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선 넘지 마시라고
“전무님,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부름에 문도는 느리게 눈을 떴다. 익숙한 주차장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잠이 든 것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도착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술자리가 있었다. 이희철 전지 부문 사장과 함께 태정 모비스의 강규진 대표를 만났다.
전기차와 배터리, 배터리와 전기차. 변화와 상생. 애국과 경쟁력. 그딴 이야기들 사이로 두 회사의 대표가 물 밑으로 치열한 협상을 벌이는 자리였다.
아버지뻘의 기라성 같은 존재들을 모시는 자리, 레벨 한참 낮은 전무 나부랭이는 분위기 맞추어 가며 술 시중을 들 수밖에.
간만에 많이 마셨다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기사가 인사를 하며 먼저 내리고 이어서 문도도 뒷좌석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딛는데 스트레이트로 들이켠 양주가 핏줄을 따라 핑, 하고 돌면서 시야가 흔들렸다.
후.
내뱉는 숨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문도는 목을 뒤로 꺾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바로 하며 눈을 떴다.
이 정도 습기를 견뎌 내려면 아가미 정도는 달려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덥고 습한 밤이다.
주차장 특유의 눅눅한 공기는 습기가 더해져 비릿한 냄새가 났다. 문도는 벌어진 슈트의 단추를 잠그고 본관 쪽의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똑똑.
본관 2층의 서재 앞에서 문도는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게, 언제 한번 필드 같이 나가야 하는데요. 아하하, 그래요?”
달칵, 문이 열리고 핸드폰을 목에 낀 서중호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 뒤 통화를 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아, 우리 지사님 유모어가 날이 갈수록 느시네. 그러면은 어디 시원한 계곡에 발이나 한번 담가 볼까요. 백숙 어떠십니까. 그래요. 내 자리 한번 마련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지사님도 얼른 쉬시고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통화를 마친 서중호가 핸드폰을 책상 위로 툭 던졌다. 순식간에 표정은 싸늘해진다.
“아주 대기업이 호구지. 땅 파면 돈이 나오는 줄 아나. 무슨 놈의 MOU를 만날 하재. 앉아라. 오늘 강규진이 만났다며.”
“네.”
“뭐래, 전량 리콜하겠대?”
태정의 전기차 ‘마인’이 불타는 일이 몇 번 있었고, 그로 인해 배터리 공급사인 일본의 세이요와 태정이 살벌한 책임 공방을 벌이는 중이었다.
“전량 리콜할 거고, 물러서지 않고 강하게 푸시하겠다고요.”
“새끼, 그러게 우리 꺼 쓰라니까. 국산 쓰라 그래, 국산.”
“조만간 그렇게 되지 싶고요.”
술을 물처럼 마셔 가며 딸랑딸랑하고 온 이유였다. 세이요가 빠져나간 마인의 라인에 서도의 배터리를 끼워 넣기 위해서.
“고생했다. 쉬어라.”
“아버지도 쉬세요.”
몸을 세우며 일어서는데 서중호가 아, 하고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문도를 보며 말했다.
“오늘 희연 갔었다며.”
오늘 출근했었다며,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
이건 또 뭔가. 뒷머리가 당겼다.
문도는 앉아 있는 서중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서중호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걱정을 하더라. 잘 모신다고 모셨다는데, 실수는 안 했는가 모르겠다고. 어땠어? 네 어머니가 잘 먹던? 음식은 괜찮았고?”
김빠진 웃음이 나왔다.
배터리 한 개라도 더 팔아 보겠다고 술에 절어 돌아온 아들 앞에서 내연녀 이야기를 꺼내 들다니, 실화냐 싶고.
숨기는 척을 해도 모자란 마당에, 공식적인 관계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말을 하는 저 방만하고 안일한 태도는 또 뭔가 싶고.
문도는 피곤한 한숨을 쉬었다. 서중호가 툭툭 제 어깨의 먼지를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걱정이 많아.”
마음이 여려, 부분에서 문도는 한 번 더 웃었다.
눈깔이 뒤집히셨나. 바람을 피더라도 상대는 똑바로 알아야지. 여자 길게 안 만나기로 소문난 서중호 옆에서 6년을 버틴 여자가 마음이 여려?
문도는 피식 웃으며 미간을 긁었다. 음, 하고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희연 송 사장이, 보기보다 경우가 없네요. 그 정도 일로 부회장님께 전화를 다 하고.”
눈썹을 들어 올리는 서중호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송 사장에게 전해 주세요. 선 넘지 마시라고.”
송주연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아들이, 와이프가 그 존재를 알든 말든. 식당을 찾아가 밥을 먹든 말든. 그리하여 그 여자가 괴롭고 힘들다 하소연을 하든 말든.
수면 위로 올리지 마시라.
그 말을 하면서 문도는 서중호를 보았다.
경우가 없다. 선 넘지 마시라. 앞선 말들이 본인에게 하는 소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서중호의 눈동자가 단단하게 뭉치는 것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성북동에 그 정도 건물 받았으면 평생 그늘에서 나오면 안 되죠. 받은 게 있으면 치러야 하는 대가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사람이 자기 본분은 지켜야지. 안 그렇습니까?”
문도의 싸늘한 눈동자와 서중호의 단단한 눈동자가 허공에서 만났다. 침묵에 서재의 공기가 팽팽해지려는 찰나, 서중호가 일순간 낯빛을 바꾸며 눈가가 접히도록 웃었다.
