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본분을 잊지 않는 자세
“선우 씨, 괜찮아?”
시야에 불쑥, 옥수댁 아주머니의 얼굴이 들어왔다. 젓가락을 쥐고 있던 선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네.”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먹고서 별채 건너가야 한다며. 얼른 한술 더 떠.”
먹은 그릇을 챙겨 들고 일어서는 옥수댁을 보면서 선우는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잠깐 멍했어요. 약을 먹어서 그런가 봐요.”
“병원에선 뭐래?”
“신경성 두통이래요. 약 먹으면 괜찮아진다고요.”
최지상과 헤어진 뒤 혹시 몰라 실제로 병원에 들렀다. 두통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처방전도 받고 약도 타 왔다.
“그렇지. 두통 있고 그러면 속도 별로 안 좋고 그렇긴 해. 약 잘 챙겨 먹어.”
“네. 저도 그만 먹어야 할까 봐요.”
선우도 절반 정도 밥이 남은 그릇을 챙겨서 일어났다. 수돗물을 틀어 한 번 헹군 뒤 설거지통에 넣었다.
“전 그럼 올라가서 준비하고 건너갈게요. 잘 먹었습니다.”
옥수댁에게도 조리사 아주머니에게도 꾸벅꾸벅 인사를 한 뒤에 선우는 계단을 올랐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다.
최지상과 헤어진 뒤로 울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멈추어 서서 심호흡을 했는지.
병원에서 대기를 하는 동안에, 약국에서 약을 받고 나오던 길에, 숙소동 언덕길을 올라오는 동안에도 눈시울은 몇 번이나 시큰거렸다.
제일 위험했을 때는 옥수댁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았을 때였다.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다며, 김치찜이 맛있게 되었으니 어서 먹자고 했을 땐 정말이지 애써 웃었다.
후우.
선우는 다시 길게 숨을 쉬었다. 지금까진 그래도 나았다. 이제는 서유라를 보러 별채에 가야 한다. 그 얼굴을 마주 보고서 웃어야 했다.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을까.
그러다 쓰게 웃었다. 할 수 있어야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오늘만큼은 마주 보고 싶지 않은 서유라였지만, 그래서 잠깐 아프다 핑계를 대고 피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죽은 민우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피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싶어서.
문을 잠근 선우는 책상에 앉아 다이어리를 꺼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적어 둔 이야기들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엑스자를 친 이름들도 있고 펜으로 그은 문장들도 있었다.
한 장씩 넘기며 보던 선우의 시선이 페이지 가운데 적혀 있는 문구에 머물렀다.
‘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에, 카페에 앉아서 민우의 일을 제보해 주겠다던 사기꾼을 종일 기다렸던 날이 있었다.
숱하게 속았어도 다시 속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날.
마지막으로 믿어 보자는 마음으로 입금까지 해 주고서 기다렸다.
10분이 한 시간으로, 한 시간이 두 시간으로, 두 시간이 네 시간으로.
그렇게 기다림이 원망으로, 원망이 절망으로 변해 갔던 날.
그날 집에 돌아와서 보았던 어느 방송의 자막이었을 거다. 스쳐 가는 문구가 마음에 아프게 박혀서, 울면서 적어 두었다.
‘가려지지 않는 진실.’
선우는 마지막 장을 펼쳤다.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적었던 문장은 ‘서문도 전무가 서유라를 앰뷸런스에 태웠다.’라는 문장이었다.
펜을 들고서 선우는 ‘최지상은 그 자리에 있었다.’라고 적었다.
마침표를 찍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게 입술을 깨물고서 다시 펜을 움직였다.
‘민우는 살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운데 글자 위로 선우의 눈물이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글자가 까맣게 번지는 것을 보며 선우는 급하게 눈물을 닦았다.
울지 않기로 했잖아.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눈물을 밀어냈다.
눈물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니 우는 것은 제일 마지막에.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민우야, 너는 부디 살아 있지 않았기를.
오래 고통스럽지 않았기를.
선우는 간절히 바랐다.
* * *
밤의 정원을 걸어 별채로 가는 길,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밤의 냄새가 가득한 바람이 선우의 뺨을 스쳤다.
‘들어와 있어요.’
자정에 가까운 시간. 남자는 건너오라는 말 대신에, 들어와 있으라고 했다.
끝이 풀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마도 많이 피곤한 날일까. 선우는 짐작을 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가볍게 노크를 한 뒤에 한 뼘 정도 열려 있는 2층의 중문을 밀었다.
거실에도, 맞은편의 커다란 드레스룸에도 서문도 전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드레스룸 한쪽에 던져 놓은 재킷과 와이셔츠. 테이블 위의 생수병. 화면이 틀어져 있는 TV 정도가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었다.
씻는 중일 거라 짐작을 하며 선우는 천천히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따로 문이 달려 있지 않고 커다란 아치형의 오픈된 입구만이 있는 드레스룸은 언젠가 보았던 신사복의 매장 같았다.
벽면을 둘러싼 오픈 클로젯에 셔츠가, 재킷이, 슈트 팬츠가 종류별로, 계절별로, 색상별로 열을 맞추어 걸려 있고 중간중간에 넓고 긴 서랍장들이 있다.
천천히 돌아본 선우는 가운데의 진열장 앞에 섰다. 몇 번인가 서문도 전무의 손에 의해 앉혀졌던 곳이다. 차가운 유리 위에 앉아서 남자의 입술을 받았던 곳.
