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곤드레밥
옻칠을 입힌 사각 트레이가 선우의 앞에 놓였다.
면기보다 조금 작은 백자 그릇에 고슬고슬하게 지은 곤드레밥이 담겨 있었다.
옆으로는 따뜻한 김이 오르는 된장국이, 위쪽의 자그마한 반찬 접시에는 양념장과 무장아찌, 낙지젓과 김치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상을 차려 준 양 집사가 물러가고 나자 문도가 선우에게 말했다.
“들어요.”
“네.”
선우의 대답에 남자가 먼저 양념장을 떠서 밥을 비볐다. 자신에게는 참 어려운 자린데, 남자는 태연해 보였고 심지어 편안해 보였다.
선우는 잠시 수저를 드는 남자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자세며 움직이는 동작들이 군더더기 없이 우아하다는 생각을 한다.
“곤드레밥 싫어해요?”
수저를 들지 않고 가만히 있자 서문도가 물었다.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했다.
“아니요. 좋아해요. 잘 먹겠습니다.”
선우도 양념장을 덜어 곤드레밥에 비볐다. 나물 향이 솔솔 풍기는 곤드레밥을 떠서 입에 넣은 선우는 따끈한 된장국도 한술 뜨고 시원하게 담근 김치에도 젓가락을 댔다.
“괜찮아요?”
“네. 맛있어요.”
고요한 다이닝룸에 그릇과 수저가 닿는 소리가 간간이 울렸다.
할 말이 있으니 식사를 하자고 했던 서문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용건을 꺼내기를 기다리던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식사하면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문도가 선우를 보더니 아, 그거, 라며 대답을 했다.
“없습니다.”
“네?”
“밥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그냥 한 말이지.”
선우는 어이가 없었다.
“먹어요. 맛있다며.”
선우의 시선을 느낀 서문도가 피식 웃었다. 남자의 미소가 가벼워서일까. 정갈하게 차려진 곤드레밥의 소박한 맛이 좋아서일까. 선우에게서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와 먹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
선우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양념장을 넣고 조금씩 비벼 가며 밥을 먹는데, 식탁을 건너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는 선우에게 문도가 물었다.
“그게 내가 사 준 시계인가요?”
“아, 아니요. 이건 핸드폰이랑 연결된 시계예요.”
평소 보고를 하러 올라갈 때는 풀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워치를 사용해도 되냐고 물어본 적 없으니 어찌 보면 몰래 차고 다닌 셈이다. 지레 찔린 선우는 설명을 덧붙였다.
“간단히 통화랑 메시지만 확인하려고 샀는데요. 마음에 걸리시면 빼고 오겠습니다.”
“긴장할 것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선우의 말에 답을 한 뒤 서문도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다음에 보여 주겠다는 말만 해 놓고 지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대충 골랐지만 천만 원이 훌쩍 넘는 시계였다. 고맙다 인사도 건네고 예쁘다 칭찬도 했어야 했는데.
다음에 보고를 하러 올 때는 잊지 말고 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서문도가 말을 잇는다.
“소개받았다고 했었나요? 서유라 트레이너 자리.”
“아, 네. 일하던 학원 원장님께서 소개해 주셨어요.”
“전에는 그럼 학원에서?”
가벼운 말투로 문도가 물었다. 적당한 관심이 섞인 의례적인 질문에 선우도 선선히 대답을 했다.
“네. 아이들 가르쳤습니다.”
“애들이 좋아했겠어요.”
“그렇다기보다 제가 애들을 많이 예뻐했어요.”
“그랬을 것 같아요. 서유라한테 하는 거 보면.”
뭐라 대답을 하기 애매한 선우에게 남자가 말했다.
“많이 먹어요. 부족하면 말하고.”
“네. 감사합니다.”
선우는 대답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맛깔스러운 곤드레밥도, 오독오독 씹히는 무장아찌도 맛있어서 자꾸만 손이 갔다. 서문도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 갔다.
오랜만의 평온한 식사라고 생각하면서 선우는 고개를 돌려 커다란 창을 보았다. 푸르른 정원 위로 밤이 느리게 내리고 있었다.
* * *
햇볕이 한창 뜨거울 오후 시간이었다.
“아니, 어째 여름처럼 덥대? 밭에서 풀 좀 뽑았다고 땀이 다 나네.”
조리사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이제 막 건너온 선우를 보더니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막내 아가씨가 이제사 나갔나 보네. 선우 씨도 이제라도 뭐 좀 먹어야지? 회장님이 콩국수 드시고 싶대서 콩국수 했는데, 그걸로 줄까?”
“네.”
선우는 대답을 하면서 물컵을 꺼냈다. 오후 2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어제 거하게 쇼핑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서유라는 아침 늦도록 낮잠을 잤고, 점심을 대충 먹은 뒤에는 박소영과 마사지를 받겠다고 외출을 했다.
“김치 하시나 봐요.”
선우는 널찍한 주방 바닥 한쪽에 쌓여 있는 절인 배추를 보면서 말했다. 냄비에 물을 받던 조리사 아주머니가 가스레인지 불을 켜면서 대답을 했다.
“응. 이제 주말이잖아. 식구들 전부 집에서 식사하실 텐데 김치도 하고 밑반찬도 해 둬야지. 양 여사 오면 시작하려고.”
“어디 가셨나 봐요?”
그러고 보니 옥수댁과 양 여사가 보이지 않았다.
“응, 배부르다고 한 바퀴 돌고 온대.”