“아, 선을 넘기는 무슨. 그이가 그럴 주제나 되나. 하도 쩔쩔매면서 걱정을 하길래 나는 그저 네 어머니가 식사는 잘 먹었는지, 어디 불편한 데는 없었는지 그게 궁금했을 뿐인 것을. 네가 오해를 했구나.”
“아.”
그러셨구나. 문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사이를 띄웠다. 서재의 책장을 채우고 있는 위인전 전집의 책등을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저는 또 아버지께서 송 사장을 각별히 여기시는가 싶어서.”
“어허이. 각별은 무슨 각별. 네 할아버지가 박소영이한테 휘둘려 평지풍파 일으키는 걸 평생 보고 산 나인데.”
서중호가 손까지 설레설레 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알지 않느냐. 나한테 특별한 사람은 네 어머니뿐이라는 거. 송 사장은 그냥 편하다 보니 옆에 좀 오래 둔 것뿐이지 아무 의미 없어.”
의미 없다는 것 안다.
송주연은 내일이라도 당장 버려질 수 있다. 본인에게 의미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쇼라고 해도, 아버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 정도로 의미 없는 사람이면, 아버지.”
태종 이방원.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남자. 아들을 위해 살아생전에 빠르게 왕위 선양을 한 남자.
문도는 수십 권의 책등 사이에서 서중호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의 이름을 보다가 말했다
“그 이름 밖으로 꺼내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합니다.”
서중호의 눈빛 안에 자그맣게 심지가 섰다. 꼿꼿해지는 눈동자를 웃음으로 가리며 서중호가 말했다.
“그런데 문도야. 애비가 자식새끼 앞에서까지 말을 가려야 할까. 그 정도 말도 못 하는 사이라면 이거 어디 삭막해서 살겠나.”
문도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소파에 앉아 있는 서중호를 보았다. 마지막 한끝은 접어 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눈빛이 형광등 아래에서 번뜩였다.
왕재를 알아보고 앞길을 터 주는 이방원 같은 아비를 만났어야 했는데, 나는 왜 죽지도 않고 내려오지도 않는 영조 같은 아비를 만난 거냐며 한탄을 하셨지.
아버지 당신은 이방원이 되실까. 영조가 되실까. 어쩐지 답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입을 열었다.
“하셔도 되죠. 제 앞에서야 뭐,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시죠. 아들인데요. 그냥 조금 느슨해지신 것 같아서, 그러다 어머니 앞에서 실수하실까 봐 한번 짚어 드린 것뿐입니다. 사람이 방귀가 잦으면 똥을 싼다잖아요.”
마지막 말에 꿈틀, 눈매를 일그러뜨리던 서중호가 그대로 눈을 접으며 껄껄 웃었다.
“그래, 그래. 내가 조심을 했어야 했는데. 이 애비 걱정해 주는 건 너뿐이구나. 나야 남자끼리 있으니 말을 한 것이지. 설마 네 어머니 앞에서 그럴까. 우리 아드님, 걱정을 하덜덜덜 마시구요.”
한껏 웃는 서중호의 얼굴이 꼭 각시탈 같았다. 휘어진 눈매 안으로 숨은 눈동자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가면. 불리해지려는 순간 빠르게 한 수 접는 서중호를 내려다보던 문도는 빙긋 웃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늦었습니다. 주무세요.”
“그래. 너도 건너가서 푹 쉬고, 다음 주가 출장이었지?”
“다다음 주요.”
“아, 그래그래. 어디라 그랬더라.”
“스위스 갑니다.”
“어이쿠, 멀리도 가네. 조심히 잘 다녀오고. 건강 잘 챙기고.”
앉은 자리에서 배웅을 하는 서중호에게 문도는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서재를 나섰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웃음이 빠르게 거두어지는 서중호의 얼굴이 보였다.
건방진 새끼. 아버지의 눈동자에 또렷한 불쾌감이 번지는 것을 보며 문도는 문을 닫았다.
본관을 나온 문도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습한 공기에 눅눅해진 담배에 느리게 불이 붙는다. 한 모금을 빨면서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걷는다.
몇 걸음을 걷다가 아지랑이처럼 번지는 연기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구름으로 낮아진 밤하늘을 보다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단정한 블랙 원피스를 입고서 진주 목걸이를 드리운 송주연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인 우현희보다도 더 재벌 사모님 같았지.
하기야, 박소영도 상큼했던 청순 미녀였다지 않나. 그래서 늙어 빠진 서 회장과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대중의 배신감이 대단했다고.
박소영과 송주연, 그 뒤를 잇는 말간 얼굴의 여자가 떠올랐다.
성북동에서 식사를 하던 중에, 노친네들과 술을 마셨던 중간중간에, 술에 절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을 감으며 생각을 했었다.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숨을 쉬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담배를 깊이 빨며 문도는 핸드폰을 꺼냈다. 몇 번의 터치로 이메일을 열었다. 명 실장이 저녁 시간에 보내와 제목만 확인했던 메일이었다.
[서유라 님 개인 트레이너 후보 명단 올립니다.]
“잘하는 짓이다.”
호구력 만렙의 등신 새끼가 여기 있었네, 자조하면서 문도는 낮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