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큰일이네요
박소영이 별채로 가 버린 뒤, 회장이 곡기를 끊었다.
“안 드시겠대요.”
장 여사가 미음을 올린 쟁반을 도로 들고나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현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고, 서중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징글맞네, 징글맞아.”
서중호는 숟가락 가득 밥을 펐다. 한입에 욱여넣고 알타리 김치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 씹으면서 나 원 참,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그리 30년을 한결같이 징글맞으실까. 울 어머니 무덤 속에서 지긋지긋하다고 돌아누우시겠어.”
손주까지 본 환갑의 나이에 사랑 타령을 했던 회장이다. 그때는 뭐라 했더라. 첫사랑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했던가.
싱싱한 물고기같이 팔딱거리는 젊은 여자를 보니 정욕이 끓었다는 게 차라리 낫지.
그룹을 이끄는 총수라는 사람이 사랑 타령을 하는 순간부터 파란은 예고되어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놈의 곡기는 어찌 그리 잘도 끊으시는지. 아주 그냥 밥 안 먹는 게 유세지. 아이구, 예예, 고만 드십시오.”
허허 웃으면서 서중호는 밥을 크게 떴다. 이놈의 징글맞은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밥심이라도 있어야 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서중호는 마음에 심지가 설 때면 숟가락을 잡고 머슴밥을 먹었다.
아비는 여자를 주물럭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어미는 장남만 싸고도니 찬밥 신세인 차남은 어찌할까. 뜨신 밥 든든히 챙겨 먹고 스스로 살길을 찾을 수밖에.
“박소영이도 그래. 첩 주제에 어디서 싫다 좋다 따지고 드나. 주는 대로 받을 것이지. 건방지게.”
중호는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말했다. 아주 저놈의 사랑놀음에 진저리가 나는 것이다.
“이러다 죽을 때 관짝에 같이 묻어 달라 하시겄어. 거 뭐야, 거. 같이 묻어 주는 거.”
“순장이요.”
우현희의 말에 서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거. 거 좋네. 순장. 저승길도 염병 떨면서 같이 가시라 하면 노친네 좋아라 하겠어.”
중호가 낄낄 웃었다. 그러더니 씨팔, 하고 욕설을 뱉었다. 사나운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수만 명의 생계를 짊어진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하면서 어떻게든 회장 자리를 받아 보려 노력 중인데, 정작 그룹의 회장이라는 작자는 여자 때문에 드러누웠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우현희는 장 여사에게 눈짓으로 쟁반을 제게 달라고 신호를 주었다.
“제가 가 볼게요.”
우현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중호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요. 당신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식사해요. 내 이런 일 처리하는 데는 이골이 난 것을. 여사님.”
서중호가 우현희에게로 다가가던 장 여사를 불렀다.
“별채 가서 아버님 곡기 끊었다고 고하세요. 어어, 그래. 낼모레 돌아가시게 생겼다고. 오 원장님 호출했다고도 하고.”
“네.”
장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중호는 젓가락을 들어서 큼직한 알타리를 크게 베어 먹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끊기고 목소리가 들리자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한다.
“아이구, 오 원장님. 아침은 드셨습니까. 이른 시간에 이게 무슨 실례인가 싶은데……. 예예, 한번 걸음 해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아니, 회장님께서 갑자기 식사를 안 하시네. 네, 네, 수액 한 병만 꽂아 주세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는 다시 밥숟가락을 들던 중호에게 우현희가 말했다.
“고생이 많네요.”
그 말에 서중호는 씩 웃었다. 이 그룹을 움켜쥐기 위해 못 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바닥을 기라면 길 수도 있고, 똥지게를 지고 춤을 추라면 출 수도 있는 것을. 다 늙어 빠진 노친네 비위 맞추는 것쯤이야.
“이까짓게 무슨 고생이라고.”
“아마 수액도 안 맞는다 하시겠죠.”
“그렇겠죠. 당신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밥 먹어요. 바깥일 하려면 배가 든든해야지.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울 아들을 못 봤네. 한번 건너오라고 할까요? 이러다 얼굴 잊어버리겠어.”
중호의 농담에 현희가 답했다.
“어제 집에서 저녁 같이했어요. 헤지펀드 하나 인수할까 싶어서.”
“잘하셨네. 기왕 먹는 거 밖에서 맛있는 것 사 달라 하시지.”
“안 그래도 다음에는 밖에서 먹자 했어요.”
“그래요, 잘했어요. 자, 이제 그럼…….”
서중호가 냅킨으로 입가를 쓱 닦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문안 인사르을 드려 볼까나아, 타령을 하듯이 흥얼거리며 미음이 담긴 쟁반을 들고 걸음을 옮긴다.
밥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밥그릇이 보였다. 우현희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서용호 일가의 자금이 해외로 흘러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기로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금 더 명확해지면 논의할 일이었다.
* * *
쨍그랑.
대리석 바닥으로 숟가락이 떨어졌다.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박소영이 손을 바르르 떨었다.
“정말이야? 정말 회장님이 밥을 안 드셔?”
“예에. 어제저녁부터 안 드세요. 몇 번을 올려도 다 물리시네요. 딱 돌아누우셔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안색이 허옇게 질리신 거예요. 부회장님께서 식겁하셔서 오 원장님 호출하셨잖아요.”
