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문이 닫히는 소리
실은 서유라의 개인 트레이너를 다시 구할 생각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선우를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다.
퇴직금이든 특별 수당이든 넘칠 만큼 쥐여 준 뒤 이선우가 머물 곳, 그러니까 그가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을 구해 줄 생각이었다. 부족하다면 생활비 정도는 주어 가면서 관계를 이어 갈 생각이었다.
문도는 어둠 속에서 화면 안의 이력서들을 훑어보았다.
리듬체조선수 경력의 필라테스 강사. 재즈댄스 전문 강사. 특이 사항이 동성애인 남자 트레이너.
마지막 이력서에 명 실장이 커밍아웃하셨음, 이라고 사족을 써 놓은 것을 보는데 웃음이 났다.
여자 강사가 구해지지 않으면 남자도 무관하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서유라의 개인 트레이너로 보통의 남자 강사를 들이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명 실장은 사족까지 붙여 가며 표현한 것이다.
명 실장보다도 사리 판단을 못 하고 있었네.
쓴웃음을 지으며 문도는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굵은 불똥이 포물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축축한 잔디 위에서 사그라드는 불똥을 발로 지그시 눌렀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를 했던가.
선 넘지 마시라고. 사리 분별을 하시라고. 누가 누구에게 충고를 해.
[구인 당분간 보류하겠습니다.]
문도는 명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핸드폰의 화면을 끄고 별채를 향해 걸었다. 밤의 전화는 패스하기로 한다. 오늘만큼은 이선우를 보고 싶지 않았다.
물이나 한잔 마시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방의 뒷문을 여는데 어두워야 하는 거실에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
안으로 몇 걸음을 걸어가자 태블릿 패드를 소파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아 있는 서유라와 그 옆에 앉은 이선우가 보였다.
태블릿 패드에서는 쩝쩝거리며 음식을 먹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서유라는 눈으로 그 화면을 보면서 등을 비틀고 있었다.
“아니, 거기가 아니구우.”
“여기요?”
“그 옆에. 응, 거기. 아니, 왼쪽. 응. 응. 거기.”
불 밝은 거실에서 이선우에게 등을 맡긴 서유라가 흡족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선우가 잠옷처럼 생긴 티셔츠 안에 손을 넣어서 서유라의 등을 긁으며 다시 묻는다.
“여기는요?”
상냥한 목소리에 서유라가 부르르 몸을 떨고는 응응, 하면서 대답을 한다.
“응, 거기. 아응, 좀 더 세게. 으, 시원해. 야, 너는 등도 잘 긁는다.”
서유라가 살짝 뒤를 돌아 이선우를 보면서 말했다. 거의 보지 못했던 서유라의 해맑은 웃음이었다.
몽롱하니 기분 좋은 얼굴로 등을 맡긴 모습을 보는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웃음으로 나왔다.
야차 같은 서유라마저도 이선우에게는 경계를 풀었구나 싶어서.
문도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33분. 자정을 넘긴 시간에 거실 불이 밝은 것도 낯선 일인데, 이선우는 여전히 별채에 있고 서유라는 실실 웃고 있네.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뒤 문도는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밤이 늦었는데.”
문도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두 사람이 한 번에 뒤를 돌았다. 그를 발견한 서유라가 미간을 구기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이선우는.
놀랐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아주 잠시 옅게 웃은 것도 같다. 연하고 부드러워 몹시 여려 보이는 미소였다.
아버지도 그랬지. 송주연이 마음이 여리다고. 존나 어이가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실낱같은 웃음을 흘리며 문도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선우를 의식적으로 외면하고서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을 흘겨보고 있는 서유라에게 말했다.
“친하게들 지내시네요.”
“왜? 고까워?”
오, 문도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술을 많이 마시긴 했나 보다. 서유라가 고깝다는 단어를 알고 있다는 거에 감탄을 하다니.
“감시하라고 붙여 놨는데 잘 지내니까 보기 싫은가 봐?”
팔짱 끼며 말하는 서유라를 보면서 문도는 웃었다.
자신에게 서유라는 좋고 싫고의 개념이 아니다. 가족이니 핏줄이니 하는 이름으로 주어진 것. 그러니 일정한 수준까지 컨트롤을 해야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문도에게 만물은 대체로 그랬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필요와 불필요로 나뉜다. 필요한 것인가,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필요하다면 취하고 필요하지 않다면 버린다. 그뿐이었는데.
“늦었습니다. 고모님은 그만 들어가시고, 이선우 씨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여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거짓말처럼 주변의 풍경이 흐릿해지며 이선우만 선명해진다.
두 사람만 남겨 놓고 모든 것들이 뒤로 물러나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을 끊어 내며 문도는 입을 열었다.
“올라와서 보고하세요.”
냉장고로 향한 문도는 유리컵 가득 얼음을 받고 생수를 채웠다. 쨍하게 시린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서유라가 시야를 가리며 그의 앞에 섰다.
“야, 니가 뭔데 들어가라 마라야. 안 들어가면 어쩔 건데? 그리고, 보고는 꼭 2층에서 해야 돼? 여기서 하면 안 돼? 왜 매번 귀찮게 오라 가라야.”
허리춤에 팔까지 올린 서유라는 앵앵거리는 파리 같다. 문도는 컵을 내려놓은 뒤 서유라를 응시했다.
꺼져.
눈빛으로 말하며 쳐다보자 잠시 노려보던 서유라가 팩하고 몸을 돌리며 구시렁거렸다.
