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세컨드
“야, 엄마 새 차 나왔대. 가 보자.”
선우가 서유라의 손톱을 다듬어 주고 있을 때였다.
왼손을 쭉 내밀어 선우에게 맡긴 채 소파에 누워 있던 서유라가 박소영의 전화를 받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같이 가자는 말이 낯설어서 선우는 되물었다.
“빨리 가 보자. 뭘로 뽑았을까? 엄마랑 내가 궁금해서 아빠한테 물어봤거든. 근데 진짜 말 안 해 주더라. 기깔 나는 거면 나랑 바꾸자고 해야지.”
킥킥 웃으면서 서유라가 선우의 팔을 붙들었다.
“울 아빠가 얼마나 짠돌인지 모르지? 엄마 새 차 뽑는 거 처음이야. 맨날 법인 차랑 오빠들이 타던 거, 그거 그냥 쓰라고 하고. 겉으로야 뭐 번지르르하지.”
선우는 서유라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서 유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좋은 걸로 새로 뽑아 준다고 하면서 몇 번이나 그냥 넘어갔거든. 울 엄마 이름으로 된 재산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걸?”
서유라가 입을 삐쭉거리며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보았다.
“엄마 살던 아파트는 둘째 오빠 명의고 나 살던 빌라도 둘째 언니 명의. 아주 부부가 쌍으로 우리를 쥐었다 폈다 한다니까.”
서유라가 앞머리를 이리저리 쓸어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나랑 엄마는 현금도 잘 안 줘. 맨날 그넘의 카드 실컷 쓰라고 하는데, 한도 5천짜리, 어따 쓰냐? 남들은 재벌집 딸이라 호강하는 줄 아는데 나 사실 디게 힘들게 살았다?”
그때 지하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명 실장과 양 집사가 보였고, 커다랗게 커버를 뒤집어쓴 차가 보였다.
“저기 엄마 온다. 아주 좋아 죽네.”
서유라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멀리 본관 쪽의 출입구에 휠체어를 탄 서명구 회장과 휠체어를 밀고 있는 박소영의 모습이 보였다.
잡지나 기사의 사진에서만 보았던 서명구 회장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노년의 회장은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이 들어 보여, 숫자로만 보았던 89세라는 나이가 새삼 매우 많은 나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사진에서 보았던 호리호리한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염색으로 짙었던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축 처진 살갗과 생기 없는 회장의 낯빛에 비해 휠체어를 밀어 주는 박소영은 4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젊어 보여서 대비는 더욱 두드러졌다.
“아빠!”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들면서 반갑게 외쳤다. 회장도 서유라를 알아보고 벙긋 웃음을 지었다. 유라가 뛰어가서 회장의 옆에 섰다.
세 식구가 만나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할아버지뻘의 아빠. 언니처럼 젊은 엄마. 둘 사이의 성숙한 딸. 평범하다고는 하기 힘든 조합들이 모여서 사이좋게 웃고 있었다.
불현듯 서문도 전무 생각이 났다.
늘씬하게 키가 크고 넓은 어깨가 반듯한 남자. 웃으면 화사해지고 웃지 않을 때면 서늘해지는, 대체로 무감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
당황스러울 정도로 모습이 금방 그려지는 그 남자는 서유라의 조카다. 박소영은 그의 작은할머니가 된다.
본인보다 나이 어린 고모와 엄마뻘의 작은할머니.
이런 환경이라 무감하게 된 걸까. 아니면 무감해서 이런 환경 속에서도 태연히 살아가는 걸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눈을 들자 휠체어를 밀고 있는 서유라가 보였다.
회장이 몇 미터 앞에 서 있는 선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선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서유라 씨 퍼스널 트레이닝을 맡고 있는 이선우입니다.”
회장은 표정 없이 선우를 지나쳤다. 선우는 그림자처럼 뒤로 물러섰다.
“아우, 회장님 나 넘 떨린당. 회장님이 날 위해서 이렇게 준비를 하셨다니까 눈물이 날라 그래.”
박소영의 눈에 눈물이 금방 그렁그렁 차올랐다. 박소영은 검지손가락을 들어 눈 밑을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넘 좋아서 눈물이 다 나잖아. 이게 다 회장님 때문이야.”
어깨를 흔들면서 앙탈을 부리는 박소영을 보는 서유라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아빠, 빨리 까 보자. 궁금해 뒤…… 죽겠네.”
유라의 말에 서 회장이 흘흘 웃었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명 실장에게 신호를 주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명 실장이 양 집사와 함께 드리워져 있던 커버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아우, 아우, 나 어떡해. 떨려서 못 보겠어.”
차마 못 보겠다며 눈을 가려 버린 박소영이 손가락을 살짝 벌리며 실눈을 뜬다.
차분히 벗겨지는 커버 아래로 드러난 새 차는 금빛이 도는 베이지색의 국산 고급 중형 세단이었다.
“어…….”
박소영의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이 스르륵 내려오며 말문을 막아 버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 어때, 예……쁘지히? 뷰티, 뷰티이푸울. 소영이 전용이니까 그음색. 고오올드 칼라루다가.”
회장이 웃으며 박소영을 보았다. 굳어 버린 박소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어도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큽, 하고 숨죽인 웃음을 터트린 서유라는 박소영의 표독스런 눈빛을 받고 입을 꾹 다물었다.
허리에 손을 얹은 박소영이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커다랗게 소리를 냈다. 커다란 주차장에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왜, 왜 그래애, 소영이. 마음, 마음에 안 드는 거시야아?”
