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27화 (27/168)

27. 별채의 주인

세수를 마친 선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섰다.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야 하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눈썹 위의 찢어진 부분은 그래도 나았다. 살이 찢어지긴 했지만 상처 위에 붙이는 재생 밴드를 사다가 붙이면 어떻게 가려질 것 같은데, 문제는 주먹으로 맞은 얼굴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푸른 멍이 든 뺨을 살펴보았다. 혀를 굴려서 볼 안쪽의 터진 부분을 더듬어 본다.

쓰라리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나을 테니, 멍만 잘 가려 보면 될 것 같았다.

아침 식사는 생략하고 바로 별채로 건너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욕실 한편에 두었던 화장품 파우치를 열었다.

잡티 커버 기능이 있는 선크림을 찾아 조금 희미해진 멍 위로 두 번을 덧바른 뒤 에코백을 챙겼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저는 바로 별채 건너갈게요.”

인사를 하며 주방에 있는 사람들을 가볍게 스쳐 지나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본관에 국간장이 똑 떨어졌네. 양 여사님, 나 국간장 한 병만 꺼내 줘요.”

국간장을 찾아 들어온 장 여사가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선우를 보더니 눈썹을 올려 떴다.

“음? 선우 씨 얼굴이 왜 그래?”

장 여사가 눈을 크게 뜨며 선우에게 다가왔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뺨을 가리면서 대답을 했다.

“아……. 어제 넘어져서요.”

빠꼼한 단추처럼 생긴 장 여사의 눈이 선우의 얼굴을 살폈다.

눈썹 위의 상처와 선크림으로 가린 볼을 눈썹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살펴보더니 으응,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입을 열었다.

“넘어져서 그렇구나. 조심하지. 약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니요. 그런데 괜찮아요. 많이 안 다쳐서…….”

“약은 이쪽에.”

장 여사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선우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거실의 서랍장 쪽으로 이끌었다. 손수 연고를 꺼내 찢어진 상처 위에 발라 주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데서 일할수록 자기 몸은 자기가 잘 돌봐야 하는 거야. 넘어질 때도 요령껏 넘어지면 덜 다치잖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를 채고도 묻지 않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떨구면서 대답을 했다.

“네. 조심할게요.”

“이건 멍든 데 바르는 연고. 가지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발라요. 양 여사, 국간장 꺼냈어?”

에코백 안으로 연고 하나를 넣어 준 장 여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방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선우는 돌아서는 장 여사의 등에 대고 작게 인사를 건넸다.

* * *

서유라가 잠든 오전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옥수댁 아주머니가 2층 청소를 했고, 조리사 아주머니가 냉장고 정리를 하러 왔다가 그릇들을 꺼내어 푹푹 삶았다.

선우는 지난번 외출했을 때 봐 뒀던 핸드폰과 연동하는 시계를 알아보았다.

오래전부터 쓰고 있는 낡은 핸드폰과는 아예 브랜드가 다르기에 핸드폰부터 장바구니에 담았다.

핸드폰과 멀리 떨어져서도 통화와 메시지가 가능하다는 최신형의 워치도 함께 주문을 했다.

점심 느지막이 일어난 서유라는 선우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슬쩍 피했다.

“오늘 수업도 영상으로 찍을까요?”

선우는 어제 일은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서유라에게 말을 건넸다.

“아, 뭐, 그러든지.”

“날씨가 너무 좋아요. 화면에 예쁘게 잘 나올 것 같아요.”

조금 머쓱해하던 서유라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영상에 잘 나와야 한다며 샤워까지 하는 열의를 보였다.

“머리 말려 드릴까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유라에게 말하자, 유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살살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머리를 말려 주었다.

부드러운 손놀림에 서유라가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어느 정도 머리를 말린 후에 컬을 만들어 주는 세팅 기계를 연결해서 컬을 잡아 주었다.

“넌 은근히 이런 거 잘하더라?”

서유라가 차분하게 머리를 말고 있는 선우의 손놀림을 보다가 말했다.

“대회 나갈 때나 무대에 설 때 직접 해야 할 때가 많았거든요. “

“메이크업 받고 가는 거 아니야?”

“그럴 때도 있긴 한데, 매번 그러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대부분 직접 해요.”

예쁘게 웨이브가 진 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서유라가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이크업도 해 봐.”

선우는 군말 없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파운데이션을 집었다. 서유라의 얼굴에 톡톡 펴 발라 주었다. 눈썹도 살살 그려 주고 아이라이너도 그려 주었다.

“섀도는 뭘로 바를까요? 이거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

코랄색 계열로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아이섀도를 들자 서유라가 그러라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붓으로 살살 바르는데 서유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 그거 가질래?”

선우가 손에 쥐고 있는 섀도를 바라보면서 서유라가 말했다.

“이걸요?”

“어. 필요 없으면 말구.”

“아, 저 이 브랜드 좋아하는데. 주시면 감사히 받을게요.”

“미안해서 주는 거 아니구. 그냥 주는 거다? 알지?”

“네.”

“그, 서문도한테 어제 일은…….”

선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안 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래.”

낮에는 영상을 찍고, 밤에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일부러 늦게까지 남았다.

근처에 새로 생긴, 배달이 안 되는 미국 남부식 치킨집을 궁금해하는 서유라를 위해서 차를 끌고 밖에 나가서 포장을 해 왔다.

