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맥주맛
선우는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는 유라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는 지하 1층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 정면에서 보면 땅보다 세 계단 정도 낮게 존재하는 곳. 지층으로 내려가는 건 처음이었다.
지층이라고는 하나, 지하라는 이미지가 강했기에 어두울 것 같다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통창으로 보이는 잔디의 푸르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서유라가 쓰는 게스트룸의 아래로 짐작되는 위치에 유리 벽으로 되어 있는 커다란 트레이닝룸이 있고, 주방이 위치한 아래에 세탁실과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푹신한 소파가 드문드문 놓인 선큰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게스트룸이 나왔는데, 작지만 단정하게 꾸며진 전통 한실이었다.
“엄마.”
서유라가 들어가자 좌탁 앞에 찻잔을 들고 앉아 정원 쪽을 보고 있던 박소영이 휙 하고 뒤를 돌았다.
“회장님은 어떠셔, 뭐 좀 드셨니?”
에혀, 얕게 한숨을 쉬면서 서유라가 껌을 딱딱 씹고는 방 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방 꼬라지 하고는. 가정부 쓰던 방 쓰니까 좋아?”
“진지 드셨냐니까.”
“아, 먹었겠어? 아빠 몰라? 말 한마디도 안 해. 고개도 안 돌려. 눈 감고 누워서 앓는 소리만 내드라.”
서유라가 탁자 앞에 앉으며 말하자 박소영이 바짝 붙어 앉으며 서유라에게 물었다.
“수액은? 응? 오 원장이 수액 꽂아 주고 갔지?”
“꽂아 놓으면 뽑아 버린대. 혈관도 약해져서 여러 번 못 찌르잖아. 저녁때 다시 오겠다고 했대.”
“어머. 어머머. 수액도 안 꽂아 주고 갔대? 어떻게든 꽂아 줬어야지!”
서유라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엄만 그래서 안 돼. 몇 끼 굶는다고 아빠 죽어? 저거 다 쑈잖아. 알면서 뭘 그렇게 안달을 내?”
“얘, 내가 무슨 안달을 냈다고 그래. 몸 상하실까 봐 걱정을 하는 거지.”
아닌 척 말을 하던 박소영이 선우를 보고는 흥,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침에 괜한 불똥이 튄 것을 탓하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선우는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보았다.
“야, 가지고 온 거 꺼내 봐.”
서유라의 말에 선우가 들고 내려왔던 쇼핑백을 여는데 박소영이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쟨 자꾸 왜 데리고 다녀?”
“아, 그럼 내 손으로 엄마 시중들어?”
고재로 만든 긴 좌탁 위에 예쁜 접시가 놓이고 색색깔의 마카롱이 꺼내졌다.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도 따라 주었다.
“이게 다 뭔데?”
“뭐긴. 아빠가 엄마 준다고 사다 놓으라 했던 마카롱이지. 엄마가 지난번에 맛있다고 했다며. 장 씨가 챙겨 줬어.”
울상을 짓는 박소영을 서유라는 한심히 내려다본다.
“엄마. 더도 말고 딱 이틀만 버텨. 아니다. 짐 싸서 나가. 한 일주일 어디 가 있어.”
“그랬다가 영영 안 찾으시면 어떡하라구.”
“새남자 만나서 새살림 차리는 거지, 뭐.”
심드렁한 서유라의 말에 박소영은 눈을 들더니 창문 너머 먼 곳을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러면 큰돈을 못 벌잖니. 30년을 버텼는데 이제 와서 어디를 가.”
“뭐야. 언제는 사랑이라더니.”
박소영은 커피를 호르르 마시더니 천천히 말했다.
“사랑 맞아. 그런데 사랑만으로는 못 버텼지. 내가 너를 왜 낳았는데.”
“한몫 잡으려고 낳아 놓구선.”
“여자는 갈아 치울 수 있어도 자식은 못 그러거든.”
그러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유라에게 말했다.
“얘, 유라야. 나는 회장님 돌아가실 때 꼭 옆에 있을 거다? 내 손 잡고 돌아가시게 할 거야. 받을 거 다 받구, 내 옆에서 나만 보다가 돌아가시게 할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서명구 회장을 말할 때 이 박소영이를 빼지 못하게 할 거야. 성공한 인생이 별거니. 그게 성공이지.”
어딘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선우는 해사하게 웃는 박소영을 바라보았다.
집착과 욕망. 순정과 집념. 연민과 회한.
박소영에게 사랑이란 무얼까 생각을 해 보는 순간이었다.
* * *
건너오라는 전화는 자정이 넘어서 울렸다.
꾸벅 졸았던 것 같기도 했다. 선우는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바로 전화를 받자, 서문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건너올래요?
약간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선우는 남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생각을 했다.
거기다 선우에게 선택지를 주는 질문이어서일까. 끝이 올라가는 의문형이어서일까. 이상하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자정을 넘겨 버린 늦은 시간. 피곤이 실려 있는 낮은 목소리. 건너오겠냐는 질문.
세 가지를 더하니 힘든 날이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선우는 바로 건너가겠다는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요.”
— 피곤합니다.
남자는 순순히 인정을 했다. 주차장에 있는 건지 목소리가 살짝 울렸다.
