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47화 (47/168)

47. 너

퓨전 한식당 ‘희연’은 성북동에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북악산이 뒤로 보이는, 성북동 깊은 곳의 한적한 길에 위치한 잿빛 모던한 건물이 희연이었다.

길가에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환한 햇살이 들이치는 시간에 문도는 주차장 입구에 차를 세웠다. 정복을 입은 직원이 다가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얕게 고개를 끄덕인 문도가 입구로 향하면 직원은 차에 올라 주차를 한다.

기쁠 희(喜), 인연 연(緣).

출입문 옆의 금속 현판에 검은색으로 글씨가 박혀 있다.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열을 맞추어 대기를 하던 직원 넷과 함께 사장인 송주연이 고개를 숙이며 손님맞이를 했다.

“어서 오세요. 희연입니다.”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희연의 모토는 섬김이라 했다. 예를 다해 손님을 섬기어 기쁜 인연을 이어 간다는 곳.

“전무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대표님께선 안쪽에 계십니다.”

송주연이 곱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문도에게 말했다. 문도의 눈길이 벽에 걸린 액자로 향한다.

모던한 액자 속, 캘리그래피로 멋들어지게 휘갈겨진 ‘섬김’이라는 글씨를 볼 때마다 문도는 웃음이 나왔다.

송주연이 기쁘게 서중호를 섬기는 대가로 받은 식당이니, 정말이지 정체성 하나는 확실한 곳이다.

주연의 안내에 따라 문도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리넨이 깔린 테이블을 지나자 조금 더 은밀한 공간이 나왔다.

“왔니.”

완전히 닫힌 공간은 아니었지만 벽으로 자리의 대부분이 감싸진 자리에 우현희가 앉아 있었다. 문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현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찍 오셨네요.”

“그러게. 런치 코스 괜찮지?”

“네.”

호텔에서 스카웃 해 온 헤드 쉐프가 있는 곳이다. 뭘 시킨다 해도 평균 이상은 할 테지만 맛을 즐기려고 오는 곳은 아니니, 메뉴 따위 상관없었다.

“신경 쓰지 말랬는데도 우리뿐이네.”

현희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문도는 고개를 돌려 홀을 보았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얘기하기 좋잖아요.”

문도는 웃으며 답했다.

1년에 한 번쯤 문도는 직접 희연에 전화를 걸어 식사 예약을 했다. 문도가 예약을 하는 날이면 송주연은 그날 예약을 닫는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본처와 그 아들에 대한 또 다른 섬김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아버지의 지시일 수도 있겠으나, 그건 중요치 않았다.

서중호의 정서적 피난처.

우현희는 희연을 그렇게 정의했다.

받들어 모시고 살아야 하는 사업적 동지가 아닌, 성질을 보이고 변덕을 부리며 막돼먹게 굴어도 다 받아 주는 여자가 있는 곳. 서중호를 대단한 일을 하는 대단한 남자로 떠받들어 주는 곳.

그때 송주연이 서빙을 하는 직원과 함께 살짝 긴장한 미소를 보이며 다가왔다. 식탁 위로 앙증맞은 전채요리가 놓인다. 송주연이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런치는 여름 특선 메뉴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보시면, 제일 왼쪽에 매생이 계란찜을 놓았는데요. 완도 매생이를…….”

매생이 계란찜부터 라임 셔벗까지 송주연이 메뉴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을 묵묵히 들은 후, 문도는 말했다.

“다음 메뉴부터는 식사만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잠깐 당황한 송주연이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네, 전무님. 대표님,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유기농 방사란이며 작년 겨울에 급냉해 두었던 최상급 매생이며, 설명이 장황했던 매생이 계란찜을 한술 떠서 삼키는데 우현희가 물었다.

“기분 좋은 일 있었니?”

담담한 목소리에 문도는 어머니를 보았다.

“약간요.”

문도는 새우살을 얹은 브리오슈를 집어 들며 말했다.

기분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피곤이 풀리는 잠자리를 갖긴 했다.

이선우를 만족스럽게 안고 난 다음 날이면 컨디션이 좋았다. 격양되는 성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얗게 꺾어지는 표정을 본 날이면 더욱 그랬다.

짭짤한 새우의 맛과 버터향 풍부한 브리오슈의 진한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빵을 씹으며 뒤편의 커다란 창에 눈길을 주는데 북악산 푸르른 녹음 위로 여자의 모습이 겹쳐졌다.

전무님은요, 하고 가만히 묻던 목소리. 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보던 작은 얼굴. 조심스럽게 뺨을 만져 보던 손길.

잘하는 짓이다.

어머니와 밥 먹으러 와선 여자 생각이나 하고. 속웃음을 웃으며 문도는 창에서 시선을 뗐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현희에게 말했다.

“네오 건은 짐작하신 대로예요. 큰아버지 비자금이랑 서창도, 서준도 지분 담보로 받은 돈, 몽땅 쓸어서 넣었습니다.”

승계 구도에서 밀린 후, 서용호 일가는 서도의 후계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린 듯 보였다.

대신 중공업과 건설 지분을 담보로 현금을 돌려서 개인 자산을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매도로 재미 좀 보고 있고요. 조만간 시멘트 지분도 팔아 치울 거라는 얘기도 있고.”

