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받아
서유라가 늦잠을 자는 동안 선우는 새로 산 핸드폰에 유심칩을 끼워 넣었다. 새 핸드폰에 맞추어 워치도 세팅을 하고 매뉴얼을 익혔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서유라는 기상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가져다 놓을 겸, 선우는 정오에 별채를 나왔다.
숙소동으로 가는 길이 온통 초록이다.
이름 모를 꽃들이 화사하게 피었고, 연녹색이었던 새순들이 짙게 물들어 가며 푸르름을 뽐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흰 구름이 바람에 밀려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참 무심하게도 흐른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든 밤은 지나고 아침은 왔다. 어떤 날에도 햇살은 내리쬐며 나무는 자란다.
당연하였던 일상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조차 불어오는 봄바람은 따뜻하기만 해서.
선우가 멀리 구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선우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숙소동 전원의 텃밭에서 조리사 아주머니가 선우를 부르고 있었다.
“네.”
“점심 먹으러 들어갈 거지? 잘됐다. 이것 좀 가지고 가.”
파 몇 뿌리와 부추, 그 옆에는 쌈 채소와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소쿠리 안에 가득이었다.
“이게 뭐예요?”
“이건 부추, 삼채, 이쪽은 머위잎이랑 줄긴데 전무님이 좋아하거든.”
전무님이라는 게 서문도를 말하는 걸까. 선우가 생각하는데 조리사 아주머니가 이어서 말했다.
“저녁은 본관에서 먹는대서 이따 머위잎 찐 걸로 쌈밥 올릴라구. 젊은 사람이 쓴맛을 좋아하데. 나는 이 나이까지도 쓴 건 별로던데. 비위가 좋은가 봐.”
서문도 전무가 고들빼기니 씀바귀니 쓴맛이 나는 음식들을 한 번씩 찾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리사 아주머니가 소쿠리를 건네주었다.
“막내 아가씨는 아직도 안 일어난 거지? 팔자 좋아.”
선우는 흐릿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거 마저 따서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네.”
선우는 소쿠리를 안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주방의 식탁으로 들고 가는데 조리대에 서서 밥을 뜨고 있는 옥수댁의 모습이 보였다.
들어오는 선우를 보지 못하고 요리를 하고 있는 조리사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그럼 그냥 스쳐 가는 사이인가 보네.”
“그런가 봐. 그 뒤로 살펴봤는데 더 나오진 않더라구.”
“거봐. 내가 뭐랬어.”
“아니, 그런데 희한하지. 오늘 아침엔 시트가 엄청 구겨져 있는 거야. 원래 전무님 자고 나면 안 그렇거든.”
옥수댁의 말에 주방으로 들어오던 선우의 발걸음이 그대로 굳었다.
“이상한 느낌이 싹 들더라고? 그래서 여자 머리카락 같은 게 떨어졌나 싶어 잘 살폈는데 없더라구.”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저런 부분까지 살펴볼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기에.
“으이그, 관심 거둬. 드라마 좋아하더니 그저 그런 거에만 관심이 있지.”
“재밌잖아.”
옥수댁이 어깨로 조리사 아주머니를 치면서 실실 웃었다. 그런 옥수댁이 웃긴다는 듯이 보던 아주머니가 입구에 서 있던 선우를 보았다.
“선우 씨 뭐 해, 들어와. 머위 가져왔구나.”
“네.”
굳어 있었던 선우는 소쿠리를 조리대 위에 올려놓으며 애써 둥근 미소를 지었다. 선우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건지, 조리사 아주머니가 옥수댁에게 말했다.
“본관에서 알면 괜히 골치만 아플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데려오겠어. 널린 게 호텔인데.”
“그렇긴 해. 얼마나 좋을까. 있는 집에서 남자로, 그것도 잘생기게 태어났으니. 세상이 다 제 꺼 같겠지, 뭐.”
선우의 밥까지 그릇에 담으면서 옥수댁이 이어서 말했다.
“난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돈 많고 잘생긴 남자로 태어날 거야. 사는 게 얼마나 재미지겠어. 전무님 봐, 가만히만 있어도 여자들이 아주 그냥 불나방처럼 몸을 던진다잖아.”
선우는 숟가락을 놓았다. 자신 같은 여자들이 많았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냉소적인가.
“나 같으면 죄다 후리고 다닐 텐데 말이야. 아니, 오히려 지긋지긋하려나. 하기야 하도 겪어서 감흥이 없긴 할 거야.”
“선우 씨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 진짜.”
선우는 그저 난처한 웃음을 보이고, 양 여사는 주책이라며 옥수댁에게 그만하라고 핀잔을 줄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왔습니다앙.”
애교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온 사람은 박소영의 매니저인 송혜정과 본사의 대내협력실장인 명규진이었다.
“혜정 씨 오랜만. 규진 씨도 오랜만이네.”
신발을 벗던 규진도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선우도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건넸다.
“어쩐 일이야. 점심들은 먹었고?”
조리사 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네며 식사 여부부터 확인을 했다. 송혜정이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으며 대답을 한다.
“아뇨. 아직 식사 전이에요. 오늘 사모님 새 차 나오는 날이잖아요. 새 차 뽑으면 필요하다고 이것저것 사다 달라고 하셔서요.”
