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가르쳐 주세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이선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네, 하고서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건너올래요?”
문도는 선우에게 물었다.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며 문도는 선우에게 물어보았다.
인지하고 있는 변화, 하나.
건너와요가 아닌 건너올래요. 여자에게 의사를 묻는다. 얼마든지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 네, 건너갈게요.
이선우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한 번도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선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남자와 섹스를 하기 위해서 건너오는 여자의 목소리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만큼.
고요한 목소리라고 생각을 했다.
고요한 목소리라니. 소리가 고요할 수 있는가. 말이 되지 않는 말이라고 문도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2층에 도착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문도는 거실의 창가로 갔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 정원의 나무는 무성해졌다.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 이름 모를 풀벌레가 찌르르르— 우는 소리를 내었다.
잠시 후, 멀리 보이는 숙소동 현관문에 센서등이 켜졌다. 이선우의 모습이 밝은 등에 비추어졌다가 다시 어둠에 잠겨 들었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는 정원에 이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숙소동 정원을 건너, 붉은 장미가 저물어 가는 아치형의 문을 지난다.
초여름의 밤공기를 가르는 발걸음이 소리 없이 우아했다. 여자의 걸음걸음에 밤이 저절로 길을 열어 주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만큼.
문도는 안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냈다. 어쩌다 한 번, 피곤에 짓눌린 것 같을 때나 피우는 담배인데 여자를 보면 담배가 당겼다.
이유는 모른다. 숨을 깊게 마셨다가 길게 내뿜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느낄 뿐이다.
달칵, 라이터에 불을 붙이며 여자를 보았다. 가로등 둥근 불빛에 비친 여자는 흔들림이 없이 걸었다.
숨을 길게 내뿜자, 여자는 마치 흰 연기를 가르며 걷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조차 고요하다 느꼈던 이유를 알았다. 이선우가 고요하기 때문이었다. 움직이는 순간조차 흔들림 없이 우아했기 때문에.
문도는 피곤한 웃음을 웃었다.
인지하고 있는 변화, 둘.
여자를 수식하는 말들에 주관적인 감정이 섞였다. 이전이었으면 조용하다고 했을 것이다. 소리가 별로 없는 여자라고. 전직 무용수다운 걸음걸이라 했을 것을.
시야에서 이선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물었던 담배를 몇 모금 더 마신 후 재떨이에 비벼 끌 때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도는 진열장 쪽으로 걸어가며 여자에게 대답을 했다. 여자가 문을 밀며 들어왔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문도를 보고는 상사의 방에 들어온 직원처럼 묵례를 한다.
“보고하세요.”
타이를 끌어 내리는 문도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이선우가 알겠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예의 그 고요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서유라 씨는 오늘 오후 1시쯤 일어나셨어요. 아침 겸 점심으로 간단하게 샐러드하고 토스트 드셨고, 오후에는 작은 사모님이랑 마사지 받으러 가신다고 나가셨어요. 저녁 드시고 8시쯤 들어오셨고요.”
차분히 보고를 하고 있는 이선우는 늘 비슷한 자리에 서 있었다. 중문과 거실, 드레스룸의 중간 어디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러니까…… 보고를 하기에 딱 좋은 위치에.
“저녁은 사모님과 마사지 받았던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드셨다고 하셨어요. 네일 관리도 받으셨구요. 밤 10시에 최지상 씨와 영상통화를 하겠다고 들어가셨습니다.”
시계를 풀면서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선우가 시선을 빗기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내린 여자를 문도는 머리끝부터 천천히 훑었다.
갸름한 얼굴. 긴 목. 선이 고운 어깨. 가늘고 길게 내려오는 팔.
여자의 손목에 시선이 닿는다. 손목에 작은 타원형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문도는 끌러 내린 타이를 진열대 위로 올려놓으며 선우에게 물었다.
“이선우 씨는 뭐 했어요?”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들어서 문도를 본다. 마주 보는 눈빛이 투명하고 맑았다.
“저는…….”
오전에 건너와서 책을 읽었다고,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마시고, 점심으로는 콩국수를 먹었다고.
서유라가 오기 전까지 아주머니들을 도와서 열무를 다듬었다고 말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문도는 생각했다.
쭉 듣고 싶다는 생각도, 무슨 말이든 하게 해 놓고 품에 안고서 몸의 곳곳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못 할 것도 없지.
처음부터 욕구에 충실한 사이로 시작하는 관계가 좋은 점은 이리저리 재고 따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문도는 이야기를 마친 선우를 보며 물었다.
“목욕, 같이할래요?”
아, 하고 공기 방울처럼 소리가 터진다. 여자의 당황하는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을 한다.
하룻밤에 천만 원짜리 시계를 사 놓고 고작 목욕에 놀란 표정이라니. 이제는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욕망을 부추길 뿐이다.