기분을 살피듯이 웃는 서 회장의 눈빛에 심지가 세워졌다.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살살 말을 하면서도 눈빛만은 빤하니 살아 있었다.
“지금 나 놀려요?”
“왜, 왜 그래 소영이.”
“놀리냐구! 세상에 어쩜 회장님이 나한테 이래! 예쁜 차 사 준 댔잖아! 그지 같은 중고차 던져 주면서, 내가 그렇게 뽀대 나는 차 한 대만 뽑아 달라구 그렇게 졸랐는데!”
분을 못 이긴 박소영이 소리를 바락 질렀다.
“내가 집을 사 달랬어요, 건물을 달랬어요, 그냥 차 한 대! 그거 하나 해 달랬는데에! 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돼요? 이 박소영이가, 차 한 대만도 못 하냐구우우!”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소여엉, 리, 릴랙스으. 진정……해야지히…….”
“싫어! 나 이 차 싫다구요! 이딴 국산 차를 쪽팔려서 어떻게 끌고 다니란 말이야!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악을 지르는 박소영을 서 회장은 가만히 보기만 했다.
“내가, 어? 내가 대체 뭐예요? 맨날 말로만 사랑한다지! 그렇게 카페 체인 하나만 내 이름으로 해 달래두 안 해 주고! 회장님한테 내가 뭐냐고!”
회장의 눈빛이 탁하게 가라앉는다. 서유라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천장만 보았다.
“소영이느흔…… 첩이지. 처업. 세컨드으.”
느리지만 또렷하게 한 번 더 발음하는 서 회장을 박소영이 경악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회장님, 지금 나보고 첩이라고 했어요?”
“처업으은, 사, 사치하면…… 못 써허어…….”
“사치? 이딴 차가 사치이?”
박소영이 팔을 걷어붙였다. 서 회장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눈빛이 뱀처럼 일자로 또렷해진다.
“부회장도……. 내 새끼……도. 국사안차……를 타는 데에……. 돈 한 푼…… 안 버는…… 소영이가, 외제……차아, 타며느은…….”
힘에 겨운 회장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욕, 요, 요옥, 요오옥,을…… 머억어. 그르믄 아, 안 되잔하?”
“아아아악!”
박소영의 짜증 어린 외침이 주차장을 울렸다.
“그, 그래서어, 시……시른, 거야하?”
“싫어요! 싫어! 아주 그냥 지긋지긋해!”
회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싸늘한 얼굴로 명 실장에게 눈짓을 했다. 명 실장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회장의 휠체어를 본관 방향으로 밀기 시작했다.
“에혀. 망했네, 울 엄마.”
서유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저녁 식사의 화두는 단연코 박소영의 새 차였다.
문도는 하나씩 먹기 좋게 싸 놓은 머위 쌈밥을 집으며 어머니에게 차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고하고 있는 장 여사를 보았다.
“회장님은 새 차 당장 치워 버리라고 하시고, 작은 사모님은 차고에서 펑펑 우시고. 자지러지게 우시는 바람에 우황청심환 들고 대기했잖아요.”
안 봐도 훤히 보였다. 머리를 뒤로 한껏 꺾어 가면서 주저앉아 발을 뻗대며 울었겠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박소영은 온 힘을 다해 울곤 했다. 내 팔자, 내 서러운 팔자를 울부짖으며.
“본관 들어오신 회장님은 문 딱 닫아 버리셨고요. 작은 사모님은 별채에 머리 싸매고 누우셨고. 본인 말로는 회장님이 새 차 다시 뽑아 줄 때까지 절대 본관 안 올 거라는데…….”
장 여사가 말꼬리를 흐리며 우현희 앞으로 조르륵 보리차를 따라 주었다. 우현희가 호박잎 쌈밥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장 여사에게 말했다.
“호박잎이 아직 남았었나 봐요?”
“요게 마지막. 대표님이 좋아하는 거라 김냉에 내가 잘 모셔 뒀죠.”
“매번 고마워요. 덕분에 입맛이 도네.”
“이럴 때 보면 대표님하고 전무님하고 아주 입맛이 판박이라니까. 돌아가신 우 회장님도 그러셨구요.”
장 여사의 말에 우현희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사님, 당분간 별채로 가셔서 작은어머님 식사 신경 좀 써 줘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고개 끄덕인 장 여사가 물러났다.
“며칠은 별채가 시끄럽겠다.”
우현희가 문도를 보면서 말했다. 문도는 대답 없이 피식 웃고는 양배추 쌈밥을 집었다.
아주 나갈 용기는 없고 보란 듯이 시위는 해야겠고. 드러눕기에 별채가 딱이긴 했다.
“네오 펀드 건은 알아봤니?”
“대강은요. 이름을 네오&리로이로 바꿨더라고요. 서창도 영어 이름이 리로이인 거, 아세요?”
우현희가 가볍게 웃었다. 아직 별건 없지만, 서용호 일가의 자금을 운용할 것이 뻔한 헤지펀드였다. 어떤 식이 될지는 지켜보면 알 것이고.
“우리 서용호 사장님께서 지분 정리도 시작하셨고, 지켜볼게요.”
정원으로 이어지는 폴딩도어를 열어 놓아서인지 식탁까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지난밤이 만족스럽긴 했나 보다. 파르르 떨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발 그만 만지면 안 되겠냐고 묻던 이선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별채로 건너가면 바로 보고를 받으려 했는데, 박소영이 있다 하니 아무래도 하루 정도는 미뤄야 하겠지. 문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둑해지는 정원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