양이 많으니 먹고 싶으면 먹고 가라는 말에 선우는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았다.

서유라는 조금 신난 목소리로 악플러들에 대해 하소연을 하며 소맥을 많이 마셨다.

새벽 늦은 시간, 피식피식 웃으면서 침대에 엎어진 서유라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선우는 2층을 한 번 더 올라갔다.

숨을 크게 쉰 다음, 중문을 천천히 열어 서문도가 쓰고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거실의 AV장 서랍을 열었다. 서랍 하나하나를 열 때마다 기대감이 피어올랐다가 어김없이 사그라들었다.

드레스룸은 시스템 선반으로 되어 있어 서랍도 많고 박스도 많았다.

선우는 가운데 커다란 진열장의 서랍부터 열었다. 타이와 시계, 커프스링크 같은 것들이 보일 뿐이었다.

조금만 더.

서문도 전무가 돌아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선우는 욕심을 부려 마스터룸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래로 내리는데 덜컥,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주어 보았지만, 잠금장치가 단단하게 걸려 있었다.

서유라 때문에 잠가 놓았구나. 단번에 깨달음이 왔다.

나쁜 사람.

술기운 때문일까. 방문을 잠가 버린 서문도가 미웠다. 열어 놓고 가지. 나 아직 못 찾았는데.

닫힌 방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선우는 천천히 손잡이를 놓았다.

이 방에 들어가려면, 다시 잠자리를 해야 하겠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옅은 한숨을 쉬다가 선우는 실없이 웃어 버렸다. 누가 보면 억지로 시킨 줄 알겠네.

몸을 돌리며 선우는 허무하게 웃었다. 삼키지 못한 한숨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 * *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오후였다.

본관에 먼저 들러 서 회장에게 출장을 다녀왔다고 인사를 올린 뒤, 문도는 정원을 건넜다.

아카시아 냄새가 짙게 풍기는 담벼락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금빛 햇살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미팅과 회의. 밤늦게까지 이어졌던 접대와 쉴 틈 없이 이어진 이동.

피곤을 느낄 틈도 없었던 3일간의 강행군이 끝났다.

오랜만에 입에 문 담배가 달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니코틴이 몸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퍼져 나간다.

문도는 나른한 기분으로 연기를 뱉으며 머리를 들었다. 하늘이 파랗고 나무는 초록인 날이다.

아버지는 박람회 마지막 날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그와 바통터치를 하며 상하이로 건너갔고, 어머니는 제주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 중이다.

볕 좋은 자리에 누운 회장은 졸음에 겨운 눈을 깜빡이며 낮잠에 들 준비를 하고, 박소영은 호텔 스파에서 피부 관리에 한창인 시간.

문도는 한 번 더 깊이 니코틴을 흡입한 다음 불을 껐다. 꽁초를 가볍게 손에 쥐고 별채를 향해 걸었다. 얼마만의 이른 퇴근인지.

주방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거실에 서 있는 여자 둘의 모습이 보였다.

몸에 붙는 레오타드 차림에 물결 같은 스커트를 입은 이선우가 서유라의 옆에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에 서 있던 이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커다란 창으로 들이치는 햇빛 속에 이선우가 있다. 문도는 선우가 어느 명화 속 발레리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선우가 먼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문도는 뚜벅 걸어 안으로 들어가 아일랜드 옆의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개수대에서 물을 틀어 손을 씻는데 서유라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출장 끝났어?”

“네.”

“회사는 다시 안 가?”

“피곤해서 쉬려고요.”

문도가 물을 잠그며 말하자, 서유라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울 조카 팔자 좋네.”

문도가 피식 웃으며 느슨하게 바라보자 서유라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을 본 이선우가 서유라에게 말을 붙이며 화제를 돌렸다.

“유라 씨는 라벤더색이 정말 잘 받으시는 것 같아요.”

상냥하게 서유라에게 말을 하는 이선우는 머리를 하나로 동그랗게 묶고 있었다.

“그치? 내가 색을 잘 받아. 이 스커트 괜찮다. 나는 이렇게 반짝이는 게 좋더라.”

소파 위에는 색색의 스커트와 레오타드가 늘어져 있었고, 영화에서나 보았던 발레 슈즈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사진으로 찍을까요?”

“그럴래?”

여러 번 해 보았는지 이선우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햇볕을 환하게 받은 서유라가 엉거주춤 발레 포즈를 잡았다.

“다 찍었어요.”

“와씨, 졸라 힘들어. 허벅지 떨리는 거 봐.”

유라의 엄살에 선우는 웃었다.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주방에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서문도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첫 밤을 보낸 뒤 처음으로 한 공간에 있게 돼서일까. 공기의 흐름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왤케 더워. 야, 나 커피 한 잔만. 아이스로.”

서유라가 조잘거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서문도의 시선은 여전히 이선우에게 있었다. 선우는 잠시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이가 좋네.”

멈추어 있던 공기를 깨트리며 서문도가 말했다. 싱긋 웃으며 미간을 문지른 남자가 선우에게 말했다.

“편하게 커피 내리세요. 저는 올라갑니다.”

주방을 걸어 나온 서문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많이 피곤한 건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존재감이 선명하였다.

별채의 주인이 돌아왔다고,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