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주제 파악
박소영의 한탄은 끝났다 싶으면 다시 시작이 되었다.
조리사 아주머니가 차려 놓은 음식들이 꾸득꾸득 말라 가는 식탁 위에는 와인 병이 하나둘씩 늘고 있었다.
“짠돌이 짠돌이 그런 짠돌이가 없어. 내가 아주 지긋지긋해. 어, 그래, 나는 이제 미련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어. 이 집 나가 버리면 그만이지. 명색이 재벌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똥차를 사 줘?”
서유라가 마지막 남은 와인을 탈탈 털어서 잔에 따른 뒤에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다.
“에이, 엄마 똥차는 아니지. 그거 국산 차 중에선 젤 비싼 모델이야.”
“넌 내가 지금 외제 차 못 받아서 이러는 줄 알아?”
유라의 말에 박소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니야?”
“내가 화가 나는 건, 회장님이 내 말을 무시해서 그런 거지! 왜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를 않냐고.”
와인을 꿀꺽 마신 박소영이 입을 닦은 뒤 크게 말했다.
“나는 외제 차가 좋다고 몇 번을! 어? 몇 번을 말했는데.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는 거 아니야. 어쩜 그래. 내가 회장님 모시고 산 세월이 얼만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양 집사의 등에 업혀 별채로 실려 온 이래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던 박소영은 와인 두 병에 분노에 찬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진짜 뭐 대단한 거 달랬어? 호텔을 달랬어, 병원을 달랬어? 그저 코딱지만 한 커피 프랜차이즈. 그거 하나만 달라는데 그걸 그렇게 안 들어주고. 차만 봐도 그래.”
본격적으로 식탁 의자 위에 다리를 접어 앉은 박소영이 열불이 난다는 듯이 하, 하고 숨을 터트리면서 말을 이었다.
“화끈하게 하나 사 주면 될걸, 만날 자기 차 비었으니까 그거 타면 된다, 우 대표 차 바꾸니까 타던 거 타라, 내가 거지야? 내 꺼, 내 명의, 이 박소영이 명의로 차 한 대 갖고 싶다는데 왜 자꾸 지들 꺼 쓰래?”
와인잔이 비었다. 두 병을 다 마신 서유라는 코를 훌쩍이며 일어나더니 와인 셀러를 열어 보고는 선우에게 말했다.
“야, 숙소동에 인터폰 넣어. 와인 몇 병 가져오라고. 아, 아니다. 엄마 와인 말구 소주 따자. 야, 아줌마한테 안주 좀 만들어 오라고 해.”
“네.”
선우가 숙소동에 인터폰을 하러 가는 사이, 유라는 크리스털잔에 소주를 따라 박소영의 앞에 주었다.
“첩. 그래, 첩이지. 사모님 돌아가신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나는 첩년이지. 30년 첩질 끝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네. 하……. 내 팔자야.”
잔에 들어 있는 소주를 단숨에 훌떡 마신 박소영은 금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내가, 소싯적에 내가, 정말 나 좋다고 쫓아다니던 남자들이 한 트럭이었는데. 어흐흐흑. 내가 바보지, 바보야. 멀쩡한 남자 두고 유부남한테 빠져선.”
박소영의 흐느낌에 서유라가 반찬으로 놓였던 진미채를 집어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멀쩡한 남자 만나지 그랬엉.”
“내가, 내가……. 그 구정물을 뒤집어쓰구, 일본까지 쫓겨 가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땅에서 내가 어떻게 버텼는데.”
“그러면 버티지 말지 그래썽.”
“나느은, 안 한다고 그랬다? 사모님 불벼락도 넘넘 무섭구 눈치 보는 것도 서러워서 그만하겠다고 그랬어. 그랬는데도 회장님이 서중호를 일본 지사장으로 발령을 냈잖아아.”
소영이 일본으로 쫓겨 가듯이 억지 유학길을 떠난 후에 서중호가 일본 지사의 지사장으로 발령이 났었다.
알거지로 쫓겨난 박소영에게 성의 표시를 하는 거라며 집도 내어 주고 차도 빌려주며 뜸뜸이 찾아와 편의를 봐주었고, 생활비를 대 주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유라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그만하려고 했으면 받으면 안 됐지. 집이며 차며 생활비며, 다 법인 걸루 써 놓구.”
“그럼, 내가 너 두고 쫓겨나는 그 수모를 당했는데 그 정도도 못 받니?”
“아 말이야 바른말로, 그래서 사모님, 아니, 큰엄마가 나 호적 올려 줬잖아. 나만 호적 올려 주면 일본으로 떠나서 다신 안 들어오겠다고 했다며. 영영 헤어진대서 올려 준 거라며. 그래 놓구 엄마가 입 싹 닦은 거 아님?”
이거 맛있네, 서유라가 다시 진미채를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박소영의 표정이 반쯤 일그러지는데 모르는 눈치였다.
“엄마. 주제 파악 좀 하고 살아.”
“뭐?”