6인용 테이블 정도로 사이즈가 큰 진열장의 제일 위쪽은 두툼한 유리로 덮여 있다.
안쪽으로 시계와 타이, 커프스링크 등의 액세서리가 칸칸이 들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유리 진열장의 아래는 원목의 서랍이 두 칸. 그 밑에는 여닫이로 여는 수납장이 있었다.
언젠가는 여기를 뒤져 봐야 할 텐데. 그게 언제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열장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릴 때였다.
“왔어요?”
서문도가 마스터룸을 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아, 네.”
선우는 진열장에서 한 발 물러서며 대답을 했다.
“거기서 뭐 해.”
서문도가 걸어오며 선우에게 물었다. 검은 머리카락, 흰 피부, 선이 뚜렷한 붉은 입술이 샤워를 마친 후라 그런지 더욱 선명히 대조되어 보였다.
“그냥……. 구경했어요.”
선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서문도를 보면서 대답을 했다. 선우의 앞에 서문도가 섰다. 눈으로 선우의 얼굴을 훑고는 가볍게 웃었다.
“무슨 구경.”
“넥타이랑 시계랑.”
말을 하는 선우에게 서문도가 고개를 내렸다. 순식간에 입술이 빨려 들어가며 아래위로 포개어졌다.
“또?”
고개를 틀어 다른 각도로 입을 맞추어 오며 서문도가 물었다.
“또…….”
걸려 있는 옷의 안쪽 주머니들. 칸칸의 서랍들. 서랍 속의 박스들. 민우의, 최지상의 핸드폰이 들어 있을지도 모를 장소들.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
“넥타이핀이랑…….”
대답을 하면서 선우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서문도의 목에 팔을 두르며 내려오는 남자의 입술을 받았다. 맞물리는 입술을 머금고 있다가 살짝 빨아당기자 남자가 나지막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입술이 삼켜졌다.
붙었다 떨어지고, 다시 붙었다 떨어지면서 점점 더 깊이 섞이기 시작했다.
깊게 더 깊게 파고드는 문도의 혀를 받으며 선우는 결국 숨을 내어 주듯이 입을 벌렸다.
깊이 들어온 혀는 선우의 안을 부드럽게 유영하다가 엉망으로 휘저었다. 한 번씩은 아프게 빨았다가 살살 달래 주기도 했다.
하아.
긴 키스가 끝났을 때 선우는 예전의 어느 날처럼 진열장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욕심껏 선우를 마신 남자가 상기된 선우의 얼굴과 부풀어 오른 입술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맥이 풀린 선우는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유라 씨는 오늘.”
보고를 시작하려는 선우의 말에 문도가 웃었다. 남자의 몸에 낮은 진동이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선우도 웃었다.
“본분을 잊지 않는 자세, 좋은데요.”
귀를 통해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선우는 기댔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남자가 선우의 양옆으로 팔을 짚었다. 살짝 몸을 굽혀 선우와 시선을 비슷하게 맞춘 남자가 묻는다.
“병원은?”
“잘 다녀왔어요. 감사합니다.”
선우의 대답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갈색 눈을 바라보다 물었다.
“전무님은요?”
나? 라고 묻듯이 남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외라는 듯이 웃은 남자가 묻는다.
“전무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는 왜?”
“그냥……. 궁금해서요.”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선우는 답했다.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렸었다는 걸, 사실은 알았다.
약을 발라 주었을 때.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 어떤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그런 작은 친절에 마치 첫사랑을 하는 소녀처럼 그렇게, 마음이 흔들려 본분을 잊을 뻔했다.
최지상이 했던 수많은 거짓말 중에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눈앞의 남자에게 핸드폰이 있다는 것.
선우는 그 사실을 기억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당신과 더 가까워져야겠어. 아직 찾아야 하는 장소들이 많이 남아 있거든.
나는 꼭 민우 핸드폰을 찾을 거야. 찾아서 진실을, 그날의 진실을 알아낼 거야.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니까.
가만히 바라보자 서문도가 흠,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쉰 뒤에 말했다.
“8시에 팀장들이랑 커피 미팅. 오전에는 사장 주재 임원 회의했고, 태정 모비스랑 미팅 겸해서 점심 먹었고, 오후부터 저녁까지 이노베이션 포럼 준비.”
거기까지 딱딱하게 말하다 웃는다. 피곤이 살짝 드리워진 눈동자로 선우에게 물었다.
“더 할까요?”
선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위기 다 깨놓고. 좋아요?”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선우는 다시 한번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웃음이 사그라든 뒤에는 말없이 남자를 보았다.
선우는 남자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머뭇머뭇 남자의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서문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선우는 표정이 거두어진 남자의 뺨을 느리게 쓸었다. 뺨을 쓸고 다시 쓸었다가 꼬리를 그리듯이 손끝을 귀로 이었다.
귓바퀴를 부드럽게 만지는데 남자가 피식 웃었다. 어쩌면 가소롭다는 듯이, 어쩌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서문도의 웃음에 선우의 동작이 멎었다.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내린 남자는 선우를 뚫어져라 본다. 피하고 싶을 정도로 강한 눈빛이었다.
선명한 검은 동공. 신비로운 금갈색의 홍채. 뚜렷한 경계를 그리는 테두리. 빛나는 태양을 닮은 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겁 없네. 오늘따라.”
말을 하는 서문도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아름다운 남자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몹시 위험한 남자라고도 생각한다.
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난다 해도. 형체 없이 부서져 망가진다 해도.
선우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남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