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41화 (41/168)

41. 좋네요

박소영과 화해를 한 기념으로 서 회장은 아주 오랜만의 외출을 결심한 모양이었다.

박소영의 마음이 풀릴 정도로 쇼핑도 하고, 근사한 곳에서 세 식구만 오붓하게 저녁을 먹겠노라고 했단다.

“오늘 라이브 방송은 미뤄야겠다. 아으, 귀찮아.”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서유라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런 날 아빠 기분 나쁘게 만들면 완전 삐지거든. 카드 한도를 싹 줄여 버린다니까. 뒤끝 존나 길잖아.”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인색한 서명구 회장이 큰마음을 먹은 날. 이런 날에 귀찮게 무슨 쇼핑이냐고 심기를 거스르면 회장은 크게 삐진다고 했다.

“나 머리 좀.”

“굵게 말아 드릴까요?”

“어. 우아하게 해죠. 울 아빠 취향이야.”

선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유라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나이 들더니 점점 속이 좁아져서는, 차림새 보고도 뭐라 한다니까?”

커다란 롤을 꺼내서 말아 주는 동안 서유라가 종알종알 떠들었다.

“자기가 기분 내서 나가자고 했는데 대충 입고 나가잖아? 그럼 표정 존나 구려지는 거 알지? 아마 엄마는 샵 갔을걸?”

“샵 만큼은 아니어도, 컬이 잘 나올 수 있게 말아 볼게요.”

선우는 거울을 통해 서유라를 보면서 말했다.

“응응. 넌 잘하니깐.”

선우에게 대답한 서유라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살피면서 말했다.

“가서 또 빡세게 웃어 줘야 해요. 애교 부리면서 기분 맞춰 줘야 좋아하거든. 근데 또 그때 좋은 것도 있어. 사 달라는 거 다 사 주잖아. 아빠 기분 내는 날이 득템하는 날이야.”

그러니까 회장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면서 예쁘게 차려입고 비위를 한껏 맞추어 주는 것이 중요한 듯했다.

“나 눈썹 다듬어야겠다. 서랍에 눈썹 칼 있거든.”

점점 자신의 손으로 하는 것이 줄어드는 서유라였다. 당연한 듯 선우에게 맡기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선우를 제 영역 속으로 들이는 중이다. 선우는 눈썹을 세심히 살핀 뒤 부드럽게 말했다.

“모양은 손대기 힘들어서요, 가볍게 정리만 해 드릴게요.”

“응.”

굵게 컬을 말아 주고 나서 선우는 눈썹 칼을 들었다. 서유라가 얌전히 선우에게 얼굴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너무나 평화로운 오후였다.

사각사각 눈썹이 잘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눈을 감고 있는 서유라의 얼굴이 한없이 무방비한, 하여 정말 당신이 그런 것일까 의문이 드는, 그런 오후.

서유라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선우의 절반은 서유라가 범인이라 확신을 하고, 절반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을 하였다.

절반과 절반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자리를 바꾸었다가 다시 바꾸기를 거듭하는 동안에.

“이 정도면 괜찮으세요?”

진심으로 위하는 척, 선우는 상냥한 가면을 썼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본 서유라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도 부탁해.”

“네.”

선우는 굵게 컬이 진 머리를 예쁘게 손질해 주었다. 옷을 골라 주고 화장을 도와주었다. 인증샷을 찍어 주었고, SNS에 올리는 것도 지켜봐 주었다.

“오늘은……. 아빠라앙……. 외추울……. 라방은……. 내일……. 해요오…….”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린 뒤 유라가 선우에게 확인을 해 달라는 듯이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사진도 잘 나왔고요.”

“그치?”

서유라가 환하게 웃으며 선우를 보았다. 선우도 기꺼이 웃어 주었다.

* * *

아무도 없는 별채에 선우는 홀로 있었다.

서유라도,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오가지 않는 별채는 시간이 멎은 것처럼 고요했다.

평소 같았으면 2층으로 올라갈 생각을 했을 터였다.

누가 오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이면서, 어떻게 하면 서랍 한 칸이라도 더 열어 볼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그래야 하는 시간에, 들킬 위험에 뒤져 보지는 못해도 마음이라도 타들어 갔어야 하는 그 시간에.

선우는 소파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하면서 선우는 웃었다. 사치스러운 생각이라서. 한 줌의 시간이 소중한 이때 기분 타령이라니.

그런데 정말로 그랬다. 지친 것도 같았다. 서유라를 한껏 예쁘게 꾸며서 보낸 뒤에 혼자가 되니 무기력이 찾아온 듯했다.

그래서인지 게을러진다. 움직여야 하는 것을 알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잠깐은 괜찮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밤이 시작되기 전에, 남자의 품에 안겨 드는 낯선 여자를 연기하기 전에, 잠깐은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낮의 소란스러움들이 사위어 가는 동안, 선우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릎에 턱을 괴고서 커다란 창을 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기울어 가는 것을, 마침내는 자신의 발끝까지 몸을 눕히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며.

문득문득 떠다니는 생각들도 했다.