“에이씨, 잘 지내도 지랄이야. 야, 나 낼 아침에 일찍 깨워죠.”
“9시에 깨워 드릴게요. 걱정 말고 주무세요.”
달래 주는 것 같은 이선우의 다정한 목소리에 서유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스트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거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올라가죠.”
문도의 말에 선우가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문도 전무가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어깨를 비틀어 재킷을 벗는다. 진열장 앞에 서서 시계를 풀었다. 조금 느리긴 해도 평소와 같은 패턴의 행동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 그동안 한 번도 선우를 보지 않았다는 것.
오랜만이었다.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이유도 모르고서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건 언제나처럼 불편한 일이었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선우도 그때의 이선우가 아니라는 거였다.
치맛자락만 쥐어짜며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던 이선우는 이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이선우가 되었다.
남자의 심기가 어떠하든 자신에게는 해야 하는 일들이 있으니.
“제가 해 드릴까요?”
선우의 말에 서문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여전히 이런 순간이면 움찔 오그라붙지만, 그래서 이렇게 마른침을 넘기며 긴장을 하지만.
“제가 해 드릴게요.”
선우는 문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남자가 어디 한번 해 보라듯이 한 걸음을 물려 공간을 내어 주었다. 가까이 다가간 남자에게서 짙게 술 냄새가 났다.
술을 마셔서 말이 없는 걸까.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왼쪽 소매에 달려 있는 커프스링크에 손을 댔다.
고개를 숙여 하나를 풀고 또 하나를 푸는 동안 서문도의 시선이 자신의 이마에 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달칵, 진열장의 위로 커프스링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자 평소보다 흐트러진 모습의 서문도가 보였다.
짙은 술 냄새,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느슨하게 내려놓은 타이.
분명 평소보다 흐트러진 모습인데 눈빛만은 또렷하게 살아서 선우를 보고 있었다. 말없이 밝게 타는 눈동자가 선우를 긴장시겼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혹시 실수를 했을까. 불안해진 선우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술을 많이 드셨나 봐요.”
“조금.”
“타이도 풀어 드릴까요?”
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이미 느슨해져 있는 매듭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타이를 풀었다.
매끄러운 실크 타이를 손에 쥐고서 망설이다가 용기 내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반은 충동이었고, 반은 계획이었다.
서문도의 마음이 풀어지기를, 전처럼 느슨해지기를 바라며 입맞춤을 했는데 남자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괜한 짓이었을까 후회를 하다가 깨달았다.
서문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한 번 더 용기를 주어서 선우는 입술을 떼는 대신 남자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목을 감으면서 남자의 아랫입술을 제 안으로 빨아들였다.
당신에게 배운 거예요. 그러니까…….
뒷생각을 잇기 전에 남자가 욕설을 뱉었다. 너털웃음을 웃은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입술은 어느새 삼켜져 있었으니까. 난폭하게 들어온 혀가 선우의 혀를 감았다.
남자에게서 짙은 술 냄새가 났다. 옅은 담배 냄새도 났다. 늘 그렇듯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프게 빨리고 질척하게 얽히는 동안 그저 선우 자신도 취하는 것 같았을 뿐.
바짝 붙은 하체에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남자의 욕망이 느껴졌다.
나를 원하고 있구나. 그 사실에 안도할 때, 남자가 입술을 떼면서 선우를 밀어냈다.
시니컬한 웃음을 웃으며 손목으로 입술을 닦는다. 당혹스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서문도가 입을 열었다.
“너는.”
너, 라는 지칭은 처음 들었다.
“서유라의 트레이너지.”
당연한 말을 하는 서문도였다. 아직도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선우에게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월급을 주는 사람이고.”
그 역시 당연한 말이다.
“나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랑은 연애를 안 하는데……. 섹스는 했네?”
느리게 흘러나오는 당연한 말들이 선우를 조여들었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 같은데.”
서문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일까. 선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평소처럼 계속하지 않는 걸까. 왜 가는 웃음 보이면서 친밀한 말을 건네지 않는 걸까. 왜, 내 존재를 갑자기 되짚어 보는 걸까.
“기억이 잘 안 나. 아니지. 기억은 나지.”
문도가 선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샴푸 바꿨다고 했었지. 커피 마시자고도 했고. 카페인 없다고 이상한 차를 들고 올라와서는 나랑 자고 싶다고.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고.”
웃지 않으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 놓고 발발 떨면서 도망가더니, 다시 올라왔지. 그래서 하룻밤 자 줬더니, 계속하고 싶다 했어. 카드도 받았고, 시계도 사셨지.”
서문도의 말속에는 지난 몇 달의 이선우가 있었다. 선우에게조차도 낯선 이선우를 말하며 서문도가 웃는다.
“너는 그런 여잔데.”
남자의 눈동자가 선우의 얼굴을 느리게 쓸었다. 이마에서 눈, 눈에서 코, 입술과 턱. 차근히 내려갔던 눈동자가 다시 올라와 선우의 눈을 마주했다.
“나는 그걸 자꾸 잊어. 호구 새끼가.”
이런 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선우는 알 수 없었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구겨지는 남자의 미간이, 싸늘한 눈동자가, 자신을 밀어내려 하고 있다는 것만 알겠는 순간에 서문도가 말했다.
“이선우 씨. 당분간 올라오지 마세요. 보고는 메일로 받겠습니다.”
서문도가 돌아섰다. 선우는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