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짠하잖아 @AW
문도는 느리게 눈을 떴다.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흰색의 시트가 보였다.
엎드려 누운 채로 눈만 감았다 뜨기를 몇 번.
‘시트가 구겨져 있었대요.’
어젯밤, 이선우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피싯 웃음이 나왔다. 시트를 움켜쥐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여자는 밤사이 긴 머리카락 서너 가닥을 남겼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문도는 긴 머리카락을 주워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도 여자의 흔적들이 있었다.
쓰고서 한쪽에 얌전히 둔 수건, 작은 거품이 남은 비누, 항상 찬물 방향으로 내려놓는 수전의 손잡이.
흘려 놓은 머리카락은 모아서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수건은 자신이 쓴 수건 안으로 섞어 두고, 수전의 손잡이를 들어서 물을 틀고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여자가 남긴 흔적은 하나가 더 있었다.
화장지에 돌돌 말아 놓은 콘돔.
혹여 그가 잊을까 싶어서인지, 그의 손으로 허물 같은 비닐을 집게 하는 게 미안해서인지 욕실을 쓰고 나온 이선우는 꼭 화장지로 콘돔을 감싸 놓았다.
화장지에 감싸 놓은 콘돔을 주워서 챙길 때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헛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헛웃음을 감수할 만큼의 시간이었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니 주방에는 벌써 장 여사가 와 있었다.
“전무님 나오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잘 잤어요?”
문도가 인사를 건너자 장 여사가 저쪽을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거실의 커다란 창 앞에 박소영이 등을 돌린 채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떡할까요?”
장 여사가 문도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문도는 디스펜서에서 물을 한 잔 받으며 장 여사에게 물었다.
“회장님은요?”
“어제 점심부터 수액은 맞고 계시긴 한데, 밥은 아직 안 드시죠.”
문도는 웃었다.
단단히 화가 났음을 보여 주려 하면서도 아예 이 집을 나가지는 못하는 박소영이나, 곡기를 끊어 버릴 정도로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표현하면서도 수액은 꽂고 있는 회장이나, 정말이지 천생연분인가 싶다.
“새벽부터 저러고 있어요.”
장 여사가 속닥거렸다. 문도는 웅크린 박소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박소영은 자신이 이쯤에 출근하는 것을 안다. 일부러 보란 듯 저러고 있는 거지. 자존심 상해서 차마 내 발로는 못 들어가겠으니 어떻게 해 달라는 무언의 시위인 것이다.
“빨랑 본관으로 들여보내요. 아주 그냥 눈 뜨고 못 보겠어. 전무님도 불편하잖아.”
“나는 괜찮은데?”
빙글 웃으면서 청개구리처럼 말하자, 장 여사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짠하잖아.”
문도는 웃었다. 기업의 총수가 애첩과의 사랑 다툼으로 곡기를 끊은 것이 짠하다고 할 일인가.
평생 가정이 있는 남자에게 들러붙어 있으면서 외제 차 타령을 하는 여자를 불쌍하게 봐주어야 하나.
문도는 냉소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성격 같아선 저러다 말라죽든 말든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작은 사모님도 계셔서요.’
마음이 쓰이는 건 얼굴이 발갛게 익은 여자였다. 거실에서 그대로 안으려 하니 침대로 가고 싶다며 했던 말이다.
‘침대에서는 되고, 여기서는 안 되고?’
젖어 있는 안쪽을 둥글리며 물으니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끄덕였었다.
발갛게 익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때의 표정이. 파르르 떨리는 여린 몸이. 신음을 참으려 깨문 입술이. 그러다 터져 나오는 탄식 같은 숨이.
문도는 고개를 젖히며 목을 쥐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말했다.
“아침은 본관에서 먹을게요. 차리지 마세요.”
장 여사가 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소영에게 다가간 장 여사가 뭐라 말을 하니 박소영이 울먹거리는 얼굴로 문도를 돌아보았다.
박소영이 옆에서 장 여사가 눈을 끔뻑하며 문도에게 신호를 주었다.
문도가 고개 숙여 묵례를 하자, 박소영이 애써 웃더니 급히 눈물을 닦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준비하고 올라오시겠대요. 전 먼저 건너가서 준비할게요.”
장 여사가 뒷문을 열고 나갔다. 문도는 물을 마저 마시다가 픽 웃었다.
섹스 한번 맘 편히 하자고 별짓 다 한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 * *
놀랍게도 서유라가 깨어 있었다.
아침에 별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선우는 크게 하품을 하는 서유라를 발견하고 놀랐다. 하품을 하던 서유라도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이 깜짝이야.”
“일어나 계셨어요?”
“어. 엄마가 깨워서. 하암.”
서유라는 다시 하품을 크게 했다. 멍한 얼굴로 소파에 앉더니 눈을 끔뻑거렸다.
다이닝룸이 썰렁한 걸 보니 서문도 전무는 출근을 한 것 같고, 박소영은 지층에서 올라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침 식사 하셔야죠? 작은 사모님은 드셨어요?”
인터폰으로 가면서 물어보는 선우에게 서유라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냐. 아오, 하품 왤케 나와. 나도 먹고 엄마도 먹었어.”
전에 없던 일이라 의아해서 서유라를 바라보니 서유라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비비면서 말했다.
“몰랐구나? 엄마 다시 건너갔잖아. 엄마 아빠 화해했다고 새벽부터 깨워서는, 아침 먹으러 건너오라고. 어후.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야.”
