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괜찮겠지
선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날이 밝고 있는지 창밖이 벌써 환했다. 옆으로 누웠던 선우는 몸을 바로 누이며 핸드폰을 더듬었다.
액정 위의 시계는 5시 반.
눈을 뜨는 건 매일 비슷한 시간이었다. 긴 밤을 뒤척거리다가도, 짧고 얕은 잠에서 허우적거리다가도, 제법 긴 잠을 자고 일어난 뒤에도 이 시간쯤에 꼭 눈이 떠졌다.
눈을 뜨고, 다시 감는 날들.
매일 그대로인 것 같은데 시간은 착실하게 쌓여 간다.
이곳에 왔던 첫날, 창밖은 깜깜한 어둠이었는데 얼마 후 같은 시간엔 짙푸른 새벽이었고, 이제는 환히 밝아 오는 이른 아침이었다.
몸을 일으킨 선우는 테라스로 나가는 섀시 문을 열었다.
청량한 새벽 공기가 밀려들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려왔다. 서울 한복판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다니. 조금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곳은 처음부터 다른 세상 같긴 했었다.
마을만큼 커다란 담장을 지닌 세 채의 집. 죽지 않는 괴팍한 노인과 그의 젊은 애인.
어쩌면 괴물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딸. 그리고 그 괴물의 목줄을 쥐고 있는 별채의 남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곳. 그래서 왠지 선우 자신도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은 곳.
‘돌겠네.’
뜨거운 욕설을 뱉으며 낮게 웃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꿈 같지만, 꿈이 아니었던 지난밤의 목소리였다.
몸을 돌린 선우는 남자의 목소리를 쫓아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침대 위의 시트를 펄럭 펼쳤다.
베개를 똑바로 놓고 시트의 각을 맞추었다. 침대 정리를 마친 후엔 매트를 깔고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몸의 구석구석을 깨웠다. 동작에 집중하려 노력하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순서대로 움직이는데, 다리 사이에 아릿한 작열감이 느껴진다. 역시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으니 남자가 남겨 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가슴과 배, 허벅지와 옆구리, 비스듬히 보이는 어깻죽지까지. 손톱만 한 붉은 조각들이 있었다.
선우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얼굴은 그대로인데……. 마치 다른 사람같이 낯설었다.
달뜬 신음을 흘리던 여자는 누구였을까. 뜨겁게 타는 눈에 매달리며 기꺼이 남자의 목을 안았던 여자는 내가 맞을까. 내 목소리, 내 얼굴을 한 다른 누구는 아니었나.
긴 한숨을 내쉰 뒤, 선우는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책상에 앉아 간단하게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드라이기를 꺼내서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워치를 차고 가방을 챙겨 놓으면 출근 준비는 끝이 난다.
출근 준비를 마친 다음에는 서랍을 열었다. 은박 포장이 되어 있는 분홍색의 알약이 보였다.
피임약을 먹은 지 한 달하고도 절반이 넘어갔다. 선우는 서랍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뒤로 넘겨 보았다. 꼬박꼬박 엑스자를 그린 날들이 보였다.
남자와 밤을 보낼수록,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남자의 저질스러운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입맞춤을 기다리기도 한다.
‘혀 내밀어요.’
시키는 대로 혀를 내밀기도 했다. 처음으로 남자의 입속에 자신의 혀를 넣자 남자가 낮게 웃었다.
씨발, 돌겠네. 중얼거리면서 붉은 혀를 집어삼키는 남자는 이내 선우의 밤을 온몸으로 덮었다.
남자가 몸을 세우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선우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 신음하며 붉어질 뿐.
그런 날이면 밤이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막막하지도 않았다. 남자의 열기가 번져 오는 동안은 잠깐이나마 춥지 않았다.
파르르한 떨림이 찾아온 이후에는 잠이 쏟아져 내리기도 했다. 조금씩 잠이 길어진 것도 남자에게 안긴 이후였으니.
‘좋네요. 집에 일찍 오니까. 같이 밥도 먹고.’
그러다 한 번씩 남자의 선선한 미소가 생각이 날 때면.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던 순간이 생각날 때면. 최지상이 보내왔던 사진을 떠올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 오르던, 호텔 주차장에서의 남자를.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을 한다. 좋은 사람은 아닐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 있을 남자이니까.
‘계산은 확실한 게 좋죠.’
당신에게 이선우라는 여자는 그저 욕망을 풀 대상일 뿐이니.
그러니 나도 밤의 공허를 채우는 용도로, 막막함을 지우는 용도로 당신을 한 번씩 이용을 한다고 해도.
괜찮겠지.
절반쯤 비워진 알약을 잠시 바라보다가 선우는 한 알을 손에 올린 뒤 입에 털어 넣었다. 책상 위에 두었던 생수병을 따서 물과 함께 삼키고,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날짜에 엑스자를 그렸다.
다이어리를 서랍 속 깊은 곳에 잘 넣은 선우는 크게 숨을 마셨다.
1층의 주방에서 간단하게 우유와 시리얼로 식사를 한 뒤, 다시 올라와 이를 닦고 가방을 챙겼다.
소박한 숙소동의 정원을 지나서 별채의 푸른 잔디를 밟았다. 건물을 반 바퀴 돌아서 정문의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드를 찍어서 문을 연 뒤에 신발을 벗었다. 한쪽에 가지런히 두고서 현관 위로 올라섰다. 커다란 창이 압도적인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향하면.
