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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어페어-50화 (50/168)

50. 없습니다 @AW

에코백을 챙기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마친 선우는 침대에 멍하니 앉았다.

밤새 잠을 거의 못 잤다.

서문도 전무가 왜 그러는 건지를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

‘너는 그런 여잔데.’

그렇게 말을 하던 눈빛과 목소리가 생각난다. 경멸과 냉소가 섞인 눈빛.

세상 다시 없는 하찮은 사람이 된 느낌. 그 말을 듣는 순간 욱신 하고 아팠던 명치가 다시 한번 지끈거렸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숨을 깊이 마신 선우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에 혼자 생각을 했을 때는 혹시 정체를 들킨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왜 갑자기 그러는 걸까. 생각을 해 봐도 잘 모르겠다. 일단은 별채에 다시 건너가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결심을 굳힌 선우는 에코백을 챙겼다. 1층으로 내려오니 통통통통 도마에 칼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우 씨, 오늘도 일등으로 내려오네. 어서 앉아. 된장국 괜찮지?”

“네, 감사합니다.”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하고 밥을 펐다.

“날이 그렇게 습하더니 밤사이 비가 많이 왔더라. 오늘은 또 맑아.”

“그러게요.”

선우는 된장국을 받으며 대답했다. 애호박과 감자, 두부가 들어간 따뜻한 된장국이 속을 든든하게 해 주는 느낌이었다.

보리가 섞인 잡곡밥에 열무김치, 된장국과 가지볶음. 밥상에서 여름이 느껴졌다.

“맛있어요. 전부 다. 꼭 할머니가 해 주는 밥 같아요.”

“감자전도 하나 먹어 봐. 근데 왜 할머니야, 엄마가 아니라?”

조리사 아주머니가 금방 부친 감자전을 내주며 말했다. 선우는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부모님이 맞벌이셔서 반찬은 외할머니가 해 주셨거든요.”

“그치, 나도 울 엄마 살아 계실 땐 많이 받아먹었어.”

조리사 아주머니가 그릇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선우 씨? 나이 드신 분들은 기름 짜는 동안에 방앗간 지키고 섰다? 자기가 싸간 깨랑 바뀔까 봐. 그렇게 몇 시간 지키고 섰다가 다 짜지면 우리 집에 언니네에 남동생네 죄 부쳐 주고. 어우, 그 기름이 얼마나 꼬순지. 그게 보물인 줄 그땐 몰랐지.”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도 꼭 같은 말을 했었다. 그 반찬들이 보물인 줄 몰랐다고.

선우도 그랬다. 반찬을 할 시간이 많이 없었던 엄마는 항상 국을 가득 끓여 놓곤 했었는데, 아침에 속을 따끈하게 데워 주었던 그 국이 그렇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었다.

“된장국이 진짜 맛있어요.”

“재료가 좋잖아.”

유기농 재료에 명인의 된장을 썼으니 당연하다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된장은 하동의 어느 유명 종갓집에서 받아 오고, 재료들도 무농약 유기농으로 재배된 것을 직배송으로 받는다고.

“저는 아주머니께서 끓여 주셔서 맛있는 것 같아요.”

선우는 고맙다는 표현을 돌려서 했다. 너무 입에 발린 칭찬을 했나 싶어서 멋쩍은 미소가 나왔다.

그래도 진심이었다. 숙소동에 들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한다. 아침마다 식사를 하며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 있어서 서유라를 상대하고, 남자와 밤을 보내고, 핸드폰을 찾아 서랍을 뒤지는 숨 막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잠시나마 잊게 된다. 혼자서 버텨야 했다면 훨씬 더 힘들었겠지.

“아유, 뭘 또 그렇게까지.”

조리사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선우는 따끈한 국 속에서 좋아하는 두부를 건져 먹었다.

먹고 건너가야지. 건너가서 물어보자. 기분 나쁜 일이 있는 건지, 잘못한 일이 있는 건지, 일단은 다시 만나 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든든히 속을 채웠다.

* * *

별채로 건너간 선우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다이닝룸 쪽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하는 중이겠구나. 선우는 짐작하며 주방을 향해 걸었다.

“선우 씨, 일찍 왔네?”

“안녕하세요.”

주방에는 장 여사가 있었다. 작고 하얀 접시에 자그마한 초콜릿과 귤 모양의 젤리를 담고 있는 장 여사에게 인사를 한 뒤 선우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식탁 앞에 앉은 서문도 전무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전무님, 좋은 아침입니다.”

선우는 서문도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서문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술을 그렇게 드셔 놓구는 커피에 쿠키로 식사를 하시면 속 다 버린다니까요.”

장 여사가 투덜거리며 냉장고에서 뽀얀 액체가 들어 있는 물병을 꺼냈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장어탕은 그렇잖아요. 우리 회장님께서는 회춘을 하시려고 그러나. 아침부터 장어를 드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서문도가 말했다. 선선히 웃는 얼굴이었다. 어제의 술기운 같은 건 하나도 남지 않은 말끔한 모습으로 남자는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금방 콩나물국 끓여 드린다니깐.”