서유라의 말에 따르면 서 회장은 박소영을 보자마자 소영이, 라고 흐릿하게 발음을 했고, 그에 박소영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차 탈게요. 그냥 내가 그 차 탈게요. 회장님 식사해야지. 응?’
회장은 박소영의 한마디에 비실비실 일어나서 박소영이 떠먹여 주는 미음을 한 그릇 모두 비웠다고 했다. 그 기념으로 모두 모여서 사이좋게 아침을 먹었다고.
“하여튼 울 엄마 물러 터졌다니까. 야, 나 담배 좀.”
창가에 앉은 서유라에게 담배와 재떨이로 쓰는 소주병을 가져다주니 서유라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서문도 그 새끼가 악랄한 거지. 엄마가 딱 본관 들어가서 처음 들은 소리가 뭔 줄 알아?”
알 리 없다. 선우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유라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둘째 오빠 곡하는 소리. 아이고 아버지, 이러다 병나십니다아아아. 제발 한 숟갈만 드세요오오.”
그게 왜 서문도 전무의 악랄함과 연결이 되는 것일까. 선우는 의아했다.
“서문도가 엄마한테 본관에서 아침 먹자고 한 게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거야. 그 새끼가 우리한테 뭘 하자고 할 리가 없잖아?”
서유라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퉷, 하고 소주병에 침을 뱉더니 말을 잇는다.
“왜 하필 문 열자마자 작은오빠가 곡을 하고 있었을까. 시간 딱 맞춰서. 나 커피 한 잔만.”
아. 선우가 이해를 하고서 주방으로 향하는데 서유라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그 새끼가 그래서 재수가 없다니까. 사람 가지고 노는 데 도가 튼 새끼야 그 새끼가. 지난번만 해도 그래. 집으로 가자 그래 놓구 앰뷸런스에 처넣어서는. 아니, 사람 죽은 게 내 탓이냐구.”
그 순간 선우는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서유라가 선우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황당하지 않냐? 아니, 내가 지 고몬데, 어? 새끼가 위아래가 없다니까? 나이 몇 살 많으면 다냐고. 나쁜 새끼. 내가 걔 때문에 개고생한 얘기 안 했지?”
선우는 애써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개새끼. 나 퇴원시켜 달라고 엄마가 그렇게 빌었다는데. 두 번이나 처넣구. 아오, 열받아.”
얼음이 가득 들어 있는 아이스커피를 내밀자 서유라가 목이 탔다는 듯 벌컥벌컥 마셨다.
선우는 부디 목소리가 평범하게 나오기를 바라면서 유라에게 물었다.
“서 전무님께서 병원에 강제로 넣으신 거예요?”
“완전 어이없지?”
고개를 끄덕이니, 서유라가 기막힌 표정을 지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사람이…… 죽었어요?”
선우의 말에 유라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지들끼리 싸우다 죽었다는데 왜 날 처넣냐구. 아니, 막말로 내가 약을 하든 말든, 사고를 치든 말든, 지가 무슨 상관이야. 나 서유라야. 서도 그룹 막내딸 서유라라구. 경찰이든 검찰이든 나 함부로 못 건드려.”
서유라가 담배를 병 속으로 툭 던져 넣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에 치직 소리를 내며 담뱃불이 사그라들었다.
선우는 눈을 감았다 떴다. 불과 몇 달 전에 보았던 이름을 떠올려 본다.
서유라.
어떻게 했어도 닿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서도 그룹의 보호 아래에서 늘 변호사를 대동하고 진술을 했단다.
SNS만이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라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바로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이런 식의 사적인 연락은 받지 않노라고.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면 어쩔 수 없이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서유라 씨가 기분 나빠 하니 다이렉트 메시지를 지우라고.
그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그러니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했어도 변호사의 대답은 늘 같았다.
서유라 씨는 일반인과 만나지 않으십니다.
“그나저나 둘이 아주 생쑈를 하더라. 누가 보면 이산가족인 줄. 뭐, 다음엔 외제 차 사 준다고, 조금만 기다리면 커피 체인점도 엄마 명의로 돌려준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하든데…….”
서유라는 핏,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게 왜 엄마 꺼야. 내 꺼지.”
아마도 흐릿하게 웃었던 것 같다. 선우는 그 뒤로 나누었던 대화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서유라가 떠들면 들어주다가 한 번씩 고개를 끄덕였다.
“하암……. 나 넘 졸리다. 자러 갈 테니까 놀고 있어. 야, 너 진짜 편하게 돈 벌지 않냐? 완전 꿀 빤다. 그치?”
선우는 간신히 웃었다. 생각이 없는 여자처럼, 돈만 바라고서 이 집에 들어온 여자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한번 해 봐.”
서유라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거만한 서유라의 표정 위로 집을 나서며 신발 끈을 묶었던 민우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누나, 우리 내일은 엄마 아빠한테 가자. 나 제대하고서 같이 납골당에 가 본 적 없잖아.’
마지막에 너는 웃으면서 나갔는데. 운동화를 신은 발걸음이 힘찼었는데. 꽃집에 들렀던 나는 엄마가 좋아했던 라넌큘러스를 듬뿍 사 놓았었는데.
“고마워요. 유라 씨.”
마음이 찢기듯이 아팠지만, 선우는 웃었다. 아프게 웃으며 빌었다.
이 시간들이 헛되지 않기를. 웃어도, 울어도, 슬퍼도, 아파도 좋으니. 부디 이 시간들이 헛되지 않기를. 그리하여 반드시 진실을 알게 되기를.
선우는 오래도록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