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37화 (37/168)

37. 푸른 밤

푸른 밤이었다.

해는 저물었고 어둠은 온전히 내려오지 않은.

불을 켜지 않은 마스터룸은 깊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갔다. 달이 뜨고 있으려나. 별은 하늘을 오르고 있는 중일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닿아 있던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진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부드러워서 어딘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뺨을 감싸는 손은 크고 뜨겁다.

어둑한 방, 선우는 벽에 기대어 남자의 눈을 보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길고, 눈썹은 아름다운 아치형.

시선을 조금씩 내려 본다. 매끈한 콧날과 선이 뚜렷한 입술이 보인다. 웃는 듯 아닌 듯, 끝이 올라간 입술은 도톰하고 어딘가 색스러웠다.

“하고 싶었어요?”

선우는 가늘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비스듬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묻는다.

“내가 그렇게 좋아?”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태양을 닮은 눈빛을 가졌다.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선우가 뭐라 말을 하기 전, 남자가 턱을 당겨서 입술을 머금으며 말한다.

“아니면……. 돈이 좋은가.”

각도를 틀어 윗입술을 머금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냥 밝히는 건가.”

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와 키스를 하는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건데도 싫지 않은 걸 보면.

“응? 답을 해야지.”

남자가 선우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도록 이끌면서 말했다. 상체와 상체가 조금 더 가까워지며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없어졌다.

정말로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선우가 머뭇거리자 입술을 살짝 아프게 깨물면서 남자가 말해 봐요, 라고 했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잘, 모르겠어요.”

진심이기도 했다. 왜 싫지 않을까. 늘 핸드폰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잠자리를 결심했었다. 그 목적 외의 다른 마음이 깃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머물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다친 이마는 욱신거렸고, 여전히 잠자리는 견뎌 내야 하는 무엇이고, 남자가 일으키는 낯선 감각들은 알고 싶지 않은 무엇인데도. 그런데도.

“뭐를 몰라요.”

남자가 입술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당겨지고 키스는 깊어진다. 숨이 가쁘게 쉬어질 때쯤, 선우의 입술을 풀어 준 남자가 대답해야죠, 라고 말했다.

“전무님이 좋은 건지…….”

남자의 눈이 선우의 얼굴을 훑는다. 짓궂은 눈동자가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선우는 뺨에 오르는 열을 느끼면서 대답을 했다.

“제가 밝히는 건지를요…….”

“돈 때문은 아니다?”

남자가 선우의 목으로 입술을 내리면서 말했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키득 웃었다. 좋네요, 라고 말하면서.

믿지 않겠지. 그럴 것을 안다.

그래도 그 셋 중에 하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돈은 아니라고. 당신과 몸을 섞고, 키스를 하고, 기어이 이 방에 들어오는 이유가 돈 때문은 아니라고.

그렇게 오해를 하도록 유도는 하고 있지만 실은 사정이 있는 거라고. 아마도 영영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럴 때는 그냥, 전무님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하는 겁니다.”

남자가 친절하게도 가르쳐 주었다. 선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뭘 또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이 웃겨서 선우는 조금 웃었다. 남자도 웃는다. 부드럽게 포개지는 입술이 달고 청량했다.

이상하지. 남자에게선 늘 청량한 냄새가 났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깊은 밤에도, 늘.

선우는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기대서 가만히 숨을 쉬는데 서문도가 선우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눈을 보며 말했다.

“밝히는 이선우 씨.”

놀리는 말에 선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뜨거워지는데 왜인지 웃음이 난다.

“정정. 존나 밝히는 이선우 씨.”

남자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말이지 낯이 뜨거워지는 말인데 귓가에 간지러운 바람이 들어오자 선우는 웃음이 터졌다.

“상스러운 말도 좋아하시고요.”

“아니에요.”

“아니기는.”

남자의 입술이 선우의 입술을 삼키듯이 물었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두툼한 혀가 미끄러지듯이 가르고 들어와 선우의 혀를 감았다. 농밀하게 감았다가 싸악 훑어 먹는 움직임이 노골적이었다.

으응.

키스가 깊어지자 안쪽에서부터 끓는 소리가 올라왔다. 그 소리를 멈추고 싶은데, 아무리 참아 보아도 한 번씩 목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긴 키스가 끝나고 입술을 뗀 남자가 엄지손가락으로 선우의 입술을 느리게 문질렀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겨 귀에 꽂아 준다. 그리고 살짝 얼이 빠져 있는 선우를 보면서 말했다.

“이마는 이 꼴을 해 놓고.”