뽀얀 액체를 컵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면서 장 여사가 말했다.

“그럼 여사님이 힘들잖아요. 내가 마음이 안 좋지.”

쿠키를 반으로 쪼개면서 서문도가 말했다. 장 여사를 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그 시선을 훔쳐보는데 순간 욱신 하고 가슴이 아팠다.

“하여간 말은 잘하셔. 이거나 남기지 말고 드세요.”

데워진 붕어즙과 디저트를 서문도에게 가져가며 장 여사가 말했다.

“주는 대로 잘 먹는 거 알면서.”

서문도는 장 여사가 내미는 비릿한 액체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다음으로 초콜릿을, 그다음으로 내미는 귤젤리를 입에 넣는다.

그 모습을 보는 선우는 두 사람만의 견고한 세계에 이방인, 아니, 이방인조차 되지 못하는 철저한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가슴께가 시큰거리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거다.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라서. 누구라도 그건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일 테니까.

“그거 알아요?”

남자의 말에 선우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고개를 들어 서문도를 보는데, 서문도의 시선은 장 여사를 향해 있었다.

“붕어즙 마시면 술이 늘어요.”

“이잉? 누가 그래요?”

“이 상무랑 김 부장이. 이거 먹고 술이 두 배로 늘었다는데?”

“아니, 그럼 어째. 아니, 이게 몸 보하라고 마시는 건데……. 이걸 먹고 술이 늘면……. 진짜래요? 나 놀리는 말 아니구?”

피식. 가볍게 웃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킷을 들었다.

“출근합니다. 잘 먹었어요.”

서문도가 붕어즙을 노려보며 인상을 쓰는 장 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걸어 나오는 문도의 시선이 아일랜드 옆에 서 있는 선우에게로 향했다.

선우를 보는 시선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을 태울 것만 같이 강렬했었던, 한 번씩은 발목을 움켜쥐는 것만 같았던, 돌아서 있어도 목덜미가, 등허리가 따끔거렸던 눈빛은 이제 없었다.

때로는 짓궂게, 때로는 따뜻하게 반짝였던 그런 모든 것이 지워진 눈으로 남자는 가볍게 말했다.

“이선우 씨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나무랄 데 없는 인사였다. 가벼운 미소를 곁들인,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친절한 인사. 그래서 당혹스러운 인사.

“아, 네……. 전무님도 좋은 하루…….”

선우의 답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등을 돌렸다. 스쳐 가는 남자에게선 옅은 담배 냄새도, 짙은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깨끗하고 청량한 냄새를 남기며 사라진 남자를 멍하니 보다가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떼었다.

이렇게는 안 되는 거라 막연히 생각하며 선우는 남자를 쫓았다.

* * *

차에 막 오르려던 찰나였다. 아무도 없어서 적막했던 주차장에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무님!”

문도는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선우가 급한 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문도는 다시 운전석 문을 닫고 선우를 기다렸다.

“전무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차에 오르지 않고 기다린 문도에게 선우가 말했다. 다급히 나왔는지 슬리퍼 차림이었다.

“하세요.”

문도가 순순히 말하자 여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밤사이 뭘 어떻게 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나타난 이선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기만 했다.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그게.”

나쁜 짓은 하나도 못 할 것처럼 맑고 선하게 생긴 여자. 그런 여자를 담담히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까도 그랬다.

내내 이선우가 서 있는 방향으로 한쪽 신경이 낚싯줄에 걸린 것처럼 당겨져 있어서, 장 여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혹시 제가 잘못한 일이 있을까요?”

잘못한 일. 있지. 작정하고 내게 다가온 것. 처연할 정도로 순하고 여린 외모로 자꾸만 판단을 흐리게 한 것. 이렇게 뛰어와 나를 흔드는 것. 모두가 잘못한 일이라는 걸, 이선우는 몰랐다.

“없어요.”

아니. 사실 여자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제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밝히고 다가온 여자였다.

그저 서로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밤놀이나 하면 되는 관계였는데, 그런 상대에게 마음이 흔들려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세요?”

얼핏,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자였다. 너는 뭐가 그렇게 간절할까. 어차피 내가 아닌 다른 남자였어도 몸을 던졌을 거면서.

“없습니다.”

단답형의 대답에 이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순간에도 저 눈동자 가득 자신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걸 보면 꽤나 중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제대로 묻지도 못하는 이선우는 길 잃은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뭐라도 말을 해 보려고 더듬거리고 있는 선우의 앞에서 문도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늦겠네요. 할 말이 남았으면 메일이나 메시지로 보내세요.”

문도는 운전석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리모컨을 누르자 주차장 문이 열렸다. 출발을 하면서 룸미러를 본다. 망연히 서 있는 이선우의 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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