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어떻게 믿고요
알람이 울렸다.
흐릿하게 눈을 떴던 선우는 잠에 취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알람이 끈질기게 울린다.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손을 더듬어 찾았다. 실눈을 뜨고 알람을 끈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조금 더 누워 있고 싶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야지.
생각을 하지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욕실에서 시작해 침대에서 끝이 난 정사는 선우의 기력을 쭉 빨아먹었다.
현역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꾸준히 운동을 해 왔다.
그래서 쉽게 지치거나 체력이 달려서 무언가를 힘겨워한 적은 없었는데, 남자와의 잠자리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걸 어제 알았다.
그러니까…….
어떤 감각들이 둥글게 모이는 느낌을 견뎌 내야 하는 것. 남자의 손끝이, 입술이, 혀가 일으키는 저릿저릿한 감각들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안쪽의 물기를 확인하는 남자의 손가락을 느끼며, 무감각해지려고 애를 쓰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바르르 떨게 되는 것.
결국에는 그냥 어서 해 달라고 부탁하며 남자의 목에 매달리게 되는 것. 그런 순간들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것.
차라리 삽입을 하는 것이 나았다. 감당하기 힘든 크기를 받아 내느라 고통스러운 것이 견디기가 수월했다. 삽입이 시작되면 시트를 움켜쥐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면 되니까.
아니다.
사실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은 없었다. 남자의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 내는 건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마지막 순간, 목을 물 것처럼 입을 맞추면서 탁한 신음 소리를 냈었던 서문도 전무를 생각하자 괜히 이마에 열이 올랐다. 선우는 이미 감고 있는 눈을 한 번 더 질끈 힘주어 감았다.
일찍 가면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최대한 7시에 맞춰서 가야겠다. 서문도 전무가 출근을 먼저 해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선우는 몸을 일으켰다. 세수를 하려고 욕실의 세면대 앞에 서는데 볼 한쪽이 푸릇한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 검붉은 색깔의 멍은 아니었지만 푸릇한 색은 여전했다.
물을 틀어 세수를 하는데 문득 어젯밤에도 이 얼굴 그대로 보였으려나,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같이하긴 했어도, 클렌징폼으로 선크림을 박박 닦아 가면서 씻은 건 아니었으니 잘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 서문도 전무가 유심히 자신의 얼굴을 살핀 적도 없었고, 어쩌다 그랬느냐고 묻지도 않았으니까.
혹시라도 어째서 그렇게 되었냐고 물어본다면 넘어졌다고 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한 선우는 샤워를 한 뒤 멍이 든 곳에 바르는 연고를 발랐다. 톡톡 두드려 흡수가 되기를 기다린 뒤 선크림을 덧발랐다. 서너 번을 발라서 최대한 흔적을 가린 뒤에 1층으로 내려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일찍 나오셨네요?”
선우가 인덕션 앞에 서 있는 옥수댁과 조리사 아주머니를 보면서 인사를 했을 때였다.
“응. 오늘 장 거른다고 해서 새벽같이 건너왔지.”
고개만 돌려서 선우에게 인사를 한 옥수댁이 조리사 아주머니의 팔을 어깨로 툭 밀면서 귓가에 소곤거렸다.
“내 말이 맞어. 집에까지 데려와서 재운 걸 보면 보통 사이는 아닌 거지.”
옥수댁 아주머니의 말에 조리사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말했다.
“서 전무가 언제 별채로 여자 데려온 적 있어? 보통 깔끔한가. 만나도 밖에서 만나겠지. 무슨 여자를 들여.”
“하이구, 참. 내가 괜히 이런 말을 하겠어? 그게 나왔다구. 그게.”
“그게 뭔데.”
“콘돔이 두 개나. 어? 침실 휴지통에서 나왔다구.”
“허메야. 진짠갑네.”
정수기에서 물을 받던 선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옥수댁이 조리사 아주머니에게 한 번 더 단언하듯이 말을 했다.
“보통 사이 아니야. 집에까지 데려올 정도면 꽤 깊은 사이 아니겠어?”
“장 여사는 알아?”
“아직 말 안 했지. 자기두 말하지 마. 괜히 나만 곤란해질라.”
쉬쉬 소리를 내면서 옥수댁이 말했다. 조리사 아주머니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선우 씨, 오늘 얼갈이 넣구서 시원하게 된장국 끓였는데 한 그릇 줄까? 사골국도 있는데. 뭘로 줄까?”
“된장국 먹을게요.”
당장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지만, 선우는 가능한 평소처럼 굴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주머니가 밥솥을 열고 밥을 펐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별채로 건너가 휴지통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우는 아주머니가 내어 주는 밥그릇을 받았다.
* * *
다이닝룸으로 내려오니 장 여사가 막 상을 차리고 있었다.
며칠이 되었든 문도가 해외로 출장을 다녀온 다음 날이면 장 여사는 직접 상을 차려 주었다.
“전은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어요. 얼른 드셔 보세요.”
트레이 위에 맑은 콩나물국과 조밥이 보였다. 반찬으로는 꽈리고추를 넣은 소고기 장조림, 김치가 있었고, 조금 큰 접시에는 갓 부쳐 낸 전과 찍어 먹을 장이 놓여 있었다.
“여사님.”
