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32화 (32/168)

32. 피곤과 비례하는 것

남자가 선우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머금고서 부드럽게 당겼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틀어 거듭 머금으며 선우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왜…….

라는 의문은 천천히 움직이는 혀의 감각에 흐릿해져 갔다.

남자에게서 쌉싸름한 담배 냄새가 났는데 이상하게도 역하지 않았다.

대신, 그런 생각은 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느리게 타들어 가는 담배의 불빛 같다고.

싸악 싸악 안쪽을 훑고서 질척하게 얽혀 든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으면서 문도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키스가 깊어지며 선우의 허리가 뒤로 휘었다.

하아.

문도가 입술을 떼는 순간, 선우는 파르르한 숨을 뱉었다.

선우를 잠시 바라보던 문도가 팔을 교차하여 티셔츠를 벗었다. 이어 선우의 입술을 다시 파고들면서 손으로는 카디건의 단추를 풀었다.

“아……. 전무, 전무님.”

뒤로 밀리며 선우는 문도의 어깨를 잡았다. 각도를 틀기 위해 포개었던 입술을 뗄 때마다 소리 내어 문도를 불렀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우를 밀어붙였다.

간신히 눈을 마주하였을 때는 선우의 몸이 이미 침대에 눕혀진 뒤였다.

“왜요.”

선우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문도가 말했다.

“아까 끝난 거…….”

문도가 낮게 웃었다. 피로에 잠긴 눈이 느리게 깜빡인다.

방금 전, 무자비할 정도로 집요하게 선우를 가져 놓고는 툭 털어 내듯 몸을 일으켰던 남자였다.

뭉쳐 있던 욕망을 해소한 남자는 그녀를 버리듯이 내버려 두고 욕실로 향했었다. 그게 정사의 끝이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끝난 거 아니었나요.

선우의 눈빛을 읽은 문도가 피곤한 웃음을 웃었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선우를 향했다.

‘속이지 말아요. 시계도 사 줬는데.’

태연히 웃으며 경고를 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선우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애써 삼켰다. 대신 흐리게라도 미소를 보이려 애쓰면서 말했다.

“아까 좀 힘들었어서요.”

사실이기도 했다. 서문도가 일으키는 감각들이 무서워서 조금 성급하게 삽입을 요구했었다.

제어할 수 없는 감각들에 휩쓸리는 것보다 차라리 아프고 버거운 게 나을 것 같아 준비가 되기 전에 남자를 품었기에 받아들였던 부분이 얼얼하고 쓰라렸다.

문도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는 선우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피곤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면 믿으려나.

숨 쉴 틈 없이 흘러갔던 하루였다.

세 곳의 홍보 대행사 PT가 있었고, 임원 회의와 협력사 미팅이 있었다. 출장을 갔던 사이에 밀렸던 보고서가 가득이었고, 저녁에는 따로 법무팀 미팅을 겸한 자리가 있었다.

그 와중에 틈틈이.

여자의 다리를 벌리는 상상을 했다. 1,390만원짜리 문자 한 통이 불러일으킨 욕정이었다.

피곤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눈알이 뜨거운 지경에 이르렀을 땐 씨팔, 정말이지 그 짓을 할 생각뿐이었지.

“그거 알아요?”

문도는 아래에 깔려 있는 선우의 옷깃을 벌리면서 말했다. 아까 보았던 크림색의 브래지어가 다시 보인다.

“나는 피곤하면 살짝 맛이 가거든.”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갔다는 것에 동조하는 건가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차분히 브래지어를 벗기면서 문도는 말했다.

“오늘이 그래요.”

독한 술을 오래 굴린 뒤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은 밤. 그럼에도 취하지 않는 밤. 느긋하게 여자를 탐하고 싶은 밤.

뜨겁고 좁은 곳에 몸을 묻고서 느리게 움직이고 싶은 밤. 켜켜이 쌓인 피곤을 여자의 몸속으로 모두 풀어 버리고 싶은 그런 밤.

문도는 선우의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 머리를 내려 깊이 베어 물었다. 이선우의 허리가 허공으로 들렸다. 흠뻑 취할 만큼 여자를 맛보고 싶은 밤이었다.

* * *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나 보다.

선우는 느리게 몸을 돌렸다. 몇 시쯤 되었나. 일어나야 하는데.

눈을 감고서 생각을 하다가 다시 한번 까무룩 정신을 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수렁 같은 잠이 이어진다. 수마가 발목을 감아서 잠에서 깨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선우가 제대로 눈을 뜬 건 알람 소리가 여러 번 울렸을 때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서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동이 트는 새벽의 푸른 빛이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느껴진다.

어제는.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선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속으로 소리를 내었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가리고픈 심정이었다.

제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는 끈적한 기억들을 전부 지워 내고 싶고, 무엇보다 서문도 전무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지난밤의 기억을 몽땅 지워 버리고 싶었다.

어젯밤의 나는. 그런 나는, 내가 아닌데. 그런 건 내가 아닌데.