“아니, 근데 뭐 얼마나 대단한 차를 뽑아 주시길래 비밀에 부치셨대? 막, 뭐 그 뭐냐 람보, 그거 있잖아. 람보…….”
옥수댁이 더듬거리자 송혜정이 끼어들었다.
“람보르기니요?”
“어, 그래. 그런 거 뽑아 주시려는 건가?”
“어우, 그럼 너무 좋겠당. 람보르기니 아니구 포르쉐만 돼도 좋겠어요. 실물 진짜 넘넘 예쁘던데. 지난번 비엠은 우 대표님이 타시던 거라 연식이 오래됐다고 사모님이 싫어하셨거든요.”
“오래돼서 싫어했겠어? 중고를 쓰라고 하니깐 그러신 거지.”
비엠이라면 서유라가 지금 쓰고 있는 차였다. 중형 세단이었는데, 서유라가 쓰고 싶다 하니 박소영이 잘되었다며 이참에 차를 바꿔야겠다고 흔쾌히 차 키를 넘겨주었다.
“차는 언제 나온대? 회장님이 뭘로 뽑으라 하셨어? 응? 아주 요란뻑적지근하게 뽑아 주셨겠지?”
명 실장을 향해 물어보면서 옥수댁은 밥을 날랐다. 선우도 상을 차리는 것을 도왔다.
“2시쯤 딜러가 가지고 온다고 했어요. 모델은 그때 보시면 됩니다.”
회장 일가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사람이니 차를 뽑는 것도 모두 명 실장의 손을 거쳤을 거였다.
이런 호기심에도 명 실장은 흔들리지 않으며 담담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명 실장의 인사를 시작으로 다들 숟가락을 들었다.
“어떠세요, 지낼 만한가요?”
어묵볶음을 집어 드는데 명 실장이 선우를 보며 물었다. 선우는 젓가락을 내리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 있는 음식을 씹어 삼킨 뒤 살짝 미소를 보이며 대답을 했다.
“네.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반짝, 하고 손목에 차고 있는 워치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
[핸드폰은 찾아봤나요?]
A였다.
시계 위로 뜬 메시지를 확인한 선우는 조금 더 식사를 하고 잘 먹었노라고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올라왔다. 핸드폰을 꺼내서 메시지창을 열었다.
찾고 있어요, 까지 쓴 다음에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혹시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나요, 라고 쓰다가 뒤로 가기를 눌러서 전부 지웠다.
메시지창을 제일 위로 올려서 처음부터 주고받았던 문자를 하나씩 읽어 내렸다.
[민우 핸드폰 서문도가 가져갔습니다.]
[누구세요? 민우를 아시나요?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증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로얄 크라운 호텔 주차장입니다.]
[저에게 왜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거죠?]
[제가 왜 이선우 씨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냐면]
[제 핸드폰도 서문도 전무가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범인을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핸드폰입니다.]
선우는 한참을 뚫어져라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A로 저장해 두었던 이름을 눌러서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길게, 오래도록 울렸다.
짐작대로 A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우는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길고 집요한 벨 소리가 오래오래 방 안을 맴돌았다.
한 번 더.
선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아. 이렇게 뒤에서 익명으로 메시지만 보내지 말고. 받아.
무슨 오기인지 모르겠다. 선우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나오면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벨 소리를 듣다가 끊어지면 다시 눌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끝이 없이 울릴 것 같았던 벨 소리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달칵.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떻게 호칭을 해야 하지. 무엇을 물어봐야 하나. 한꺼번에 생각이 엉켜들었다.
선우는 마른침을 삼키고 숨을 길게 뱉어 냈다. 긴장된 마음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 …….
“이선우입니다.”
— …….
상대방의 침묵이 선우에게 확신을 더해 주었다.
선우의 번호를 알 수 있는 사람. 서문도가 핸드폰을 가져갈 만한 사람.
선우가 서문도의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사람. 서유라와 그 밤에 같이 있었을 사람.
범인의 사진을 찍었을 사람.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 ……최지상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선우는 눈을 꾹 감았다.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선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화창한 봄날, 어룽지는 햇빛을 보는데 목이 메어 왔다.
“정말로……. 최지상 씨인가요.”
— 네.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최지상은 의외로 빠르게 자신을 드러냈다.
묻고 싶은, 듣고 싶은 것들이 한꺼번에 뒤엉키면서 선우의 목울대를 울렁이게 했다.
선우는 주먹을 꾹 쥐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 창문 너머 초록의 정원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건넨 말이었다. 남자가 수화기 너머에서 흐음, 하고 길게 숨을 쉬었다.
— 지금 한창 드라마 촬영 중이라서요. 도무지 시간을 뺄 수가 없어요. 어쩌다 시간이 비어도……. 아시죠? 유라 누나 봐야 하거든요. 촬영이 거의 끝나야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저는 좋아요.”
— 그럼, 촬영 끝나고 한가해지면 연락드릴게요. 이 번호로 드리면 되죠?
최지상의 목소리가 상냥하다. 그게 선우의 비위를 긁어내렸지만…….
“네. 감사합니다.”
선우는 담담히 대답을 했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발밑에서 일렁거린다. 서유라에게 건너가야 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