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45화 (45/168)

45. 금요일의 만남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쓴 지상은 ‘효자 묵밥집’의 문을 열었다.

막걸리 주점과 비슷한 분위기의 묵밥집은 홀에 있는 몇 개의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일식집처럼 칸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선우 씨 이름으로 예약했다는데요.”

지상이 말하자 카운터를 보던 직원이 이쪽으로 오시면 된다면서 안내를 해 주었다. 한지를 발라 놓은 미닫이문이 열리며 안쪽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를 보며 지상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림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분위기가 꼭 그림 같았다.

슬쩍 벌어지려는 입을 단속을 한 뒤, 지상은 물러나는 직원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미닫이문을 닫고서 싱긋 웃으며 선우에게 인사를 했다.

“최지상입니다.”

“이선우예요.”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여자는 지상의 손을 바라보기만 하다 그냥 자리에 앉았다.

“흠흠. 음식을 시켜야겠죠? 어디 보자. 오는 길에 묵밥 검색해 봤거든요? 묵정식이 괜찮다는데. 묵정식 2인분 괜찮으세요?”

지상은 자리에 바짝 앉으며 물었다. 이선우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았다. 갸름한 얼굴이 기억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SNS 계정에 올려놓은 사진은 짙은 무대용 화장을 한 상태이거나 멀리서 연습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라 정확한 얼굴은 보지 못했었다.

서유라와 짬짬이 통화를 할 때 언뜻 보이긴 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수준이어서, 대략 이런 느낌이려니 생각만 했었는데. 여자를 본 순간 말문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나.

봐도 봐도 모르겠는 미술 전시회를 좋아할 것 같은. 수준 있는 책도 많이 볼 것 같고,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연할 것 같은.

“잠깐 외출한 거라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요. 이야기부터 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조차 차분한 여자는 맑은 눈빛으로 또렷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럼 일단 주문부터 할게요.”

벨을 눌러 직원에게 묵정식 2인분을 시킨 뒤, 지상은 수저통을 열어 숟가락과 젓가락을 여자의 앞에 놓아주었다.

직원이 나간 뒤 최지상은 싱긋 웃으면서 선우에게 말했다.

“드디어 만났네요. 뭔가 좀, 운명 같다.”

지상의 말에 선우는 웃지 않았다. 다만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 갈 뿐이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뭐든 물어보세요.”

“그날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하고 최지상은 기억을 더듬는 척했다. 긴장한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착잡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날이 2월…….”

“5일이에요. 토요일이요.”

“그렇죠. 그때였는데…….”

뜸을 들이니 여자가 입술을 맞다물었다가 마른침을 넘긴다. 간절함을 숨기지 않는 여자였다. 사건을 빌미로 꼬여 내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상은 입을 열었다.

“유라 누나가 한 번씩 그런 날이 있거든요. 룸 잡고서 에이전시에서 잘나가는 애들 몽땅 불러 놓고 파티 열 때가 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어요.”

지상은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클럽 오픈하는 시간부터 룸 잡고서 노는 거죠. 영재도 그중에 한 명이었고.”

“에이전시에서 잘나가는 애들이라면…….”

“네. 더블 에이전시라고.”

겉으로는 모델 에이전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더블 에이전시는 사실상 호스트 매니지먼트였다.

잘생기고 젊은 남자애들, 특히나 연예계 지망생들을 꼬여 내서 스폰서와 연결을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클럽에 꽂아 넣기도 하고 아래층의 가라오케에서 접대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최지상 역시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서유라를 만났다. 단역 배우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었던 그를 서유라가 영화 조연으로 꽂아 주었고, 그게 화제가 되어 지금의 최지상이 되었다.

서유라는 한 번씩 핫하다는 클럽 VVIP룸을 잡아서 호스트들로 가득 채울 때가 있었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제게 잘 보이려 안달 내는 모습을 보면서 술을 뿌리고 발로 밟으며 놀았다.

흥이 절정으로 향하는 새벽 3시쯤이면, 쭉정이는 떨구고 개중 제일 괜찮은 한두 명을 데리고 밀실로 올라가 섹스 파티를 벌였다.

“저는 스케줄이 있어서 좀 늦게 들어가긴 했어요. 애들은 밖에서 놀라고 내보내고 밀실로 들어갔죠. 남자애 둘이랑 유라 누나랑 있더라구요. 아, 그땐 멀쩡했어요.”

물론 거짓이다. 파티 후에 밀실로 올라간 건 서유라와 최지상, 김영재였다.

김영재에게 합류를 제안한 건 처음이었는데,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고 에이전시 소속이기도 해서 당연히 약을 찔러 본 경험이 있는 줄 알았었다. 한 번도 안 해 봤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경찰에 증언하시기로는 민우 죽고 나서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이선우가 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지상은 비장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이미 두 사람이 그렇게 된 뒤에 룸에 들어갔다고 증언을 하긴 했는데, 사실 제가 들어갔을 땐 두 사람 모두 살아 있었습니다.”

꿀꺽.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최지상은 말을 이었다.

“제가 신인인 데다 찍고 있는 프로그램도 있고 해서, 솔직하게 말 못 했어요. 연예인이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니까……. 뭐, 그건 제 잘못이죠. 제 잘못 인정하구요.”

