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28화 (28/168)

28. 바라는 것

밤이 되었다.

선우는 퇴근을 알리기 위해 유라의 방문을 두드렸다.

“저 이만 퇴근해 볼게요.”

“어. 가.”

침대에 엎드려 있던 서유라가 성의 없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몸을 한 바퀴 굴러 똑바로 눕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높이 들면서 화면을 보고 말했다.

“자갸, 나 지금 자기 보고 싶은뎅?”

— 아, 누나. 쫌.

“보여 줘~ 지금 보여 줘~ 내 꺼 보여 달라구~”

— 하여튼 밝히긴.

웃음기 섞인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키득거리는 서유라의 웃음소리가 의미심장했다.

무슨 뜻인지 갑자기 와닿는 바람에 선우의 낯이 뜨거워졌다. 문을 닫아 주려는데, 유라가 선우 쪽으로 시선도 두지 않으면서 말했다.

“야, 나가면서 문 잠가라.”

선우는 잠금장치를 누른 뒤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몇 마디 저속한 말이 흘러나온다.

주방으로 향한 선우는 커피포트에 물을 채워 넣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손잡이가 큼지막한 도자기 컵을 꺼내고 카모마일 티백을 하나씩 넣었다.

탁, 하고 물이 끓었다는 소리가 났다. 보그르르— 기포가 올라오는 커피포트를 잡고 머그잔 안으로 물을 흘려 넣었다.

커피포트를 제자리에 올려놓은 뒤, 선우는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카모마일 꽃이 물속에서 피어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차를 들고 서문도 전무에게 올라가는 길은, 처음보다 훨씬 더 막막하고 어렵기만 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차라리 무모하게 집어 들 수 있었다.

밤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 아는 지금은…….

선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이 숨을 마시고 느리게 뱉어 내며 눈을 떴다.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이 어떤 일인지를.

남녀 사이의 잠자리, 남들도 다 하는 별거 아닌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애써 괜찮은 척을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은 스스로에게 회복되지 못할 상흔을 새기는 일이었고, 반복될 때마다 영혼이 한 칸씩 허물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자신은 괜찮지 않을 것이다. 오랜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고, 문득문득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워지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외면하고 무시하다가 무너지는 것보다야 훨씬 견디기 수월할 테니까.

이제는 이 모든 노력들이 헛되지 않도록 한 번 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때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선우는 찻잔이 담긴 트레이를 양손으로 들었다.

10시.

2층에 있는 서문도 전무에게 보고를 하러 올라갈 시간이었다.

* * *

똑똑.

선우는 노크를 했다. 중문의 안쪽에서 TV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일 먼저 커다란 트럭들이 황야를 질주하고 있는 TV 화면이 보였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서문도의 뒷모습이 보였다.

흙먼지가 그대로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커다란 화면에서 눈을 뗀 서문도가 소파 테이블에서 발을 내리며 볼륨을 줄였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남자는 평소의 슈트 차림이 아닌, 베이지색의 슬랙스에 짙은 네이비 색깔의 니트 차림이었다.

상체를 세우며 앉던 남자가 선우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차를 들고 왔습니까?”

찻잔을 본 서문도가 조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선우를 보고 물었다.

뭔가 착각한 건가. 이대로 계속되는 거 아니었나.

선우는 왠지 잘못한 기분이 들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

선우를, 선우의 손에 들린 두 잔의 찻잔을 번갈아 보던 남자가 크게 웃었다. 정말 웃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웃더니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섹스하자고?”

어. 음. 선우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하…….”

남자가 커다란 손을 들어 세수를 하듯이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 번 더 웃었다.

피식, 웃음이 새는 입가와는 달리 색채가 화려한 눈동자는 싸늘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죠.”

서문도가 선우를 불렀다. 소파에 앉으라는 듯이 선우에게 고갯짓을 하고는 라운지체어에 앉는다.

선우는 트레이를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머뭇거리다가 머그잔을 들었다. 서문도 전무의 앞과 자신의 앞에 하나씩 내려놓자, 남자가 한숨을 쉬며 웃었다.

“우선.”

남자가 입을 뗐다. 선우는 고개를 들어 서문도와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으로 맞춘 시선이었는데, 남자는 선우의 눈을 마주 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시선이 묶인 채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채가 도는 남자의 눈동자가 나른하게 감겼다가 다시 떠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하룻밤인 줄 알았더니.”