남자의 손길 아래에서 무방비하게 흐느꼈다. 농도 짙은 애무에 몇 번인가는 애원도 했었다.

제말 그만해 달라고. 더는 느끼고 싶지 않다고. 열기를 내 안에 지피지 말아 달라고. 그런 식으로 나를 헤집지 말아 달라고.

처음 남자와 몸을 섞었을 때는 어딘가가 깨어진 것처럼 충격을 받긴 했지만,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은 들었던 적 없었는데.

‘왜요, 미치겠어?’

탁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예고 없이 귓가에 울렸다.

‘네, 네에, 그러니까 제발, 제발요.’

무엇을 애원하는지도 모르고서 흐느끼던 자신의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선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여서 기억을 지워야 했다. 지워지지 않는다면 묻어 두고서 모른 척해야 했다.

“아.”

책상 위에 올려진 작은 박스 두 개가 보였다. 어제저녁에 받은 택배였는데 풀어 보지도 못했다.

일전에 주문한 핸드폰과 손목에 차는 워치였다. 매번 새로운 메시지가 있을까 마음을 졸였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서유라가 자는 시간 동안 사용법을 읽어 봐야지, 라고 생각을 했을 때였다. 선우의 고개가 창문을 향해 퍼뜩 돌아갔다.

콘돔.

지독할 정도로 이어졌던 정사 때문에 잊고 있었다. 서문도 전무가 땀이 밴 몸을 일으켜 씻으러 들어갔던 것은 기억에 있었다.

그 뒤로 눈을 감았던 것 같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아주 짧게 잠을 잤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서문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뺨을 쓸었을 때였다.

서문도는 선우를 일으켜 세워 차분히 옷을 입혀 주었고, 친히 중문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가 봐요.’

데려다줄 수 없어서 미안하네, 라고 했었다.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선우는 시계를 보았다. 6시. 아직 서문도 전무가 별채에 있을 시간이다. 서둘러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최대한 빨리 별채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 * *

서문도 전무는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하고서.

“일찍 왔네요.”

팔에 걸쳤던 슈트 재킷을 소파에 올려놓으며 서문도가 말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셔츠에 주름 하나 없이 쭉 뻗은 짙은 색의 팬츠.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머리. 길고 탄탄한 몸이 내뿜는 싱싱한 기운까지.

탁하게 가라앉았던 지난밤의 모습들은 온데간데없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네.”

안녕히 주무셨냐는 말을 하려고 선우가 입을 열었을 때 서문도가 싱긋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잘 잤어요?”

뭐랄까.

선우는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지난밤 땀이 끈끈하게 배어 나올 정도로 몸을 썼던 사람은 남자였다.

선우가 힘들다고 말했을 때도 남자가 웃으며 말하지 않았던가. 힘은 내가 쓰는데 왜 이선우 씨가 힘들다고 하는 거냐고.

주로 누워만 있었던 자신은 아직도 발목이 질척한 밤에 잠겨 있는 것 같은데, 남자는 홀로 빠져나가 더없이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유하게 선우를 스쳐 지난 서문도가 커피머신의 전원을 올렸다.

“커피?”

지잉, 내려오는 커피 소리와 함께 서문도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든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급하게 건너온 이유를 잊을 뻔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전무님, 어제, 그, 썼던…….”

커피 냄새가 짙게 퍼졌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서문도가 들어 올렸다. 평온한 얼굴로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선우는 잠시 하려 했던 말을 잊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과 몸을 겹쳤었나. 꿈은 아니었나. 어떻게 이렇게 멀고 멀까.

“어제 썼던 콘돔 말입니까.”

뜨거운 김이 오르는 잔을 아일랜드에 내려놓으며 서문도가 말했다.

선우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으면 식사를 차릴 아주머니가 건너올 시간이다.

“제가 잠깐 침실에 올라가서…….”

2층으로 가는 계단 쪽을 흘깃 보면서 선우가 작게 말할 때였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서문도가 담담하게 말했다. 알아서 치워 놓겠다는 뜻일까. 선우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만 해도 그게 뭐라고 치워 둬야 하냐고 말했던 사람인데.

“아니에요.”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잘난 서문도 전무의 손으로 직접 콘돔을 치우게 만들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툭 던졌던 콘돔처럼, 밤을 보낸 흔적 따위 아무렇지 않아 했던 그 무감함이 못 미더웠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언젠가 귀찮아서 안 치울 것이고, 다시금 추측성 소문이 돌 것이다.

옥수댁 아주머니, 혹은 장 여사가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고 말 테고, 사람들의 시선이 선우에게 쏠릴 터였다. 그런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말에 서문도가 선우를 물끄러미 본다. 길다 싶을 정도로 오래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네, 하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는데 서문도가 태연히 말했다.

“그거 내 주머니에 있는데. 굳이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고.”

선우의 입이 더듬더듬 열렸다가 닫혔다. 할 말을 잊은 선우를 보며 서문도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니에요. 내가.”

무슨 소리야. 그게. 제발 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짓들은 기어코 했으면서.

선우의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을까. 서문도가 크게 웃었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아침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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