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빡치니까
2층의 중문은 닫혀 있었다.
평소에는 늘 한 뼘쯤 열려 있었던 문이다. 오늘은 어쩌다 꽉 닫힌 것일 수도 있었지만, 선우에게는 왠지 꽉 닫힌 문이 남자의 언짢은 심기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선우는 후우,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황동색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아무런 답이 없었다. 씻는 중인가. 아니면 노크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마스터룸에 있는 걸까. 잠깐 생각하던 선우는 일단 들어가겠다 고하면서 문을 열었다.
“전무님, 들어가겠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멀쩡히 진열대 앞에 서서 재킷을 벗고 있었다.
선우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지만 서문도는 묵묵히 앞만 보고 있었다. 의도적인 무시였다.
“…….”
선우는 먼저 말을 건네 보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용건을 물어보기엔 서문도 전무의 언짢은 기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는 남자를 앞에 두고서 선우는 그저 말없이 서 있었다. 용건이 있어서 불렀을 테니, 할 말이 있으면 먼저 입을 열겠지 싶어서였다.
얼마쯤 서 있었을까. 장신구를 모두 풀어 내린 서문도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간을 긁듯이 문질렀다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공간을 내리누르는 것 같은 침묵에 선우의 마음도 납작하게 눌리는 것 같다.
사람을 불러 놓고 벌을 주듯이 세워 두기만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볼 수 있는 신세는 아니라서 가만히 서 있는데 서문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선우는 눈을 들었다. 서문도가 선우를 향해서 몸을 틀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 선우에게 말했다.
“빡이 치는데.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거든요.”
그러더니 선우를 향해 걸어왔다. 한 발짝 앞에서 멈춘 서문도가 선우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이마에서 눈썹, 눈썹에서 뺨.
남자의 시선이 선우의 얼굴에 길을 그렸다. 한 번씩 눈길이 오래 머무는 곳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상처들을 눈으로 짚어 본 남자가 말했다.
“이선우 씨한테 얻어터지는 취미가 있었나 싶고.”
그런 취미가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선우가 눈을 드는데 서문도가 말한다.
“그렇다 한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은데.”
서문도의 눈동자가 선우의 눈동자에 닿는다. 시선이 얽히자 잠시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얽힌 시선을 풀지 않으며 남자가 말했다.
“이상하게 빡이 친단 말이지.”
문도의 시선이 다시 이마의 상처로 올라갔다. 가늘게 눈살을 찌푸린 문도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보고해요. 처음부터.”
“아……. 네.”
다이닝룸에서 벌어진 일의 정황을 듣고 싶어서 보자고 했구나. 속으로 짐작을 한 선우는 유라의 하루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서유라 씨는 오늘 1시쯤 기상하셨고요, 점심엔 샌드위치 드셨습니다. 손톱 관리를 하셨고, 작은 사모님 새 차가 도착했다는 말에 지하 주차장으로 가셨습니다. 저와 같이 새 차 구경을 했고요. 그리고…….”
첩은 사치를 하면 욕을 먹는다고 했었던 서 회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장이 싸늘하게 돌아서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던 박소영과 창피하게 왜 이러냐고 타박을 했었던 서유라. 우르르 달려왔던 장 여사와 직원들까지.
선우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생각을 할 때였다. 잠시 뜸을 들이자 몸을 굽혀서 AV장의 서랍을 열던 서문도가 피식 웃는다.
“뭘 또 걸러서 말을 하려고 그러시나.”
박소영에 관련해서는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랬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서문도가 말했다.
“의도적인 누락. 자체적인 생략.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몸을 일으키며 말하는 서문도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마주친 눈빛이 온기 없이 서늘했다.
그런 게 아니라는, 생략 같은 걸 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말은 하려고 선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오히려 변명처럼 들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입을 연 선우는 보고를 천천히 이었다.
“새 차를 보신 작은 사모님께서 많이 실망하셨습니다. 새 차가 싫다고 하셨고요, 회장님께서는 그 말에 화가 나신 듯 보였습니다. 명 실장님이 회장님 모시고 들어가셨고, 사모님은 많이 우셨어요.”
서문도가 피식 웃었다. 그 바람에 선우가 말을 멈추었다. 문도가 선우에게 말했다.
“계속하세요.”
“직원분들이랑 유라 씨와 함께 작은 사모님 모시고 별채로 왔고, 유라 씨 쓰고 있는 게스트룸으로 일단 모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와인과 소주를 드셨고요.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다가…….”
“서유라가 던졌어요?”
다시 AV장의 서랍으로 몸을 숙이며 서문도가 묻는다.
“아니요.”
“박소영인가.”
할머니뻘이 되는 박소영을 이름으로 부르는데도 일말의 거리낌이 없었다. 선우는 서랍을 뒤적이는 문도에게 대답을 했다.