조리사 아주머니가 막 말을 하는데 옥수댁과 양 여사가 현관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옥수댁 아주머니의 커다란 목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왔다.
“아주 명품관을 쓸어 왔다며?”
“강 기사가 차에서 꺼내는데, 꺼내도 꺼내도 끝이 안 보였다잖아. 트렁크 가득 넣었는데도 다 넣질 못해서 오늘 따로 보내 준다고 했대. 어, 선우 씨 왔어?”
수다를 떨면서 들어온 두 사람이 선우를 보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모녀가 아주 기분을 제대로 냈겠지. 회장님 퇴원하시고는 처음이잖아.”
“아니, 근데 그럴 거면 그냥 차를 사 주는 게 낫지 않아? 그 돈 보태면 외제 차는 너끈하게 뽑았겠구만.”
“내 말이.”
어제 회장 일가의 외출에 대해 품평을 하면서 들어온 두 사람이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사이 다 삶아진 국수를 찬물에 헹구며 조리사 아주머니가 선우에게 물었다.
“선우 씨, 어제 저녁 식사는 잘했어? 긴장돼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지?”
그 말에 옥수댁 아주머니가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선우 씨가 왜?”
“어제 전무님이 선우 씨랑 저녁 식사 같이했잖아. 식사 안 하셨다면서 간단하게 준비해 달라고 하시더라고.”
“그으래?”
조리사 아주머니가 완성이 된 콩국수를 선우 앞에 놓아주었다. 옥수댁과 양 여사도 냉커피가 마시고 싶다며 커피를 타서는 식탁에 같이 앉았다.
“전무님이 뭐래? 무슨 말을 하려고 밥을 다 먹자고 했대?”
“별말은 없으셨고요. 그냥 저 일하는 거 물어보셨어요.”
선우가 애꿎은 콩국수를 들었다가 놓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조리사 아주머니가 중간에서 말을 가로챘다.
“뻔하지, 뭐. 막내 아가씨 어떠냐고 물었겠지. 마침 외출 나갔겠다, 선우 씨한테 물어볼 게 그거밖에 더 있어? 선우 씨, 먹어. 먹고 천천히 말해도 돼.”
“네.”
“막내 아가씨 병원에 언제 보낸다, 그런 말은 없어? 자기가 얘기 좀 잘 하지. 상태가 영 안 좋다고. 병원 가야겠다고. 내가 아주 그놈의 소주병 치우는 데 이골이 나. 아니, 왜 담배를 거따 버리고 그럴까.”
옥수댁의 말에 으이그, 소리를 내면서 양 여사가 옥수댁의 팔을 쳤다.
“막내 아가씨 병원 가면, 응? 선우 씨는 잘리는 건데, 그런 말을 왜 해?”
“어마, 그런가?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그 뒤로도 서유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서문도가 서유라를 언제까지 두고 봐주는지에 대해서 추측도 하고, 언제 잘릴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도 하라고 선우에게 충고도 해 주었다.
선우는 적당히 대답을 해 가며 국수를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커피잔이 비워지자 양 여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유, 우리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네. 선우 씨, 편히 먹어. 우린 김치 담글 준비할게.”
“네. 먹고서 저도 도울게요.”
선우는 대답을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고소한 콩국물을 떠서 먹는데 워치에서 지잉— 하고 진동이 울린다. 화면을 보니 메시지가 보였다.
[다음 주 금요일 시간 어떠세요?]
최지상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이면 일주일 뒤였다. 일요일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 어려운 선우에게는 약속을 잡기 힘든 날이었다.
워치로는 긴 대답을 보내기 힘들어서 선우는 자리에 일어났다. 그릇을 들어 개수대로 가는데 옥수댁이 묻는다.
“벌써 다 먹었어?”
“네. 잘 먹었습니다. 잠깐 방에 갔다 와서 도와 드릴게요.”
“아유, 괜찮아. 쉬어. 막내 아가씨 없을 때 쉬어야지.”
옥수댁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2층의 방으로 올라왔다. 핸드폰을 찾아서 최지상에게 답장을 썼다.
[평일은 외출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일요일이 편한데, 이번 주 일요일은 안 되시나요?]
메시지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는데 벨이 울렸다. 액정에 ‘A’라는 이름이 뜬다. 선우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에 전화를 받았다.
— 최지상입니다.
“네.”
선우가 대답을 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최지상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냐니.
너무 무책임한 질문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냐는 말을 누르며 선우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최지상에게 바로 용건을 건넸다.
“일요일은 안 되시나요?”
— 일단 촬영이 계속 있거든요. 금요일에 인터뷰 잡혔던 게 캔슬이 돼서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연락드린 건데, 유라 누나는 캔슬된 거 모르고요. 아니면 다다음 주? 이게 참 빨리 만나서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잘 안 나네요.
최지상은 나긋나긋하게 선우에게 말했다.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로 여심을 저격하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본 적이 있다. 선우에겐 전부 위선으로 느껴질 뿐이지만.
“그럼 금요일에 만나요. 시간을 내 볼게요.”
— 네. 대신 제가 그 근처로 갈게요. 그럼 훨씬 수월하겠죠?
나긋한 목소리에 선우는 건조하게 대답을 했다.
“가능하면 오전에, 11시 정도에 봬요. 정확한 시간은 목요일에 메시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 네 그럼, 다시 연락할게요.
최지상이 전화를 끊었다.
금요일. 외출을 하려면 서문도 전무에게 허락부터 맡아야 하는 날이다. 선우는 다이어리에 동그라미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