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10분
— 쌍년아 빨리 안 튀어와?
인터폰으로 소리를 질러 대는 서유라 때문에 선우는 서둘러 별채로 건너왔다. 최지상을 만나는 날이 잦아지면서 서유라는 다시 약에 손을 대는 듯했다.
평소 서유라의 기분이 세 칸 정도를 오르내렸다면, 최지상을 만나 약을 하는 날이면 30칸을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며 웃다가, 우울에 취한 사람처럼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기절한 사람처럼 잠을 잤다가, 사사건건 짜증을 내기도 했다.
“저 왔어요.”
다급하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던 선우에게 서유라가 쿵쾅거리며 다가오더니 단숨에 머리채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어, 그래,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지. 야 이 썅년아, 내 반지 어딨어? 이 도둑년, 내 반지 어딨냐고? 팔아먹었어?”
“아, 아니요. 아!”
영문도 모른 채 머리채를 잡힌 선우는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유라가 휘두르는 대로 휘청거렸다.
선우를 질질 끌고 간 서유라는 대리석 벽으로 선우를 내동댕이쳤다.
머리가 쿵 소리를 내며 액자의 모서리에 부딪혔다. 눈썹 근처에 뜨끈한 느낌이 들었다.
“미친년, 너 이럴라구 나한테 잘해 줬지? 다 그래, 나한테 살살거리고 잘해 주던 것들 알고 보면 전부 도둑년들이었어. 너도 그렇지? 나한테 뭐 하나 뜯어낼라구! 내 반지 니가 가져갔지?”
“아니요. 저는…….”
변명을 하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퍽 소리가 나며 머리가 휙 돌아갔다. 뒤늦게 뺨에 크고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터진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난다.
“거지 같은 년, 너 내가 뒤져서 반지 나오면 그 길로 죽을 줄 알아! 아악! 왤케 간지러운 거야!”
팔을 북북 긁는 서유라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돌아갔다. 느닷없는 폭력에 얼이 나간 선우는 아픈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게 왜 이러냐고 묻는 건 아무 소용 없어. 북받치는 감정을 꾹꾹 삼킨 뒤, 선우는 차분하게 물었다.
“반지 잃어버리셨어요?”
“니가 훔쳤잖아!”
“아니에요. 안 가져갔어요.”
“이 썅년이!”
서유라가 다시 선우의 머리채를 잡았다. 유라가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자 선우의 눈에 눈물이 절로 핑 돌았다. 다리가 휘청여 바닥에 주저앉은 선우는 크게 숨을 삼킨 뒤 유라에게 말했다.
“제가 왜 유라 씨 반지를 가져가겠어요. 금방 들킬 텐데.”
생떼가 난 아이라고 생각하자. 만취한 고객이라고 생각하자. 선우는 마음을 다스리면서 가능한 부드럽게 유라를 달래듯이 말했다.
“제가 가져갔으면 두 배로 물어 드릴게요. 정말로요.”
그 말에 서유라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미심쩍은 눈으로 선우를 본다. 선우는 애써 달래듯이 유라에게 말했다.
“제가 다시 한번 찾아볼게요.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찾아볼게요.”
머리를 움켜쥐었던 서유라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선우는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유라에게 말했다.
“한 번만…….”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선우는 애써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찾아볼게요.”
서유라의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가 선우를 들여다보았다. 선우는 자신의 진심이 서유라에게 닿기를 빌었다.
“10분.”
서유라가 말했다.
“10분 줄 테니까 찾아. 못 찾으면 월급 한 푼 못 받고 잘리는 줄 알아.”
유라가 머리카락을 놓으며 말했다. 10분 안에 못 찾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했다간 도리어 심기를 거스를 것 같았기에, 선우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정리할 새도 없이 선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유라가 찾는 반지는 최지상이 선물해 준 거였다. 네 개의 반지를 겹쳐 놓은 모양이었는데, 분명히 최지상을 만나러 나갈 때 끼고 있었다.
호텔에 있으면 어떡하지. 정말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거면 어떡하지.
걱정이 밀려들었지만 선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찾아보자.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낭비하면 안 돼.
서유라가 아침에 무슨 옷을 입었더라. 무슨 가방을 들었더라.
선우는 서둘러 서유라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서유라가 감시를 하듯이 선우를 쫓아와 문 앞을 지키고 섰다.
선우는 직접 옷걸이에 잘 걸어서 스타일러 안에 넣어 두었던 서유라의 원피스와 트렌치코트를 꺼내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선우는 고개를 돌려 가방을 찾았다. 오늘 서유라가 들었던 가방은 에토프색의 토드백이었다. 가방 진열대를 훑어 더스트백에 넣어서 정리해 두었던 박스를 찾았다.
제발.
선우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더스트백을 열었다. 가방을 꺼내어 한 칸씩 차분히 살폈다.
어디에도 나오지 않아 눈앞이 아득해질 때, 뒤쪽의 지퍼가 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지퍼를 열다가 선우는 작게 소리를 냈다.
반지가 있었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냈다. 됐어. 이제 됐어. 찾았으니 되었다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눈 밑이 뜨끈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아프게 물어 눈물을 삼킨 선우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유라를 돌아보았다.
“유라 씨, 찾았어요.”
서유라가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올렸다.
“이거 맞죠?”