장 여사가 숟가락을 주워서 아일랜드의 개수대로 가져가며 말했다.
새 수저를 꺼내 다시 놓아주었지만 박소영은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염치도 없게 아침을 먹은 거냐며 울상을 지었다.
긴 식탁의 맞은편에 앉은 문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촌극이 며칠이나 가려나. 입가심으로 나온 자그마한 쿠키를 반으로 툭 가르면서 말했다.
“심장 수술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으신 분이, 큰일이네요.”
히익,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다이닝룸을 울린다. 저래서야 외제 차를 얻어 낼 수 있을까.
문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쌍꺼풀이 진하게 진 박소영의 커다란 눈이 울멍울멍했다.
“장 여사, 회장님 전복내장죽 좋아하잖아. 그거 올려 봤어? 잣죽은? 타락죽도 좋아하시는데, 올려 봐봐.”
“아시잖아요. 마음 상하시면 눈 감으시고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거.”
에휴, 하고 장 여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멀리서 삐리릭— 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했던 문도의 시선이 거실 쪽으로 향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 파티션 너머로 이선우의 모습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좋은 아침입니다.”
끄덕, 이선우의 인사를 받으며 똑바로 쳐다보자 이선우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아일랜드 쪽에 서 있는 장 여사를 향해 묵례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지막으로 멀리 앉은 박소영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이선우였다. 자신을 좇는 문도의 시선을 알았는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귀에 꽂는다.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문도는 커피잔을 들었다.
“서 전무, 본관 한번 가 봐. 응? 회장님 어떠신가 한 번만 보고 와 봐. 가서 뭐라도 좀 드시라고 해 봐. 회장님이 서 전무 예뻐하잖아.”
박소영은 인사를 건네는 이선우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문도에게 말했다. 아주 애가 닳는 표정으로 징징거리고 있었다.
문도는 박소영을 물끄러미 보다가 거실로 물러나려는 선우를 불렀다.
“이선우 씨.”
거실로 향하던 이선우가 흠칫 놀란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면서 네, 하고 대답하는 선우에게 문도는 담담히 물었다.
“이마는 좀 어때요?”
“아……. 네. 괜찮습니다.”
이선우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지는 것 같은 것은 착각이려나.
“아니, 서 전무. 그러지 말고 본관에 한번 가 보라니까. 응? 회장님이 곡기를 끊으셨다잖아.”
박소영이 재촉을 했다. 딱 한 치 앞에 놓인 제 먹이만 볼 줄 아는 사람답게, 굳이 이선우를 불러 세운 이유를 모르고서.
문도는 시선을 박소영에게 꽂아 둔 채 선우에게 말했다.
“어제 일은 제가 대신 사과를 할게요.”
문도의 말에 다이닝룸이 조용해진다. 조용조용 움직이며 반찬 그릇을 정리하던 장 여사가 쓱 눈치를 보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선우는 눈에 띄게 당황을 하고, 박소영은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하는 경고라는 듯 문도는 박소영을, 이어 이선우를 보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박소영을 가리며 이선우가 답을 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긴장이 서린 얼굴이었다. 둘만 있는 자리였다면 뭘 또 그렇게 긴장하냐며 톡 하고 뺨을 건드렸을 테지만.
문도는 건조한 목소리로 선우에게 말했다.
“가서 고모님 깨우고, 회장님 뵐 준비하라고 하세요.”
“네.”
이선우가 고개를 깊이 숙인 뒤 물러난다. 문도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에 앉은 박소영이 보인다.
회장님 살펴봐 달라고 부탁은 해야겠고, 고용인 앞에서 망신 준 것에 분통은 치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주먹만 꽉 쥐고 있었다.
“회장님 뵈면, 뭐라고 전해 드릴까요?”
문도는 아무렇지 않게 박소영에게 물었다. 갑자기 바뀐 주제에 당황한 것인지, 거기까진 생각을 해 두지 않았던 것인지 박소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응? 그게…….”
“작은할머님께서 걱정 많이 한다고 전해 드릴까요?”
문도는 친절하게 물었다. 박소영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 아니, 그냥, 일단 괜찮으신지 좀 봐줘.”
“그리고요?”
“진지, 진지를 잡수라고 해 보고. 내가…… 내가…….”
갈팡질팡하는 표정 속에 잘못했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망설임이 보인다. 고개를 힘껏 저은 박소영이 결심했다는 듯이 문도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부탁했다는 말은 말고.”
“알겠습니다.”
문도는 대답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소영을 스치며 뒷문으로 향하는데 박소영이 문도의 옷깃을 잡는다.
“꼭 진지 잡수시라고 하고. 응?”
애절하다 애절해.
문도는 한숨을 쉬었다. 그깟 투정 좀 부렸다고 팩 토라져서는 곡기 끊는 회장이나, 그렇다고 눈물 글썽이는 정부나.
이 촌극의 시작이 차 한 대의 쪼잔함과 옹졸함이라는 점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건너가 볼 테니 식사 마저 하세요.”
“응. 응. 어서 가 봐.”
문도는 가볍게 묵례를 한 뒤 후원으로 나왔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낮고 흐린 날이다.
빠르면 오늘, 길어 봤자 내일. 이 촌극의 막이 내릴 시간을 예상하면서 문도는 본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