남자의 눈이 선우의 상처를 살폈다. 이마의 찢어진 상처와 눈가의 찍힌 상처. 이제는 거의 가셔 가는 푸른 멍이 든 자리까지.

그때 선우는 엄마를 떠올렸다. 차가운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엄마는 걱정과 안쓰러움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아파서 어떡하니. 애틋하게 말하면서.

남자의 마음은 그저 가벼운 탄식임을 안다. 엄마의 깊었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저 스치는 가벼운 바람 같은 마음임을 알고 있지만.

상처를 살피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음이 뭉클거리려는 순간에 선우는 고개를 숙여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남자의 긴 손가락이 선우의 턱을 가볍게 잡아서 위로 들어 올렸다.

“말해요.”

뭐를요.

“안아 달라고.”

하려면 할 수 있는 말이, 목적을 위해서 생각 없이 내뱉었던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기어코 그 말을 듣겠다는 듯, 서로의 눈을 보는 시간 동안 끈질긴 침묵이 이어진다.

“안아 주세요.”

오랜 침묵 끝에 선우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푸른 밤으로 물든 천장 때문인지, 눈 속에 빛을 담고 있는 것 같은 남자 때문인지, 그 남자가 발라 준 약이 마음을 따끔거리게 해서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선우는 발끝을 들었다. 입술에 남자의 입술이 닿는다.

부드러웠다.

* * *

문도는 담배를 빼서 입에 물었다. 창가에 앉아 불을 붙였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날렸다.

정원을 건너가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객식구 하나 늘었다고 조심 좀 할까 했는데, 하고 싶다는 여자의 한마디에 훅 날려 버렸다.

하기야 객식구 따위,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밤이 내리기 시작한 정원을 여자가 걷는다. 바스락거리는 원피스의 소리와 카디건의 부드러운 촉감이 생생히 기억난다.

밤놀이를 언제까지 끌고 가야 하나.

담배 연기를 가늘게 뱉어 내면서 가늠을 해 보았다. 하루든 이틀이든 어지간히 몸을 섞고 나면 자연히 식어 버릴 줄 알았는데, 이선우에 대한 욕망은 날이 지나도 줄지 않았다.

‘작은 사모님께서 많이 우셨어요.’

이선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지. 많이 우셨다니.

목 꺾고 눈 뒤집어 가며 다리를 뻗댄 채로 악을 악을 썼을 텐데, 많이 우셨단다. 포장 한번 곱게 해 준다.

문도는 재를 툭 털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미련한 성격이라 서유라가 곁을 내주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가 다쳤다고 해서 괜찮냐고, 병원에 가 보지 않아도 되냐고 물어보는 서유라는 처음 보았으니.

문도는 밤의 정원을 지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걸음걸음마다 여자의 모습들이 책장처럼 넘어간다.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해야 한다던 이선우. 서유라의 만행을 미련할 정도로 견뎌 내던 이선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서유라를 위하는 이선우.

밤을 같이 보내고 싶다던 이선우. 파고드는 그를 어쩔 줄 몰라 하며 견디기만 하는 이선우. 카드를 받아 챙기는 이선우. 수줍은 듯 웃는 이선우.

뭐랄까.

여자는 도통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고는 하나,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결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일진대.

이선우가 보이는 모습들은 마치 제각기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하나로 합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일까.

“잘라야 하는데…….”

다시금 담배를 깊게 마셨다가 길게 내뿜은 뒤에 문도는 중얼거렸다. 이제 여자의 뒷모습은 아치형의 문을 지나고 있다.

‘안아 주세요.’

별것도 아닌 말을 힘겹게 뱉어 내던 여린 목소리를 생각했다. 흰 목덜미와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푸른 정맥을. 가늘게 내쉬던 여린 숨을.

필터 가까이 타오르는 붉은 불빛을 보면서 문도는 서유라의 외출을 떠올렸다.

서유라는 최지상을 만난다. 최지상은 여전히 약을 하고 있고, 그 말인즉 서유라 역시 다시 약을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건 조만간 사고를 치는 날이 곧 올 거라는 것. 곪다 못해 터지게 되는 그날이 되면 서유라는 아웃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유라의 트레이너로 고용한 이선우도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할 터.

‘정정. 존나 밝히는 이선우 씨.’

여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던 순간.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면서 예쁘게 눈을 휘었던 순간을.

어차피 끝은 정해졌으니, 그때까지는…….

문도는 담배를 비벼 껐다. 건너편 숙소동에 불이 반짝 켜진다. 내일 뵐게요. 이선우의 마지막 인사를 떠올리며 문도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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