“잘 잤어요?”
남자가 있었다.
선우의 밤을 채우는 남자가.
“네. 전무님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를 건네자 남자가 가볍게 웃는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슬레이트를 치는 박수 소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도로 위에 서 있던 최지상은 큐 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김소리! 소리야!”
지상은 여주인공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면서 2차선 도로를 달렸다.
수목원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지상이 맡은 역할은 여주인공을 오래도록 짝사랑해 온 선배 역할이었다.
“너 인마, 지갑 놓고 갔다고.”
한참 멀어진 여주인공을 따라잡은 뒤 숨을 몰아쉬면서 환하게 웃는 지상의 모습을 카메라가 가까이에서 잡았다.
지상은 눈앞에 있는 여배우를 녹을 것처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선배. 고마워요. 역시 정원 선배뿐이야. 어? 유준 씨 왔나 봐요. 저 그럼 이제 가 볼게요.”
주연 남자 배우가 길 건너에 차를 세웠다. 여배우는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며 한 번 더 뒤를 돌았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는 여자에게 환하게 미소를 보인 뒤, 지상은 돌아서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지상의 아픈 미소가 텅 빈 도로와 함께 쓸쓸하게 잡히며 점점 작아졌다.
“컷!”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컷을 외쳤다.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던 지상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촬영 감독과 카메라 감독에게 고생하셨다며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아, 표정 좋았어. 지상 씨 연기가 날로 늘어. 이러다 금방 주연 자리 잡겠어.”
등을 두드려 주는 감독에게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저 괜찮았어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직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요.”
“어, 아주 좋아. 서울에 언제 올라간댔지? 내일 아침이었나?”
“네. 내일 새벽에 올라갔다가 인터뷰만 얼른 하고 다시 오려고요.”
세트장과 문경 야외 촬영장을 오가기를 한 달 남짓, 촬영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내일은 장면 없으니까 마음 편히 다녀와.”
“넵. 부족하지만 민폐 안 되게 노력하겠습니다!”
씩씩하게 인사를 한 뒤, 지상은 자신의 차량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자신이 나오는 장면은 한참 뒤에나 다시 촬영이었다.
“형, 고생했어요.”
차에서 대기 중이던 매니저가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성원아, 나 커피 한 잔만.”
싱긋 웃으며 부탁을 하니 매니저 성원이 기꺼운 얼굴로 얼른 다녀오겠다고 말을 했다. 지상은 차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병신들.”
의자에 등을 기대며 지상은 중얼거렸다. 비위를 슬쩍슬쩍 맞추며 어리숙한 척하기만 하면 뜨는 배우답지 않게 착하다, 성실하다, 멋있다, 칭찬이 날아든다.
이래서 뜨고 보는 거지.
눈에 띄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호스트바의 선배들 비위를 비굴하게 맞추어 가며 한 테이블이라도 더 끼어서 앉아 보려고 노력을 했던 시절이.
같이 앉는 놈들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몸부림을 쳤었는데. 그 시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랄까.
“어디 보자.”
지랄 지랄을 해 대는 서유라만 아니면 팔자가 좀 더 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지상은 핸드폰을 찾았다.
다행히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 하긴 이 새벽부터 일어날 리가 없지.
“휴대폰만 아니면 그만 만나고 싶다, 진짜.”
약이건 섹스건 적당히 조절해 가며 해야 하는데 서유라는 절제라는 것을 몰랐다. 끝을 보는 성격이랄까. 하긴 그 덕에 살살 꼬여 내기는 쉽지만.
지상은 가방 안쪽에서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 이선우라는 여자와 연락을 하기 위해 구입한 선불폰이었다. 새로운 메시지 알람이 떠 있다. 화면을 누르니 대화창이 뜬다.
[11시, 한남동에 있는 효자 묵밥집에서 뵐게요. 3번 방으로 예약해 두었습니다.]
범인 사진이 있다고 씨불여 놨는데, 만나면 뭐라고 하나. 지상은 핸드폰을 쥐고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니 동생 죽인 건 서유라라고 하는 게 나을까. 경찰에 말했던 대로 김영재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그래. 둘이서 약에 취해 싸우다 김영재가 이민우 대가리를 갈긴 게 맞다고 해야겠다.
그 자리에 없었다는 건 사실 거짓이었다고. 목격은 했는데 연예인이라 조심스러워서 그랬다고.
그리고 열 받은 김영재가 이민우에게 죽을 정도로 약을 찔러 넣었다고 하면 되겠지. 119를 부르려 했는데 서유라가 신세 조질 일 있냐고 지랄을 했다고.
제일 먼저 그 자리를 뜬 건 나였고, 그때까지 니 동생은 살아 있었다고. 그다음으로 서유라가 서문도와 함께 탈출. 멀쩡했던 김영재는 약물 부작용으로 사망.
오케이.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최지상은 핸드폰을 들어서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넵, 늦지 않게 갈게요. :)]
서유라와 통화를 할 때면 언뜻언뜻 보였던 이선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나서 마음에 들면 꼬셔 볼까. 그래, 꼬셔서 일단은 핸드폰을 찾는 데 알차게 이용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상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