“그렇잖아. 나는 아빠 자식이기라도 하지. 엄마는 버림받으면 끝이라고. 정신 차려.”
“이게 진짜.”
찰나의 순간이었다. 박소영의 팔이 올라가는 것을 보는 순간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서유라를 감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선우의 이마에 뜨끈한 고통이 느껴지고 이어 쨍그랑 소리가 나며 크리스털잔이 산산조각 났다.
“엄마!”
서유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유라 씨, 괜찮으세요? 안 다쳤어요?”
뜨끈한 머리를 감쌀 생각도 못 한 채 선우는 서유라에게 먼저 물었다. 서유라가 선우를 본다. 피가 흐르는 선우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엄마 미쳤지? 야,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아후, 진짜.”
허리에 손을 올린 서유라가 더운 콧김을 뿜었다. 선우는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감싼 뒤 아일랜드에서 키친타월 몇 장을 꺼내 지혈을 했다.
“아주 딸년 대가리를 깨트릴라고 작정을 했지?”
“니년이 싸가지 없는 소리를 했잖아!”
“그렇다고 잔을 던져?”
“아, 안 다쳤잖아!”
“쟤가 감싸지 않았으면 내 대가리 깨졌거든?”
모녀가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지혈을 한 선우는 사방으로 튀어 버린 파편을 대강 쓸어 모았다.
엎드려서 커다란 조각들은 골라내고 눈에 보이는 가루들을 키친타월로 한곳으로 모아 놓는데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주를 들고 온 조리사 아주머니일 거라 생각한 선우가 혹시 청소기가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할 때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짜증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뒷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걸어 들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문도의 입에서 하, 기가 막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위가 고요해진다.
* * *
서문도가 핸드폰을 들었다. 뚜르르— 신호음이 가는 동안에도 다이닝룸을 맴도는 정적은 여전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나고, 서문도가 말했다.
“여사님. 주방을 좀 치워야겠는데요.”
아니, 왜요. 장 여사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별건 아니고 잔이 깨져서. 아. 비상약은 어디 있었죠?”
뭐라고 설명을 하는 장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문도가 박소영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하 게스트룸에 잠자리도 봐주시구요. 네. 이제 쉬시겠답니다.”
문도가 전화를 끊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박소영이 머리를 치켜들면서 입을 열었다.
“어쩌지. 난 좀 더 마셔야겠는데? 마시던 건 마저 마셔야지 않겠어? 오늘 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거든? 서 전무도 한잔할래?”
박소영이 보란 듯이 와인잔에 소주를 따랐다. 서유라가 미쳤나 봐, 혀를 찼지만 박소영은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그럴까요.”
문도가 대답을 했다. 문도는 엉거주춤 서 있는 선우를 스쳐 지나 수납장에서 크리스털잔을 하나 꺼냈다. 박소영의 앞에 내려놓고는 손을 거두었다.
졸졸 술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찰랑거릴 정도로 술을 따른 박소영이 문도를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문도는 흘러넘치는 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마셨다.
“한 잔 더 줄까?”
“네.”
박소영이 다시 문도의 잔을 채웠다. 서문도는 한 번 더 단번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다시 제 손으로 잔을 채웠다. 훌떡 마시고는 또 한 잔을 따른다. 그 모습에 박소영이 굳은 얼굴로 문도에게 말했다.
“서 전무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랑곳하지 않고 문도가 한 모금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따랐다. 잔의 반이 찼을 때쯤, 바닥이 드러난 술병에서는 더 이상 술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문도가 피식 웃으며 얼굴이 굳어 버린 박소영의 앞에서 잔을 들었다.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마셨네요. 이제 쉬시죠.”
“서 전무, 지금 나 무시해? 내가 분명 더 마시겠다고.”
“고모님도 들어가시고.”
박소영의 말을 끊으며 서문도가 유라에게 말했다. 서유라가 어, 하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문도의 시선이 선우를 향했다.
“이선우 씨는 나 좀 봅시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문도가 발걸음을 떼었다. 소리 없이 걷고 있는데도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문도 전무가 2층에 올라간 뒤 작게 소란이 있었다.
회장이 저를 무시하니 새파랗게 어린 서 전무도 저러는 거라며 박소영이 펑펑 울었고,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 했다고 유라가 짜증을 내었다.
마침 청소를 하러 온 직원 아주머니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박소영을 달랬다. 짜증 내는 유라에게 들어가서 쉬시라 인사를 한 선우는 화장실로 향했다.
이마에 흐른 핏자국을 대강 닦아 내며 거울을 보았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났지만 깊게 베이지는 않았고, 살이 찢어지긴 했지만 꿰맬 만큼은 아닌 듯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데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멍에, 눈가의 상처도 모자라서 이번엔 이마까지.
최대한 멀끔히 보이도록 정돈을 한 뒤에 선우는 화장실을 나왔다. 계단을 딛는데 서문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을 보고는 소리 없이 커졌던 눈동자가. 어이없어하는 가벼운 웃음이. 단숨에 술잔을 비우며 보였던 싸늘한 표정이.
2층으로 향하는 선우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