.

여자는 이제 숙소동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손으로 뺨을 훔치며 눈물을 지우고 있었다. 심호흡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 서 있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어때.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즐기려고 시작한 관계잖아. 전화를 해. 올라오라고. 실컷 안아. 울릴 필요 없잖아. 너랑 자고 싶다고 제 발로 올라온 여자야.

뭐가 어때.

그러다 보면 질리겠지. 저 여자도 그걸 원한다잖아. 그때까지 놀아난다 한들, 그게 뭐 어때서.

나중에 학원이라도 하나 차려 주면 되잖아. 질려 버리면 돈 좀 주고 잘라 내면 되잖아. 일도 계속하게 하고 잠도 계속 자도 되는 거 아니야? 너 하고 싶었던 대로 해도 되는데, 뭘 망설여.

미친 새끼.

문도는 고개를 젖히며 가늘게 웃었다.

이게 바로 그 특별한 이슈였다. 더 가면 안 된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번쩍거리고 있는데, 못 본 척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을 모른 척 넘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선우를 끊어 내지 않아도 되는 수만 가지 이유를 가져다 대는 저 달콤한 속삭임이, 바로 여기에서 멈춰 서야만 하는 이유였다.

저 선을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숱하게 보아 오지 않았나. 대체로 추잡한 관계의 출발선은 저런 식이었다.

잠깐 만나는 거다. 의미 없다. 헤어질 수 있다.

그렇게 식당을 차려 주고, 집을 사 주고. 돈으로 산 여자를 돈으로 주물럭거리면서 잘난 남자가 된 기분을 느끼고.

그렇게 날이 갈수록 뻔뻔해져선 자식새끼 앞에서 제 안사람인 것마냥 편하게 얘기를 하고.

이 관계를 이어 가는 건 결국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다를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더 병신 같은 거였다. 적어도 그들은 제 밑에서 일하는 여자를 탐하지는 않았으니까.

이 정도로 자신을 흔들어 대는 여자라면 잘라 내는 게 맞다.

욕망에 이성이 잡아먹히기 전에, 경멸스런 인간이 되어 버리기 전에 멈추는 것이 맞았다. 지금이라면 멈출 수 있을 테니.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 여자가 두고 간 카드를 챙겼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시계 박스도 집어서 TV 아래의 서랍장에 넣었다.

서랍장을 닫고 카드를 집어넣는 것만으로 정리가 된다. 깔끔하게 정리가 된 거실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간단하네.”

문도는 소리 내서 말했다.

있어도 없는, 보여도 보이지 않는 그 정도. 설마 그 정도도 못 하랴 싶어서 피식 웃었다.

* * *

이른 아침,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도는 엎드려 누운 채로 손을 뻗었다. 늦게까지 일을 하다 잠을 자서 그런지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 잠깐 얼굴 보고 출근하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하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아침인데 잘 잤냐는 인사도 없으시네. 역시 우리 어머니.

안 그래도 건너가려 했는데 어찌 아시고.

느리게 몸을 일으킨 뒤 샤워를 했다. 출근할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주방의 뒷문을 열고 후원으로 나서자 평소보다 햇볕이 짙었다. 낮에는 덥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디딜 때였다.

숙소동과 별채가 만나는 둥근 아치형의 입구 너머로 이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물빛 반팔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고서 머리를 하나로 묶은 이선우는 에코백을 추슬러 메고 있었다.

햇살 아래로 걸어 나오던 이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발견한 이선우가 걸음을 멈추어 선다.

아침 햇살이 두 사람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짙은 녹색의 여름 정원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문도는 손목을 보았다. 시간은 6시 40분. 부지런도 하셔라.

건너편에서 이선우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깨끗이 지워 버린 것처럼 차분한 얼굴이었다.

문도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매미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자 나머지 놈들도 잠에서 깨었는지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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