“네오에서 ‘타임 레코드’를 노린다는 말이 들리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네. 아마도요.”

타임 레코드 설계 건에 대해서 알아내기가 꽤나 까다로웠는데, 언제 아신 건지.

흠, 하고 우현희가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어리굴젓을 넣어 감태에 살짝 말은 주먹밥이 서빙되었다.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우현희가 오래 씹는다.

“백업을 해 두는 게 나을 것 같구나.”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우현희가 문도를 보면서 말했다.

백업이라.

서중호가 타인의 약점을 틀어쥐는 방식으로 뜻하는 바를 이루는 편이라면, 우현희는 사람의 과욕을 캐치하여 준비를 해 두는 사람이었다.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가 상대의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거나, 주었던 도움을 앗아 가는 방식으로 주도권을 쥐었다.

서용호는 꿈에도 모르고 있지만, 서용호가 건설과 중공업 지분을 담보로 신나게 받아 간 돈은 우현희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이중 삼중으로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준비해 둘게요.”

문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 *

디저트가 나간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테이블 근처에 있는 직원이 송주연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었다.

송주연은 화장실로 향했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스카프가 비뚠 곳 없이 잘 매어졌는지를 확인했다.

후, 이게 뭐라고 매번 긴장이 되는지. 긴 숨을 내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4년 전이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해가 뜨거웠던 날.

중복을 맞아 특별 메뉴를 선보이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날에 예약 손님 리스트에서 서문도라는 이름을 보았다. 나타날 때까지 설마설마했었는데, 보는 순간 알았다.

차에서 내려 성큼 다가오는 부회장의 아들은 키가 크고 늘씬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그대로 받은 얼굴이 눈부셨고,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걸음걸이가 더없이 오만했다.

혼자 앉은 서문도가 태연히 주문을 하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송주연은 3층의 사무실에 있었다.

‘사장님, 손님께서 인사를 드리고 싶으시대요.’

직원이 노크를 하고 말을 했을 때, 설마 서문도일까 생각하며 나갔었다. 그래도 설마 제 아버지의 내연녀에게 대놓고 인사를 청하는 아들이 있으랴 싶어서.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태양을 지고서 걸어오는 것 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을.

‘서문도입니다.’

남자는 악수를 청했다. 긴장으로 떨리는 주연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은 뒤 명함을 내밀었다.

‘식사 맛있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냥 얼굴 한번 보러 왔겠거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가 누군지 모르는 척 희연의 사장으로서 접객을 하고 보냈었는데, 몇 달 뒤에 다시 예약을 한 서문도는 우현희 대표와 함께 나타났다.

그날의 당황을 심경으로 적자면 책이 한 권이다.

그제야 부랴부랴 나는 어쩌냐고 서중호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고, 뭘 어쩌냐고 심기 거스르지 않게 최선을 다해 모시라는 소리를 들었다.

옷매무새를 점검한 송주연은 문도의 자리로 다가가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로 우현희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식사는 어떠셨어요? 마음에 드셨어요?”

“맛있었어요. 삼계 소스 곁들인 전복구이가 특히. 디저트도 좋았습니다.”

서문도가 강렬한 태양을 닮았다면 우현희는 북악산 바위 같다고, 송주연은 생각했다. 담담하고도 강한 눈빛이 특히 그랬다.

“좋은 시간 보내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언제든 다시 찾아 주시면 기쁘게 섬기겠습니다.”

가슴께에 손을 모은 송주연이 깊이 인사하는 모습을 문도는 바라보았다.

그 속으로 씨발 씨발 욕을 하고 있을지, 정말로 마음 다해 섬기는 것인지 문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방문의 목적은 상대를 긴장시키는 것에 있으니.

“살펴 가세요.”

살가운 표정으로 문 앞까지 인사를 나오는 송주연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온 문도는 주차된 차 앞으로 가며 물어보았다.

“기분이 어떠세요?”

우현희가 희연을 방문한 횟수는 몇 번 되지 않았다. 워낙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 어머니였지만 오늘은 문득 궁금했다.

“무슨 기분?”

“세컨드한테 인사받는 기분.”

우현희가 피식 웃었다.

“기분이랄 게 있겠니. 나는 나대로, 저이는 저이대로 살아가는 거지. 나한테 사업이 최우선인 것처럼 저이한테는 네 아버지가 우선인 것을.”

“우리 어머니가 참, 인격자시고.”

“인격자였으면 굳이 여기 왔겠니. 그냥 편히 살게 뒀겠지.”

우현희가 주차장 너머로 보이는 녹음 진 산을 바라본 뒤에 문도에게 물었다.

“너는?”

“저는 뭐요?”

“너는 뭐가 우선이니.”

제일 앞선 것.

어머니에게는 서도 금융의 근간인 우신 파이낸스. 송주연에게는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서도 그룹 회장 자리.

최우선인 것.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두 번 생각할 것 있나. 문도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저는 제가 제일 중요하죠.”

우문에 현답이로구나. 우현희가 웃으며 말했다. 누구든 자기 자신이 제일로 중하겠지.

“어머니는요?”

어머니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우현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뜻밖의 대답에 문도는 눈썹을 들었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대답을 내놓은 우현희가 피식 웃으며 차에 올랐다. 녹음이 짙은 여름날의 오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