삐릭, 차의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난다. 선우는 누운 채로 생각을 하다가 문도에게 말했다.
“오늘은 전화로 말씀드릴까요?”
— 최악인데.
그렇게 말한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무엇이 최악인지 모르겠어서, 선우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 내가 보고 듣자고 이 시간에 전화를 했을까?
“어…….”
— 건너올 거냐고 전화로 물어본 건 늦은 시간이지만 같이 자겠느냐는 질문인 건데.
“아…….”
어, 와 아, 로 이어지는 선우의 목소리에 서문도가 피식 웃었다.
— 피곤합니다. 근데 하고 싶기도 하고. 그냥 자는 거랑 하고 자는 거랑 둘 중에 뭐가 더 나은지를 모르겠네.
남자의 직설적인 말들이 선우를 민망하게 한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대화를 하듯이 남녀 간의 잠자리에 대해서 말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그런 경험만 없을까. 선우의 모든 경험은 전부 서문도가 처음이었다.
연습과 공연으로 이어지던 일상이었다. 연애를 생각할 수 있을 즈음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그 뒤로는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학원 일에 매달렸다.
— 어쩔래요. 그냥 잘래요, 하고 잘래요.
그래서 이런 남자의 질문을 받으면 바로바로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배우지 못한 부분의 답을 내놓아야 하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게 선택지가 있을까.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선우가 말했다.
“괜찮으시면, 건너가고 싶어요.”
건너편에서 남자가 웃는다. 담담한 척 말을 했지만 사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창피함에 희미하게 이마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선우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 건너와요.
남자의 목소리가 몸 안으로 흘러든다. 낮게 고여 드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나른해서 선우는 발가락을 오므렸다.
* * *
숙소동을 나서려고 문을 여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선우는 우산을 써야 하나 잠깐 생각하다가 그대로 걸었다.
불이 꺼진 1층을 지나 2층으로 오른다. 중문을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가니 서문도 전무가 소파에 앉아 캔맥주를 들고 있었다.
“왔어요?”
흘깃 뒤를 돌아 선우를 확인한 문도가 말했다.
“맥주?”
소파 테이블 위에 캔맥주가 하나 더 있었다. 선우가 고개를 젓자, 서문도가 가볍게 웃으며 맥주캔을 들었다.
달칵, 캔을 따는 소리가 나고 이어 꿀꺽꿀꺽 맥주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느슨하게 타이를 내린 모습으로 목을 젖히며 맥주를 마시는 서문도의 모습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서문도가 캔을 내려놓으며 선우를 본다.
이럴 때면 선우는 뭔가 어색하였다.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기분. 시선을, 표정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기분. 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어색함이었다.
그저 서유라의 일상을 보고하기만 하면 됐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서문도가 자신을 볼 때 담담히 마주 볼 수 있었다.
정해진 말을 하면 되었고, 서 있는 자세, 얼굴 표정, 손의 위치, 눈동자가 향하는 곳, 이런 것들을 의식한 일이 없었는데.
“왜 그러고 서 있지.”
나른한 듯 빤한 서문도의 시선이 선우에게 꽂힌다. 선우는 뭐라도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은, 긴장감을 깨고 싶은 그런 마음에 입을 열었다.
“왔으니까, 보고부터 할까요?”
서문도가 웃었다. 그러더니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을 한다. 가까이에 서자 손목을 잡아 가볍게 당겼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서 문도의 다리 사이에 선우가 서게 되었다.
“하세요.”
문도가 말하며 선우의 허리를 안으로 당겼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남자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마주 보는 남자의 얼굴은 너무 가깝다. 눈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지나치게 가까웠다.
“왜 안 해요? 보고한다면서.”
이 자세로 어떻게, 라는 말을 삼키면서 선우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서유라 씨는 오늘, 그러니까. 회장님 뵈러 본관에…….”
남자의 손이 선우가 입은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선우가 말을 멈추자 남자가 눈썹을 들어 올린다.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본관에……. 다녀오셨.”
아, 하고 선우는 신음을 뱉으며 몸을 움찔거렸다. 티셔츠 밑의 남자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때마다 선우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렸다.
“그리고?”
“오후, 에는……. 박소여……. 아, 잠깐, 잠시만……. 흣.”
선우는 다리를 오므리며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며 더운 숨이 터져 나온다. 낮게 웃는 남자의 소리가 마주 댄 몸을 통해 선우의 몸을 울렸다.
“건너오고 싶었어요?”
남자의 눈빛에 나른한 열기가 감돈다.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할까.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커다란 손은 선우의 몸을 어루만졌다.
“하고 싶어서?”
가슴 위의 정점을 부드럽게 비비면서 묻는다. 선우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어요?”
다시 한번 끄덕. 붉어지는 선우의 귀를 보며 서문도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어.”
태양을 가둔 것 같은 눈동자가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
침묵이 흘렀다. 낮고, 고요한.
뭐라도 해야겠지. 선우는 생각했다.
밤을 건너왔으니까.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기다렸다고 했으니까.
선우는 두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쌌다. 천천히 다가가자 남자의 목울대가 위로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입술을 포개는 선우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으며 서문도가 웃는다.
맥주맛이 나는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