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1,390만원 @AW
뺨을 툭 건드린 서문도가 선우를 스쳐 갔다. 선우는 서문도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맞는 말이었다. 전부 다, 맞는 말이다. 아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이쪽이야말로 곤란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할퀴어진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버려진 콘돔으로 인해 선우가 곤란해지는 일 따위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말투.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선우를 비웃는 것 같았던 그 느낌.
서문도에게 이선우는 아이를 가져서라도 한몫을 잡고 싶어 하는 기회주의자였고, 돈 몇 푼에 쉽게 몸을 던지는 여자였다.
모두가 선우 스스로가 자초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한 것임을 알고 있어도, 상처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딩, 소리가 나고 서문도 전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자가 내려가고 나서야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이런 일, 이런 취급, 이런 상황들이 처음이라 그런 거지. 아직은 면역이 없어서 그래. 익숙해지면 별일 아닐 텐데.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런 일로 일일이 마음이 상하고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민우의 핸드폰을 찾으려고.
선우는 마음을 다잡고 계단을 통해 2층에 올라갔다. 조금 있으면 조리사 아주머니가 서문도 전무가 먹었던 그릇들을 정리하러 올 시간이었다.
치우고 싶으면 알아서 치우라고 했지. 허락을 얻었으니 2층 중문을 조심하지 않고 열었다. 곧장 마스터룸으로 들어가 휴지통을 찾았다.
파우더룸 앞에 놓인 휴지통에서 아무렇게나 던져진 콘돔을 발견했다.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서 몇 겹으로 감싼 뒤 집었다. 다시 몇 겹의 휴지로 감싼 뒤 주머니에 넣었다.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것일 뿐이다. 남자와 잠도 잤는데 쓰고 난 콘돔 하나를 못 주울까.
내일부터는 꽁꽁 묶어 둘 비닐 팩을 챙겨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선우는 1층으로 내려왔다.
9시를 조금 넘겼을 때, 서유라가 일어났다. 크게 하품을 하면서 방문을 열고 나온 서유라가 선우를 보고 굿모닝, 하고 인사를 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 맞다.”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던 서유라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졸졸 소변을 누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서유라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지상이 촬영 취소됐대. 만나러 나갈 거니까 매장에 예약 좀 해죠. 지난번에 말해 놨던 재킷이랑 청바지 살 거거든. 오픈하고 바로 볼 거라구, 10시 반 타임 잡아 놓고.”
“네.”
“아, 글구 지상이가 스시현 초밥 좋아하거든. 도시락 포장해서 가져와. 룸 넘버는 이따 보내 줄게. 룸서비스는 왤케 맛이 다 똑같니.”
서유라는 하암, 크게 하품을 하더니 변기의 물을 내렸다.
“질려서 못 먹겠드라. 특초밥으로 해서 가져와.”
“네. 12시쯤 올려 드리면 될까요?”
“응.”
서유라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 했다.
“저기, 유라 씨.”
“응?”
“잠깐 숙소동에 다녀올게요. 핸드폰이랑 면허증을 놓고 와서요.”
“어우, 진짜 니 핸드폰 때문에 불편해 죽겠어. 맨날 뭐가 다 거기 있는 거야. 서문도 그 새끼는 하여튼 나 편한 꼴을 못 보지.”
투덜거리며 문을 닫은 서유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흥얼거리며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숙소동으로 건너가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휴지에 꽁꽁 싸 둔 콘돔은 주방에서 챙겨 온 작은 비닐 팩에 담았다.
사선으로 메면 양손을 자유롭게 해 주는 크로스백을 습관처럼 꺼냈다. 짐을 들고 다니기가 편해서 서유라와 외출 시에는 늘 사용했던 백이었다.
그 안으로 핸드폰과 지갑을 넣다가 선우는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어제 받은 카드로 뭐라도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나.
‘계산은 확실한 게 좋죠.’
서문도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하루 종일 서유라와 붙어 있어야 하는 일의 특성상 따로 쇼핑을 할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다.
서유라가 최지상과 호텔에 있는 동안 어차피 백화점에서 대기를 해야 하니까.
그래. 오늘이 좋을 것 같다.
계산은 확실한 걸 좋아하는 여자로, 물욕에 눈이 멀어서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여자로 똑똑히 인식을 시켜 주려면.
아이가 생기면 곤란하다는 핀잔을 들은 오늘이야말로 쇼핑하기에 제일 좋은 날이 아닐까.
선우는 옷장 한쪽에 걸려 있는 외투를 집었다. 옷깃을 뒤집어 안쪽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혹시 누구에게 들킬까 싶어 작은 파우치에 담아 넣어 두었던 서문도 전무의 카드를 꺼냈다. 잠시 카드를 바라보다가 지갑에 넣고 단단히 잠갔다.
뭐라도 사게 된다면 서유라에게 들키지 않고 가지고 와야 했다.
선우의 시선이 숙소동에 짐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들고 왔던 쇼퍼백에 닿았다. 쇼핑한 물건을 담아도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한 사이즈였다.
선우는 크로스백에 담았던 핸드폰과 지갑, 차 키와 뭉친 휴지 덩어리를 담은 비닐 팩까지 전부 꺼내서 쇼퍼백에 옮겨 담았다.
