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51화 (51/168)

51. 뭐가 필요했는데

며칠이 흘렀다.

서문도 전무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토요일이 지났고, 선우의 휴일이었던 일요일도 지났다.

월요일에는 엘리베이터에 타는 서문도를 스치듯이 보았는데, 그나마도 남자는 눈을 내려 핸드폰을 보고 있어서 선우가 들어온 것도 몰랐을 거였다.

중간에 받은 연락이라고는 딱 하나, 메일 주소가 쓰여 있는 메시지였다.

선우는 매일 밤 태블릿으로 서문도 전무에게 메일을 썼다. 길면 다섯 줄, 짧을 때는 두세 줄이면 끝나는 간략한 일과 보고였다.

화요일 밤에도 선우는 태블릿을 열었다. 10시가 넘었는데 별채의 2층에는 아직 불이 켜지지 않았다.

서유라가 무엇을 먹고 어디에 다녀왔으며 집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를 적고서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았다. 손은 자판 위에 올려 둔 채였다.

이제는 내가 싫어졌나요.

화면을 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예고도 없이 자신을 잘라 낸 남자에게 묻고 싶었던 말들을 손가락이 대신 쓰고 있었다.

이렇게 끝인 건가요. 이유를 알려 주면 안 될까요. 한 번만 기회를 더 주면 안 되는 건가요.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며 쓴 글씨들을 바라보다가 선우는 쓰게 웃었다.

무슨 노래 가사 같아.

이별을 당한 여자의 미련이 가득 담긴 노랫말 같은 문장들을 보다가 선우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타타타타— 버튼이 눌릴 때마다 글씨가 지워졌다.

미련도 같이 지워지면 좋을 텐데, 남자에게 민우의 핸드폰이 있는 한 그건 아무래도 요원한 일이겠지.

간략한 보고만 남은 본문을 확인하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서 한숨을 쉬었다.

자신에게 질렸나 보다. 더는 자신의 몸을 원하지 않는가 보다.

결론이 그렇게 내려졌다. 싸늘히 식은 눈동자가 남자의 마음을 말해 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남자의 흥미에 달려 있었던 관계였으니까.

그 관심이 식으면 언제라도 깔끔하게 정리될 것을 알았는데, 왜 계속될 거라 막연히 생각을 했는지.

선우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야 다시 관심을 가져 줄까. 아직 나는 당신이 더 필요한데. 이제는 정말 서유라만이 마지막 남은 희망일까.

희망일 리가 없지.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말해 줄 가능성은 해가 서쪽에서 뜰 가능성과 비슷했다.

만에 하나 진실을 말해 준다 해도, 증명할 방법이 하나도 없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에 계속 머물다 보면. 몇 번을 다시 마주하다 보면. 다시 용기를 내서 말을 걸다 보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끝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턱없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희망 회로일지도 모르겠지만, 끝이 날 때까지 아주 끝은 아니니까.

선우가 그렇게 생각을 하며 태블릿 패드를 접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리며 손목에도 진동이 왔다.

액정에는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 있었다. 선우는 반가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 야, 이선우. 전화 한 통이 없다?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전에 일했던 ‘지젤 발레학원’의 원장인 은정 선배였다. 이 자리를 소개시켜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 잘 지내?

“네. 잘 지내요. 선배는요?

— 나야 뭐. 야, 너는 그만뒀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왔어야지, 뭐 하는 거야. 섭섭하게. 만나서 얼굴도 보고, 밥도 먹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니.

은정의 말에 선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 뭐?

“제가 그만뒀대요?”

— 어. 아니. 어……. 너 그만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인지. 선우는 의아해하며 은정에게 말했다.

“저 아직 서유라 씨 트레이너 하고 있는데요.”

— 아. 그럼 그만두려고 하는 거구나?

“네?”

— 뭐야 그것도 아니야? 아니, 며칠 전에 현영 선배한테 전화 왔었거든. 서도에서 트레이너 새로 구한다고, 나한테 아는 사람 없냐고 또 물어보길래, 나는 선우 네가 그만뒀는지 알았지.

금시초문이었다. 아니, 금시초문이 아니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만둬? 내가? 사람을 알아봤다고? 그럼 그냥 잠자리만 그만두는 게 아니라 아예 자르려고 했던 거였어?

숨이 턱, 막히면서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어……. 선배, 아니에요. 저 아직…….”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서유라를 병원에 보낼 생각으로 알아본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보기 싫어서? 아예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고? 생각이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 아, 그래? 난 또 네가 그만둬서 사람 구하는 줄 알았네. 그만두면 연락해. 학원 다시 돌아오면 좋고, 밥이라도 한 끼 같이하게.

“네. 그럴게요.”

— 서유라는 어때? 진짜 미친 사람 같아?

“그게…….”

아무런 말을 해 줄 수 없다고 간신히 대답을 했다. 그 뒤로 은정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이것저것을 물었고, 대부분은 대답해 줄 수 없는 말이라는 애매한 대답만 했다.

— 연락하고, 잘 지내고. 알았지?

“네. 선배도 잘 지내시고요. 시간 나면 한번 놀러 갈게요.”