엄마와 아빠는 천국에 갔을까. 그때의 우리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민우는 엄마랑 아빠를 만났을까.

최지상은 언제쯤 연락을 할까. 토끼 같은 지젤 학원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서유라는 쇼핑을 하고 있을까.

통창 너머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를 한참. 선우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해는 저쪽으로 기울었고.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구름은 자리를 바꾸었다.

깜빡.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깼어요?”

저녁 어스름 속에 남자가 서 있었다.

* * *

“죄송합니다.”

몇 번 눈을 깜빡인 후에, 선우는 황급히 말했다.

무릎을 내리고 손으로 입을 닦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꿈인가 싶었던 풍경 속에 서문도가 우뚝 서 있었다.

“잠깐 졸은 걸로 죄송할 것까지야.”

노을을 등진 서문도가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서 선우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

무엇을 하려고,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인다.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어졌다가 느리게 떨어졌다.

“아…….”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선우가 당황한 소리를 내자 서문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물끄러미 보더니 선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제게로 당겼다.

“누가, 누가 오면.”

선우의 당황한 목소리를 문도의 입술이 덮었다. 머금고, 다시 머금고, 방향을 바꾸어 거듭 머금으면서 부드러운 꽃잎 같은 선우의 입술을 탐했다.

어느새 선우의 숨은 가느다랗게 떨렸고 뺨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갔다.

노을을 닮은 입맞춤이라고 선우는 생각했다.

부드럽게 비벼지는 혀가, 가끔씩 장난처럼 깨무는 입술이, 뒷머리를 감싼 커다란 손이 선우를 붉게 물들였다. 발끝부터 서서히 물들어 마침내 남자에게 모두 잠겨 가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어쩌면 바람둥이일지도 모르겠다. 수백 번, 수천 번의 입맞춤을 해 보았던 사람이리라.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감미로운 입맞춤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몽롱하게 생각하며 선우는 남자의 옷깃을 쥐었다.

그것이 어떤 신호라도 된 듯, 남자의 키스가 깊어졌다. 선우의 허리에 남자의 팔이 감기며 몸이 바짝 맞붙었다.

숨과 숨이 하나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발끝이 들리며 아랫배가 저릿저릿해질 때에 남자가 가만히 선우의 입술을 놓았다.

천천히 눈을 든 선우를 문도가 내려다보았다.

상기된 선우의 뺨을 엄지로 쓸다가 귓바퀴를 문지르듯이 비볐다. 파르르 떨리는 선우의 눈꺼풀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뒤에 말한다.

“다행히 아무도 안 왔네.”

올 수도 있었어요. 그렇게 말을 하고 싶은데 남자가 웃었다.

남자의 웃는 얼굴은 반칙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이 멎고 말문이 막히는 얼굴이란, 정말이지 불공평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목 끝까지 노을에 잠기는 것 같았던 입맞춤을 선우에게 남겨 놓은 서문도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걸으며 물었다.

“아, 니요. 이제 먹으러 가려고요.”

뒤에 말은 생각에도 없었던 말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졸았고,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말인지.

“나도 아직 식사 전인데.”

“아직이시면, 그럼, 장 여사님께, 아니, 숙소동에.”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 못 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말은 두서없이 엉키는 바람에 선우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문도가 대수롭지 않게 묻는다.

“같이 먹을래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문도의 말에 선우는 눈만 깜빡이다 소심하게 거절의 말을 더듬었다.

“어, 그건, 아직, 그러니까…….”

남자가 웃었다. 농담이었나 보다. 선우는 질끈 눈을 감고 싶었다.

말까지 더듬으니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요즘 이 남자 앞에서 왜 이리 자주 실수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서문도가 슬리퍼를 끌고서 주방으로 향하였다. 아무 말이나 뱉는 실수는 그만. 선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전무님, 그럼 저는…….”

선우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서문도가 손만 가볍게 들었다가 내렸다. 잠깐 기다리라는 뜻인가. 선우가 생각할 때 남자는 인터폰을 들었다.

“별채입니다. 이선우 선생님과 식사를 같이 할까 하는데. 메뉴는 뭐가 가능하죠?”

선우가 깜짝 놀라서 문도를 쳐다보았다. 서문도는 태연한 표정으로 건너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거창하게는 말고, 간단하게요. 네. 곤드레밥 좋네요.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친 서문도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선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저녁 전이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저는 건너가서 먹으면 돼요. 건너가서 먹을게요.”

“왜요? 불편해서?”

당연히 불편하다. 잠을 자는 사이이긴 하나 엄연히 고용인과 고용주였다.

한 식탁에서 격 없이 밥을 먹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보이지 않는 선이 두 사람 사이에는 그어져 있는데.

선우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문도가 피식 웃었다.

“마침 할 말도 있으니 면담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선우는 어색하게 문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문도가 그런 선우를 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좋네요. 집에 일찍 오니까. 같이 밥도 먹고.”

눈이 마주치자 서문도가 가볍게 웃는다. 선우는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 가벼운 웃음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들었다 놓았을까.

이제야 조금, 서문도 전무를 향한 장 여사의 찬양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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