문도는 주방 쪽으로 돌아서는 장 여사를 불렀다.
“네, 전무님.”
문도는 마를 얇게 썰어 튀김처럼 바삭하게 부쳐 낸 전을 집어 엷게 희석된 간장을 찍으며 말을 이었다.
“별일 없었나요?”
바삭한 전을 씹자 얇게 썬 것임에도 마 특유의 끈끈함이 살짝 느껴졌다. 몸에 좋다는 마를 먹여야겠다는 장 여사의 필사의 의지가 느껴지는 전이었다.
장 여사가 눈을 위로 뜨면서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생각을 한다. 그러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딱히 별일은 없었는데…….”
문도는 전을 삼킨 뒤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선우 씨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문도의 말에 장 여사가 아아 그거요, 운을 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막내 아가씨가 선우 씨 때린 모양이에요. 본인은 넘어졌다고 하는데, 보면 모르나. 딱 맞은 멍 자국인데. 액자에 부딪혀서 눈썹 위에도 찢어졌더라구요.”
문도는 맑게 끓인 콩나물국을 한술 떴다. 퍼렇게 멍이 들어 있던 선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국물을 넘겼다.
“현관 앞에 그림 액자에 부딪힌 모양이에요. 오늘 살펴보니까 핏자국이 있더라구. 하여튼 옥수댁 이 양반은 손은 빠른데 꼼꼼하질 않아서 문제야. 나는 딱 보니까 보이던데.”
“여사님이니까 보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모르죠.”
문도의 말에 장 여사가 그건 그렇다며 웃음을 보였다. 그러다가 혀를 찼다.
“한동안 잘 지내는 것 같더니 뭐에 심보가 뒤틀렸는지. 영문 모르고 당한 사람만 억울하지, 뭐.”
서유라가 사람을 팬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뺨을 때리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을 집어 정통으로 던지는 것도 예사였다. 이선우라고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약 쥐여 주고 요령껏 피하라고만 했어요.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뺨에서부터 목의 아래쪽까지 퍼렜던 이선우가 장 여사에게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아무튼 담에 이런 일 있음 바로 알려 드릴게요.”
서유라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인지 장 여사가 문도에게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고모님이 사람 패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이렇게 얼굴 볼 때나 알려 주면 된다는 문도의 말에 장 여사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이 맛있네요.”
문도는 전을 하나 더 집었다. 장 여사의 눈이 웃는 모양으로 변했다.
“하여튼 내 손 닿은 건 귀신같이 아신다니까. 그럼 저는 건너갈게요. 식사 편히 하시고, 출근 잘하세요.”
“네. 장 여사님도요.”
장 여사가 뒷문을 열고 나갔다. 은은하게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이 다이닝룸에 흘렀다. 반 공기 정도 담겨 있던 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보니 6시 반이 좀 넘었다. 이 아침부터 자신을 보자고 뛰어온 것은 아닐 테고.
문도는 몸을 일으켰다. 옆 의자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들고 핸드폰도 들었다. 그사이 거실까지 들어온 이선우가 문도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잘 잤어요? 일찍 나왔네요.”
문도가 거실로 나오며 인사를 건네자, 여자가 멈칫거리더니 먼저 안쪽을 살폈다. 누가 보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을 하더니 대답을 했다.
“네. 전무님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이유가 무엇인지. 잠자리를 갖기 전과 다를 것 없는 담백한 인사였다. 가린다고 가려 놓은 여자의 얼굴 한쪽에 시선이 간다.
화장품으로 가려 놓았어도 멍 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선을 올리니 눈썹 위의 손톱만 한 상처도 보였다.
“그럼.”
얻어맞은 것에 대한 위로의 의미였을까. 오늘도 고생하라는 의미였을까.
문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여자의 어깨에 올렸다. 툭툭 두 번 정도 다독인 뒤 등을 돌릴 때였다.
“저……. 전무님.”
이선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문도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잠시 망설인 여자가 그게, 그러니까, 라며 말을 고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침실에 잠깐 올라가도 될까요?”
무슨 소린가 싶어 여자를 바라보자, 머뭇거리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콘돔을……. 치워 놓아야 할 것 같아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정말이지 여러모로 예측이 불가능한 여자였다.
“그, 옥수댁 아주머니가, 보셨다고. 지난번에……. 전무님 침실 휴지통에서요.”
이선우가 힘겹게 말을 잇는다. 그게 뭐 별일이라고 저렇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가. 문도는 피식 웃었다.
“그게 뭐라고.”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게 익숙해진 문도에게는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기도 했거니와, 하룻밤이라 단정 지었기에 알아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랴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다 이선우가 조심스럽게 문도에게 말을 건넸다.
“저……. 약을 먹고 있거든요.”
“그래서요?”
“안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순진한 건지, 맹랑한 건지.
문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 선우를 보았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는 이선우의 눈동자가 맑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선우 씨를 어떻게 믿고요.”
“네?”
“아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프지 않겠어요. 콘돔은 계속 쓸 겁니다. 신경 쓰이면 알아서 치우든가.”
이선우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 푸릇한 멍이 희미하게 보이는 뺨을 하고서.
문도는 피식 웃으며 멍이 든 여자의 얼굴을 툭 건드린 뒤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