전화를 끊고서 선우는 굳어진 채로 있었다. 까맣게 암전이 되어 버린 머리로 애써 생각을 해 본다.

정말로 새로운 사람을 구하려 했던 걸까.

은정 선배에게까지 이야기가 갔을 땐, 이미 진행이 되고 있었다는 건데.

서유라를 병원에 보낼 생각이었으면 새로운 트레이너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겠지.

서문도는 더 이상 이선우와의 잠자리에 흥미가 없는 거고, 해고라는 방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거란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안지 않았었나.

‘너는 그런 여자인데, 내가 그걸 자꾸 잊어. 호구 새끼가.’

‘나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랑은 연애를 안 하는데……. 섹스는 했네?’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 같은데.’

남자의 목소리가 한 줄 한 줄 떠올랐다. 뭐가 뭔지 정말 모르겠다. 왜 이러는 건지. 왜 갑자기 이렇게 흘러가게 되는 건지.

선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서문도 전무의 번호를 찾아서 화면에 띄운 뒤에 한참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한 발을 더 가면 정말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끝이라면, 못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문도는 이선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2층의 불을 켰다. 거실에, 드레스룸에, 마스터룸까지 모두 불을 켜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메시지로 보내세요.”

— 잠깐이면 되는데, 건너가겠습니다.

“잠깐이면 되는 말을 굳이.”

— 돌려 드릴 것도 있고요.

한숨 쉬며 웃은 문도는 미간을 긁었다. 이상한 데서 의지가 굳건했던 여자라는 걸 잊었다. 허브차를 연달아 타서 올라왔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럼 올라오세요.”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며칠을 새벽같이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있었다. 전에도 비슷한 시간에 나갔다가 비슷한 시간에 들어오는 날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일부러 의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테스트였다. 일상에서 이선우를 떼고도 크게 영향이 없는지에 대한 테스트.

자연스럽게 크기가 줄어 소멸되는 정도의 욕망이라면, 욕구를 풀지 못하는 아쉬움에 그치는 정도라면, 이 관계는 그만두는 게 맞았다.

물질을 담보로 욕구를 푸는 짓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당연한 듯 요구를 하고 당연한 듯 다리를 벌리는 관계에 익숙해져서는 안 되었다.

바로 옆에 박소영과 송주연이라는 훌륭한 예시들이 있지 않은가.

이선우를 보지 않았던 며칠간, 의외로 평온했다. 비록 집에 늦게 들어오고 일찍 나가긴 했지만.

한 번.

엘리베이터 앞에서 찰나의 마주침이 있었을 때 저절로 고개를 들 뻔했던 적을 빼고는 무사히 지났다. 시간이 흐르면 신경 쓰이는 마음이 더 줄어들 것 같기도 했다.

이대로 정리를 하는 게 맞지.

이선우는 그냥 서유라의 트레이너로 두는 게 맞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키는데, 열려 있는 중문 너머로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무님, 들어가겠습니다.”

한 공간에 있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며칠간 평온했던 것처럼 마음의 동요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거의 다 된 것일 테니.

“들어오세요.”

문도는 거실로 나가며 대답을 했다. 중문이 열리고 이선우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서 문도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문도는 씨발, 하고 속으로 욕을 했다.

되기는 뭐가 돼.

눈을 마주하는 순간 쨍, 하고 어딘가에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전무님.”

얼굴은 또 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사람처럼 이선우는 수척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가녀렸던 몸인데 살이 내리니 정말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였다.

소파 근처까지 다가온 이선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제가 싫어지셨어요?”

문도는 마른침을 넘겼다. 그렇다고 대답을 할까. 아니라고, 이건 그냥 내 문제라고 대답을 할까.

“제가 너무 욕심을 냈을까요?”

무슨 말인지.

눈을 좁히는데 가늘게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이렇게 애처롭고 지랄인지.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제가 너무 비싼 시계를 사서……. 제가, 주제를 모르고 전무님께 다가가서 카드도 받고, 그래서…….”

어디서 약한 척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과 그런 거 아니니 그렇게 발발 떨지 말라고 다독이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드는 이 모순은 또 뭐고.

“그런 거 아닙니다. 이런 말 하러 온 거면 내려가세요.”

“이거. 다시 돌려 드릴게요.”

이선우가 카드를 꺼냈다. 소파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도.”

내려놓은 건 자그마한 주얼리 박스였다. 그 안에 시계가 들어 있다는 건 열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와 자존심을 세우는 건가 싶어 웃고 싶었다. 그냥 가져가라고, 그 정도 기념은 할 수 있다고 말을 하려는데 이선우가 그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저는……. 사실 카드 같은 거 필요 없었어요.”

물기 어린 갈색 눈동자가 툭, 하고 심장 근처를 때렸다. 문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선우에게 물었다.

“그러면. 뭐가 필요했는데.”

그 말에 선우가 한참 동안 문도를 보았다.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선우가 말했다.

“전무님이요. 저는 그냥 전무님이 필요했어요.”

그걸 누가 믿어.

비웃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붉어지는 눈가에 마음이 지끈거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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