“네, 식사 중에 유라 씨가 했던 말에 작은 사모님께서 마음이 상하셔서 소주잔을 유라 씨에게 던지셨습니다.”
그때 문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등을 펴며 일어선 문도의 시선이 선우에게로 향한다.
“박소영이 서유라한테 잔을 던졌는데, 왜 이선우 씨 이마가 깨졌죠?”
“아, 그게……. 제가 마침 옆에 있어서요.”
그 말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설명이 된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요?”
“옆에 있는데 잔이 날아오니까…….”
“서유라를 감싸셨다?”
네, 하고 대답하며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라를 감싼 것이 질책받을 일인가. 저절로 몸이 움직였고, 본능적으로 판단했을 뿐이었다. 그건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서문도는 낮게 웃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 짜증이 난다는 듯 입매를 비틀어서 웃은 뒤 한숨을 쉬었다.
미간을 문지르다가 다시 한번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선우를 보며 묻는다.
“왜 그러고 살지?”
조금 망연해지는 기분이 드는 질문이었다. 갑자기 맞닥뜨린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이해가 안 돼서 물어요. 멍이 들 만큼 두들겨 맞고도 감싸고 싶을까. 나 같으면 반쯤 죽여 놓고 싶을 텐데.”
맞았던 것, 알고 있었구나. 내색이 없기에 모르는 줄 알았었다. 서문도가 한심하게 선우를 보고 있었다.
나도 그래요.
선우는 문득 소리를 내어 대답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서유라를 보면 한 번씩 목을 조르면서 묻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슨 짓을 해도 참으며 버티는 이유는.
짜증과 조롱을 숨기지 않는 남자를 보면서 선우는 솟구치는 마음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을 했다.
“서유라 씨는 제 고객이니까요.”
그 말에 남자가 웃었다. 그러다 선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이선우 씨 고객은 나야. 월급은 내 주머니에서 나갑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제가 돌보는 사람은.”
서유라 씨라는 뜻이었어요. 선우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서문도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물건에 누가 손대는 거 싫어합니다.”
“저는…….”
“알아요. 물건 아닌 거.”
그리고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몸도 섞고 있으니 내 여자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선우에게 서문도가 말했다.
“맞고 다니지 말아요. 고객님 빡치니까.”
설마 했는데, 서문도가 구급약이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서 선우에게로 다가왔다. 소파 테이블 위에 구급약 상자를 올려놓고는 소독약을 꺼낸다.
“이리 와요.”
소파의 팔걸이 부분에 걸터앉은 문도가 선우를 불렀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두 번 말하는 거 피곤하니까.”
“괜찮아요. 진짜로.”
거듭 말했지만 사양은 먹히지 않았다. 올 때까지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서문도 때문에 선우는 어색한 표정으로 문도의 앞에 섰다.
서문도가 소독약의 뚜껑을 따고 솔을 들었다. 차가운 소독제가 이마에 닿는다.
약이 스칠 때마다 선우가 조금씩 움찔거리자 아까보다 담담해진 말투로 서문도가 말했다.
“따가워서 그래요?”
물어보는 남자의 손길이 차분했다. 아까는 그렇게 무섭게 말을 해 놓고는 꼼꼼하게 약을 발라 주고 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약을 발라 주는데 선우의 기분이 이상해진다.
“아니요. 괜찮아요.”
선우는 일부러 소리를 내서 대답을 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약을 바르며 서문도가 말한다.
“불편해서 그런가.”
네, 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 라고 해야 하는지. 선우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서문도가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뒤늦게 입을 열어 보았지만,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선우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순간 무언가가 울렁이는 기분에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가 약을 바르던 손길을 멈추며 물었다.
“많이 아픈가?”
“조금……. 따가워서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하면서 감았던 눈을 뜨는데 시야가 온통 서문도였다.
후, 하고 상처를 불어 주는 남자 때문에 선우는 차라리 다시 눈을 감고 싶어진다.
“지혈제 뿌릴 거니까 고개 젖혀요.”
“네.”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선우는 고개를 젖혔다. 문도가 하얀 가루를 상처 위에 툭툭 뿌렸다. 크기가 맞는 밴드를 찾아 포장을 뜯는다. 그리고 선우의 이마에 붙여 주면서 말했다.
“가서 쉬어요. 많이 아프면 내일 병원에 가 보고.”
팔걸이에서 일어난 문도가 AV장의 서랍을 열어 구급약 상자를 집어넣었다. 선우는 조금 당황한 마음으로 문도를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잠자리를 갖지 않는 건가요. 묻고 싶은 선우를 보면서 문도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왜요, 하고 싶어?”
아무렇지 않게 던진 서문도의 말에 선우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선우에게 문도의 시선이 꽂혔다.
잠시간 말이 없이 서로를 보았다. 어딘가 열이 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선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서문도가 뜨겁게 웃는다. 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