이제 다 됐다.
허리를 펴면서 쇼퍼백을 어깨에 걸치는데, 문득 참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의 대문을 찾아 헤맸던 일이 엊그제 같고, 서유라에게 물벼락을 맞았던 날이 바로 전날 같은데.
앞으로 앞으로 노를 젓다 보니 해안선이 까마득하게 멀어진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별채의 주인과 잠을 자고, 카드를 받고, 쇼핑을 하러 가고.
이제는 정말로 뒤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수 없으니 그저 이렇게 계속, 노를 저어 앞으로 갈 수밖에. 그러다 보면 무엇이라도 알게 되지 않을까.
막연한 희망으로 선우는 옷장 문을 닫았다. 서유라가 기다리고 있는 별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이건 계속 품절이었다가 어제 막 들어왔는데요, 심플해도 다이아라서 포인트가 되거든요. 한번 보여 드릴까요?”
진열장 안쪽의 서랍을 열면서 매장의 직원이 선우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네. 보여 주세요.”
서유라를 호텔로 보내고 백화점을 돌다 들어온 매장이었다. 선우는 직원이 꺼내 주는 귀걸이를 보고는 가격부터 물었다.
“이건 얼마예요?”
“234만원입니다.”
가방 안에 티가 나지 않게 넣으려면 작은 물건이 좋을 것 같았고, 반지는 왠지 꺼려져서 귀걸이를 보는 중이었다.
“더 큰 사이즈는 없을까요? 사이즈 큰 거는 얼마죠?”
“MM 사이즈는……. 잠시만요.”
직원이 진열장 안쪽에서 조금 더 큰 다이아 귀걸이를 꺼냈다.
“349만원이네요.”
평소라면 억 소리가 날 가격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서문도 전무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조금 더 비쌌으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진열장을 둘러보던 선우의 눈에 시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시계는 얼마예요?”
“베누아요?”
직원이 타원형의 시계를 짚으며 말했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열장을 열며 말했다.
“이거 어제 막 들어온 건데, 클래식 라인은 평소에는 진짜 보기 힘든 거거든요. 저도 실제로 본 건 어제가 처음인데 너무 예쁘죠?”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예쁘고 비싼 것들이었다. 하지만 선우가 알고 싶은 건, 가격이었다.
“얼마죠?”
직원이 뒤집어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1,390만원입니다.”
가격을 듣는 순간 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직원에게 말했다.
“그걸로 주세요.”
“이걸로 드릴까요? 그럼 잠시만요. 고객 등록 되어 있으시죠?”
“아니요.”
“아, 그러면 등록부터 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주세요.”
선우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카드를 받았다.
“이쪽으로 오셔서 잠시만 앉아 계시면, 결제해 드릴게요.”
안내된 곳은 안쪽의 소파 자리였다. 탄산수를 한 병 놓아준 직원은 안쪽으로 들어가 한참 뒤에 나왔다.
산 것은 시계 하나인데, 박스에 보증서, 구매 영수증까지 주렁주렁 딸려 왔다.
무상 수리 보증 기간은 어떻게 되는지, 줄은 어떤 식으로 교체할 수 있는지, 이런저런 설명까지 듣고 나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감사합니다.”
붉은색의 쇼핑백을 안겨 주며 인사를 하는 직원에게 선우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매장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로 화장실로 직행을 했다.
빈칸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걸었다. 쇼핑백을 열고 보증서와 시계가 들어 있는 작은 박스만 쇼퍼백 안에 챙겼다.
이제 나가는 길에 휴지통에 쇼핑백을 버리면 된다. 서유라 몰래 쇼핑을 한 것뿐인데 한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선우는 긴 숨을 내쉰 뒤 문을 열었다.
* * *
핸드폰이 짧게 진동을 했을 때, 문도는 홍보 대행사의 서도 그룹 캠페인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중이었다.
시대에 발맞춘 각종 홍보 수단과 그 효과에 대해 브리핑이 줄줄 올라오며 화면이 어지럽게 교차할 때, 문도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집었다.
[web 발신]
YH카드(2594) 승인
서*도 13,900,000원(일시불)
한성백화점아뮬레뜨점
잠시 문도는 뭐지, 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다 아, 하고 생각해 냈다. 여자에게 건넸던 카드였다.
이렇게 또 착실하게 그어 주시나. 그렇게 생각하며 숫자를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1,390만원.
이야. 화끈한데.
방금 전까지 듣고 있던 홍보 캠페인의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하는 금액이었다.
서유라와 쇼핑을 나갔겠고, 서유라가 호텔에서 몰래 최지상을 만나는 동안 시원하게 쇼핑을 하셨겠고.
지금쯤 호구 새끼 하나 잘 물었다며 흡족하게 웃고 있으려나.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지. 탐욕에 겨운 이선우의 미소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속의 이선우는 말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굴 뿐이다.
갈색의 맑은 눈동자와 부드러운 장밋빛 입술. 짙어지는 스킨십이 버겁다는 듯이 뱉어 내는 여린 한숨.
생각만 해도 아래로 피가 쏠렸다. 존나 비싼 욕정 아닌가. 누가 회장 손자 아니랄까 봐.
문도는 실소를 하며 핸드폰을 엎어 두었다. 밤이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