인지하고 있는 세 번째 변화.
너그러워졌다. 여자에게, 꽤나 많이.
“목욕이요?”
“네. 목욕.”
“샤워가 아니고…….”
“목욕.”
문도는 뚜렷하게 발음을 했다. 입술을 씹는 이선우를 보면서 욕조에 기대 누운 채로 여자의 허리를 안는 상상을 했다.
아무 말이나 시켜 놓고는 말캉하고 부드러운 가슴을 쥐어야지. 선홍빛으로 예쁘게 물든 돌기를 한참 동안 비비적거려도 좋을 것이다. 비눗방울처럼 터지는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살내음을 실컷 맡을 수 있다면.
뜸 들이며 고민을 하는 여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시계가 걸린 손목을 쥐고서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아, 하는 소리는 없었다. 단지 눈을 크게 떠서 놀란 표정을 지을 뿐이다.
“뭘 놀라.”
말을 하니 눈만 깜빡인다. 서글서글하고도 깊은 눈이다. 나쁜 일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은 눈.
무구하게 깜빡이는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문도는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추는 순간에도 여자가 눈을 깜빡인다. 부드러운 속눈썹이 입술을 스쳤다.
“시계 잘 어울려요.”
입술을 뗀 문도가 말했다. 가는 손목에 걸려 있는 타원형의 시계는 클래식하고 심플하면서도 여성스러웠다. 이선우와 잘 어울렸다.
“감사합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에 여자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리고 문도와 눈을 맞춘 다음 또박또박 말했다.
“시계가 정말 예뻐요. 마음에도 들고요.”
여자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때. 그때 문도는 사위가 고요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아주 잠시지만, 부족한 것이 없어진 기분도 든다.
눈앞의 여자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몇 개 더 사요. 목걸이도 좋겠네.”
비어 있는 여자의 목을 보면서 말했다. 반짝이는 목걸이가 걸려도 예쁠 것 같았다. 깨끗한 귀에는 진주 귀걸이가 어울리겠다.
목걸이든 시계든 귀걸이든 얼마든지 사. 카드 사용 내역이 뜰 때마다 변태같이 흥분하게. 벌거벗은 몸에 하나씩 걸쳐 놓고 물고 빨게.
그런 문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이선우가 대답을 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목욕은?”
문도는 여자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아랫배를 붙여 자신의 상태를 전했다. 이선우의 얼굴이 옅게 붉어졌다.
“혹시 다음에 해도 될까요?”
허락을 구하는 사람처럼 이선우가 물었다. 이럴 때의 여자는 웃기고 꼴린다.
다음에 해요, 도 아니고 해도 되냐니. 선생님한테 허락을 맡는 학생 같지 않은가.
“왜요?”
“아주머니들이 아직 안 주무세요. 목욕을 하고 가면 아무래도…….”
“뭘 하시기에 아직까지 안 주무시나.”
“고스톱을 치고 계세요.”
문도가 웃었다. 자신이 한 말이 웃겼는지 선우도 웃었다. 문도는 마주 웃는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아랫입술을 물어 입안에 넣고 달게 빨면서 말했다.
“그럼 빨리하고 가야겠네.”
시원한 민트향과 다디단 살의 맛이 함께 느껴진다. 종일을 물고 빨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자의 팔을 들어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거듭 키스를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긴 키스의 끝에 여자의 몸이 출렁하고 침대 위로 뉘었다.
“대체 언제쯤.”
입술을 떼면서 문도는 말했다. 깊었던 키스로 뺨이 연한 장미색으로 상기된 선우가 문도를 올려다보았다.
“이선우 씨는 키스를 잘하게 될까.”
확 달아오른 이선우의 뺨이 붉다.
“제가, 못…… 하나요?”
“못 해요.”
“얼마나…….”
솔직히 나쁘지 않다. 서툴기도 하고 수동적이기도 했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았다. 그렇지만 더듬거리는 모습에 짓궂은 마음이 든다.
“솔직하게 말해요?”
“네.”
자신의 목에 팔을 감고서 순순히 대답을 하는 이선우가 눈에 아릴 정도로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답했다.
“더럽게 못 해.”
아, 하고서 여자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문도는 목까지 붉어진 이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잠이 든 모습을 보았을 때.
잠에서 깬 여자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 생각을 했을 때.
저녁을 같이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 점점 뚜렷해진다.
“그럼……. 가르쳐 주세요. 노력해 볼게요.”
뒷목이 뜨끈해지는 말에 문도는 선우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 안으로 혀를 깊이 넣다가 문득 멈추었다. 선우의 혀가 서툴게 움직이며 문도의 혀를 감싸 왔기 때문이다.
씨팔. 터지겠네.
후끈 열이 오르며 눈앞이 아득해진다. 문도는 기막힌 웃음을 웃고야 말았다.
고용인과 연애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이선우를 어쩔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