남자가 피식 웃은 뒤 말했다.

“그래요. 계속합시다. 일단, 이 엿 같은 차는 그만 가져오시고.”

말이 거친 사람이었구나. 선우는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몇 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네.”

남자가 선우를 느리게 훑었다. 선우의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가늠이라도 해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나는 고용인이랑은 연애 안 합니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당연한 말 같았다. 남자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짜증과 피곤이 납득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나한테 무슨 연애 감정 같은 거 원하는 거라면 내려가시고.”

거기까지 말한 남자가 이마를 매만진다.

하……. 씨발.

남자의 입에서 한 번 더 욕설이 흘러나왔다. 스스로가 웃긴다는 듯이 자조적으로 웃은 남자가 선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라는 거 있으면 말해요.”

선우는 눈만 깜빡였다. 남자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남자가 가져갔다는 민우의 핸드폰.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바라는 건…….”

없다는 말을 하려다가 선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리어 이상하게 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우가 주저하자 서문도가 대강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계산은 확실한 게 좋죠. 보통 바라는 거 없다는 사람이 제일 바라는 게 많더라고. 그리고 공짜는 꼭 탈이 나거든.”

선우는 아무 말을 못 했다. 서문도는 스륵 몸을 일으켜 의자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가로질러 드레스룸으로 가더니 걸어놓은 옷 안쪽에서 지갑을 꺼냈다.

“서로 꼴려서 하는 짓인데 돈은 좀 삭막하고.”

서문도가 카드 한 장을 선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사고 싶은 거 사요. 한도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없으니까.”

선우는 시선을 내렸다. 세련된 검은색의 카드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서문도 전무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감정적인 기대는 일절 하지 말 것. 기브 앤 테이크가 분명한 거래임을 잊지 말 것. 몸을 섞는다는 이유로 선을 넘지 말 것.

이걸 받아야 거래가 성사된다.

돈을 바라고 접근한 여자처럼 보이는 게 선우에게도 나은 일이었다. 쓸데없는 오해와 의심은 사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알량한 자존심 같은 것일까. 아직도 그런 게 남았나.

서문도 전무의 곁에 머물 수 있는 통행권 같은 카드라면 어떨까. 그래도 주저할까. 아니, 감사한 일이다. 선우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냉큼 카드를 집는 모습에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선우는 카드를 잘 챙겨서 카디건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이제…….”

잠자리를 가져야 하는 시간이다. 선우는 서문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씻고 올까요?”

남자가 선우를 빤히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같이 씻죠.”

* * *

마스터룸의 욕실로 걸어가면서 문도는 입고 있던 니트티를 벗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이선우가 몇 발짝 늦게 문도의 뒤를 따라왔다.

문도는 상의를 벗은 상태로 욕실 앞의 파우더룸에서 선우를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온 여자가 애꿎은 손톱만 쥐어뜯는다.

웃긴 여자였다.

유혹은 무모할 정도로 적극적. 섹스는 서툴기가 짝이 없고, 내미는 카드는 사양 한 번 없이 받아 챙겼으면서 남자와 같이 샤워하는 건 처음인 것처럼 부끄러워하고 있다.

“뭐 해요. 벗지 않고.”

문도의 말에 선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작게 대답을 하더니 입고 있는 셔츠형의 원피스 단추에 손을 댔다.

하나, 또 하나, 그리고 다시 하나.

문도는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었다. 이선우가 옷을 벗는 모습을 감상하는 중이다.

느리게 단추를 끄를 때마다 여자의 투명한 속살이 드러났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 언저리가 보이고, 베이지색의 브래지어 윗부분도 보였다.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이선우는 바닥만 보고 있었다. 시선은 아래로 둔 채 손만 움직여 단추를 풀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단추를 푸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꼴릴 일인가.

배꼽 부근의 단추까지 풀어졌을 때, 문도는 벽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한 발짝 다가가 여자의 몸을 뒤로 돌렸다.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릿밑으로 길고 가는 흰 목덜미가 보였다.

문도는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여자의 냄새가 난다.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자, 원피스가 한쪽으로 흘러내리며 가냘픈 어깨가 드러났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따라 입을 맞추었다. 그때마다 이선우가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문도는 입을 맞추면서 시선만 들어 맞은편의 거울을 보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이선우의 자그마한 얼굴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울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문도는 서슴없이 선우의 원피스를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