지상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무튼 한 명은 영재였고, 다른 한 명은 영재 친구라고. 처음 보는 애였는데, 몸도 괜찮고 얼굴이 잘생겨서인지 유라 누나가 마음에 들어 했대요. 아무튼 그래서 일단 약을 찌르고서 시작을 했는데. 올라오기 전에 둘이 싸웠던 모양이죠?”

이선우는 미동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게 그런 게 있거든요. 약을 하면 감정이 훅 올라와요. 침대에 한창 유라 누나랑 있는데 뒤에서 둘이 뭐라고 다투더니 갑자기 퍽 소리가 나는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니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다.

“보니까 영재가 그 친구 머리를 샴페인 병으로 깠더라고요. 넘어진 친구는 테이블에 부딪혔는지 피도 나고.”

여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가시는 것을 보며 최지상은 이야기를 이었다.

“저는 119 부르려고 했는데, 유라 누나가 신세 조질 일 있냐며 지랄 지랄을 해서. 아시죠? 그 성깔. 전 어떻게 수습을 해 보려는데 영재 이 새끼가 그 친구한테 남은 약을 확 찔러 버리더라구요.”

하얗게 질려 버린 이선우를 보며 최지상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약이 진짜 조금만 들어가도 훅 가는 거라서 용량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건데, 그걸 그렇게 한 방에 전부 넣었으니.”

실제로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김영재야 본인의 선택으로 약을 찔렀다가 죽었다지만, 이민우는 아니었으니까.

이민우가 얌전히 문 앞에 샴페인을 놓고 갔더라면.

무언가를 의심하며 제 친구인 김영재를 보겠다고 기어코 문을 열어 보지만 않았더라면.

의식 잃고 쓰러진 김영재를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면.

119를 부르겠다고 설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이 대가리를 후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겁도 나고, 엮이기도 싫어서 저는 그대로 자리를 떴습니다. 유라 누나는 서문도랑 변호사를 불렀고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영재도 약물 부작용으로 같이 죽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직원들이라도 발견해서 병원에 보내 주기를 바랐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최지상은 두 손을 모아 움켜쥐면서 사과를 했다. 하얗게 질린 여자는 말이 없었다. 주먹을 꾹 쥐고서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뜬다.

“몇 가지 의문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일찍 자리를 뜨셨다는데, 핸드폰은 왜 서문도 전무에게 있는 거죠?”

아.

씹. 최지상은 속으로 욕을 하며 미간을 문질렀다. 생각을 좀 더 깊이 했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를 하며 장 변호사가 알려 주었던 대로 분실 이유를 댔다.

“유라 누나가 불안증이 있어요. 누가 자기를 찍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약 하는 거 찍었다가 경찰한테 넘긴다는 망상이 있어서 그 방에 들어올 때 핸드폰을 다 거둬 가거든요.”

“안 챙기고 그냥 나오신 거예요?”

“예. 그땐 그냥 빨리 나와야겠다는 생각에……. 그걸 그 남자가 한 번에 챙겨 갔다고 유라 누나가 알려 줬습니다.”

이선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범인 사진을 찍으셨다는 말은, 거짓인가요?”

제길. 생각 좀 잘 하고 말할걸. 또 뭐라고 둘러대냐. 지상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선우를 보면서 고민을 하는 척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마침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직원이 쟁반을 들고 룸으로 들어왔다. 도토리묵과 막국수, 묵전 같은 음식들이 상에 깔렸다.

그사이 생각을 정리한 최지상은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 참담한 표정으로 선우에게 말했다.

“네. 거짓입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핸드폰을 가져올 수 있을까 싶어서 생각을 하다가. 하지만 아주 거짓은 아니에요. 영재와 같이 찍은 사진이 있거든요.”

“서문도 전무 사진은 어디서 나셨어요?”

“그건 제 차 블박에 찍힌 겁니다. 그날 그렇게 나와서 한참 차에 있었거든요.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댔었는데, 한 시간쯤 뒤였나. 그 남자가 주차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이 서문도 전무인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아이, 씹.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네. 최지상은 인상을 찌푸린 뒤 다시 머리를 쥐어짰다.

“그야, 워낙 유명한 사람이고. 유라 누나 관련된 사람이라서 알고 있었죠. 뉴스 같은 데 많이 나오잖아요.”

납득을 했는지 이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최지상 씨 말에 의하면, 경찰 말대로 영재가 제 동생을 죽인 거네요. 서유라 씨와 최지상 씨는 한 방에 있었던 것뿐이고. 최지상 씨가 먼저 자리를 떴고, 서유라 씨는 변호사 대동하고 경찰서로 갔고, 영재는 약물 부작용이었고요.”

최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영재가 자살한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정신 나가서 일은 저질렀는데 정신 차려 보니 아무도 없고, 친구는 죽어 있고. 금방 잡혀갈 것 같으니 남은 약을 넣은 게 아닌가 싶어요.”

얕게 고개를 끄덕인 선우가 한참 가만히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은…….”

이선우는 목이 메는지 입을 다물었다. 잠시 감정을 수습한 뒤에 다시 입을 연다.

“그때 살아 있었나요?”

최지상은 완전히 숨이 끊어진 이민우의 모습을 기억했다.

치사량의 약과 후두부의 상처로 이민우는 빨리 죽었다. 어쩌면 김영재보다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다. 고통은 없었을 거다. 약발이 워낙 좋아서.

“네. 적어도 제가 나올 땐 살아 있었습니다.”

최지상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이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역시나 참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을 하며 최지상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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