손에 쥐었던 반지를 보여 주자 서유라가 어? 하고 반지를 냉큼 집었다.
“어디 있었어?”
“핸드백 뒤에 있는 지퍼에요.”
“아, 맞다. 손 씻을 때 넣어 놨었지.”
서유라가 헤— 웃더니 선우를 찌릿 노려보았다.
“뭐, 지금 찾았다고 유세하냐? 내가 의심해서 기분 상했어? 맞은 거 억울해?”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여기서 망치면 안 돼. 그런 마음으로 애써 미소를 보이며 유라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반지가 없어졌으니까 의심할 수 있죠.”
“그치? 너 같아도 그러겠지? 암튼 뭐, 미안하게 됐다. 가서 약 발라. 아, 가기 전에 나 떡볶이 좀 시켜 주고. 매운맛으로. 순대랑 내장도 같이. 알지? 소주도 꺼내 놓고.”
“네.”
순순히 대답을 하던 선우의 눈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 그래.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겠다. 서문도 전무가 없는 날이니까. 잘하면…….
“저, 유라 씨.”
선우는 돌아서는 유라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
“괜찮으시면 저도 같이 먹어도 될까요?”
서유라가 빤히 선우를 보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부어오른 뺨. 찢어진 눈썹.
선우는 자신의 몰골이 유라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며 대답을 기다렸다.
“뭐 그르든가. 방에 있을 테니까 떡볶이 오면 불러라.”
서유라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다행이다. 선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생겼다고 생각하니 맞은 것도, 도둑으로 오해를 받은 것도 아무렇지 않아진다.
나는 괜찮아. 오히려 잘된 일이야.
주문을 외우듯이 마음을 다스린 선우는 인터폰을 들고 밝은 목소리로 서유라의 주문을 전하였다.
* * *
“하……. 내가 막 그르케 나쁜 사람은 아니자나. 너도 알지? 내가 원래 좀 착하구 그래서 당한 게 많아. 왤케 이용해 먹는 년들이 많아서……. 내가 좀 순진하그든. 사람을 잘 믿어요. 근데 세상은 왤케 못돼 처먹었니?”
서유라가 탁자 위로 엎어지면서 중얼거렸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선우는 유라를 일으켜 부축했다.
“반지가 없어져서 그런 거지……. 너 같아도 의심을 했을 거야. 그치?”
선우는 침대에 대자로 뻗은 유라 위로 조심스럽게 시트를 덮어 주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같이 마시느라 힘들었는데, 다행히 서유라가 먼저 쓰러져 주었다.
거실로 나온 선우는 크게 숨을 마셨다가 천천히 뱉었다. 이 넓은 별채에 드디어 혼자였다.
술을 마셔서일까. 가슴이 뛰었다. 선우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면서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어디부터 찾아봐야 할까. 2층의 메인 거실까지 다가간 선우는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전무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요. 여기 흐트러지면 바로 아셔. 부리는 사람들한테 까탈스럽지는 않은데, 칼같이 정확한 데가 있거든.’
옥수댁 아주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서문도 전무의 공간인 중문 안쪽은 나중에 찾기로 했다.
선우는 달빛에 의지하여 넓은 홀을 둘러보았다. 응접용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뿐이다.
홀을 가로지른 선우는 숨죽여 서재의 문을 열었다. 벽면을 차지한 커다란 책장과 긴 테이블이 보였다. 선우는 자세를 낮추고 책장 아래 칸의 문이 달린 수납장들을 하나씩 열었다.
서류와 파일, 졸업 앨범 같은 것들이 보였다. 등이 서늘하게 식는 기분에 한 번씩 뒤를 확인하면서, 다음 수납장을 또 그다음 수납장을 열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곳에는 핸드폰이 없었다. 주로 서류와 파일들이라 들추어 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쪼그려 앉았던 무릎을 펴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무대에서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걸어 본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컴퓨터가 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테이블에는 얕은 서랍이 세 개가 있었다. 숨을 멎은 채로 첫 번째 서랍을 연다. 펜과 메모지, 가위와 칼 등의 문구류가 보였다.
두 번째 서랍에는 인공눈물과 USB 같은 것들이 보였다. 위치가 흔들리지 않게 천천히 서랍을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흡.”
엎어져 있는 핸드폰이 하나 보이는 순간 소리가 터져 나와서 선우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서랍을 조금 더 당겨 여는 순간, 크게 덜컹거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식는다. 민우의 것과 다른 브랜드의 핸드폰이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마음을 붙들고 벽을 살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 아래로 커다란 액자가 보였다.
서문도 전무와 부회장 부부가 찍혀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은은하게 웃고 있는 우현희 대표와 활짝 웃는 부회장. 그 뒤에 서서 조금은 삐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서문도 전무.
좋겠다. 당신은.
눈물이 날 만큼 부러운 이 기분을 알까.
선우는 어둠 속에서 눈을 꾹 감았다.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술을 마셔서일까. 눈물이 눈가에 고여 들었다. 흘리면 안 돼. 바닥에 떨어지면 안 돼. 흔적이 남을 수도 있어.
선우는 어금니를 꾹 물었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액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보았다. 벽 뒤의 금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창 건너편으로 불이 켜진 숙소동이 보였다. 너무 늦게 돌아가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이만큼만.
선우는 천천히 문을 닫고 서재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