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출장
대연회장에서 열렸던 컨퍼런스에 참석했던 문도는 늦은 오후, 부스가 전시되어 있는 박람회장으로 향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플라스틱 산업박람회였다. 압도적인 사이즈의 박람회장에는 세계 곳곳에서 참가한 기업들의 부스가 저마다의 기술을 뽐내고 있었다.
상하이와 광저우에서 번갈아 열리는 ‘차이나 플라스’에 참가하는 국내 기업 중에서 서도 케미컬은 가장 큰 규모의 부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곳에 서도 케미컬의 로고가 보였다.
서도의 상징색인 주황색의 커다란 부스를 향해 문도와 전략본부1팀장, 케미컬 부문 노승덕 사업부장이 함께 걸었다.
문도는 자신들을 맞이하러 나온 중국 지사장 이현태 상무와 첨단소재 지원사업부의 정은영 부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직원들이 고생했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며 안쪽에 위치한 부스를 향해 걸었다.
120평이 넘는 부스는 재생 플라스틱과 친환경 배터리를 메인 주제로 하여 4개의 테마존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운영위원회 소속 직원들이 부스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문도는 부스 곳곳을 돌아보았다. 전면을 커다랗게 차지하는 액정에서 서도 케미컬의 홍보 영상이 흘러나왔고, 홈 섹션과 여행 섹션에서는 재생 플라스틱을 이용한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휴트론 미팅은 언제로 잡혔습니까?”
문도는 QR코드를 핸드폰으로 찍으며 정은영 부장에게 물었다. 휴대폰 안에서 신소재로 만든 헤드폰의 영상이 뜨며 제품 설명이 흘러나왔다.
“내일 오전 10시로 픽스 되었습니다.”
휴트론은 문도가 눈여겨보았던 스위스의 AI 벤처기업이었다. AI를 이용한 연구는 서도에서도 이미 추진 중이었지만, 문도는 이 벤처기업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다.
서도의 부스를 체크한 문도는 박람회장을 둘러보았다. 경쟁 업체인 성현의 부스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며 유심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전무님, 이제 나가 보셔야 할 시간입니다.”
함께 부스를 둘러보던 송정태 팀장이 다가와 문도에게 말했다. 문도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에는 중국 동박 제조업체인 호슨 머티리얼즈의 리샤오진 사장과 만찬을 겸한 미팅이 있었다.
“고생하시고,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서도의 부스로 돌아온 문도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현태 지사장과 노승덕 사업부장도 비서진의 보좌를 받으며 이동할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할 겁니다.”
박람회장을 빠져나오는데, 이현태 지사장이 무어라 말했다. 광활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라 소리가 흩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지사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리샤오진 사장이 바이주 애호가라서, 종류별로 내놓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죽기야 하겠어요.”
문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박람회장을 나와 준비되어 있는 차량 쪽으로 걷는데 탁한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바람에 옷깃이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멋대로 휘날렸다.
차에 오르기 전, 문도는 잠깐 거대한 건물을 돌아보았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사이즈의 건물 뒤로 낮은 하늘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압도적인 풍경이었지만, 광활한 대륙이 주는 원대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다만 이선우에게 굳이 출장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웃겨서 웃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보냈을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다고 이딴 걸 주저하나.
문도는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이선우의 번호를 찾아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화면을 끄고 기사가 열어 주는 세단의 뒷자리에 올랐다. 바람에서 모래 냄새가 나는 저녁이었다.
* * *
“선우 씨, 왔어? 보리밥 비벼 먹으려고 된장찌개에 무생채 했는데, 저녁 전이면 얼른 와서 앉아.”
노을이 지는 정원을 지나 숙소동 현관문을 열자, 조리사 아주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선우에게 물었다.
“네. 저도 같이 먹을게요.”
선우는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주방에서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폴폴 풍겨 왔다.
2층으로 올라가 핸드폰을 가지고 내려오니 식탁 위에는 양푼 가득 보리밥이 들어 있었고, 그 옆으로 무생채와 콩나물무침, 봄동 겉절이가 커다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막내 아가씨랑 쇼핑 간다더니, 이제 온 거야?”
선우가 개수대에서 손을 씻는데, 옥수댁 아주머니가 숟가락을 놓아주면서 물었다.
“네. 조금 전에 들어와서 정리 마쳤어요.”
“아니, 뭘 그렇게 산대?”
조리사 아주머니가 바글바글 끓는 된장찌개가 들어 있는 뚝배기를 들어서 나르며 말했다. 선우는 대답 대신 웃으며 물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찬물을 가득 받았다.
시원하게 내려가는 물을 마신 뒤 자리에 앉는데, 옥수댁 아주머니가 말했다.
“뭘 사긴. 신발, 가방, 보석 뭐 그런 거지.”
“그렇게 샀는데도 또 살 게 있을까?”
비빔밥을 나누어 담을 그릇을 들고 오면서 양 여사라 불리는 다른 조리사 아주머니가 물었다. 선우는 그릇을 받아 앉아 있는 사람들의 앞앞마다 나누어 주었다.
“돈이 없어서 못 사지 물건이 없어서 못 사나. 옷장 보니까 똑같이 생긴 가방이 색색별로 있드라구. 그게 하나에 천만 원이 넘는 거라는데.”
“그럼, 막내 아가씨 쇼핑하는 동안 선우 씨는 뭐 해?”
조리사 아주머니가 선우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뭐 하긴, 짐 들어주고, 커피 사다 주고, 쇼핑하는 동안 짐 지키면서 기다리고 그런 거지. 그치?”
옥수댁 아주머니의 말에 선우는 대답 없이 웃었다. 오늘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기에.
서유라는 아침부터 호텔로 갔다. 촬영 스케줄이 있어서 낮에만 시간이 된다고 하는 최지상 때문에 신경질을 한바탕 부리고는 선우에게 차 키를 넘겼다.
부를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든, 커피를 마시든 알아서 하라는 말을 하고 서유라가 사라진 뒤 선우는 일부러 움직였다.
백화점 안의 매장에서 핸드폰과 연동되는 시계를 알아보기도 했고, 얼마 전에 밑창을 대어 달라고 맡겼던 서유라의 구두를 찾아오기도 했다.
가능하면 생각이 나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유라와 보내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보내기 위해 선우는 일부러 걸었다.
한 번씩 몸의 안쪽에서 낯선 통증이 일 때면 잠깐 숨을 삼키고 다시 걸었다.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을 외면하며 다 떨어진 핸드크림을 사고, 사지도 않을 옷들을 구경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생각을 멈추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엄마에 그 딸이네. 작은 사모님도 나가면 그렇게 강 기사를 짐꾼 취급을 한다는데.”
조리사 아주머니가 혀를 차면서 보리밥 위로 무생채를 쏟아부었다. 고추장과 겉절이와 된장찌개가 차례로 들어간다.
“아, 들기름. 양 여사님, 거기 들기름 좀.”
마지막으로 들기름까지 한 바퀴가 둘려졌다. 커다란 양푼 가득 보리밥이 썩썩 비벼졌다.
“선우 씨, 많이 먹어. 응? 밥심이 최고라고, 잘 먹어야 잘 버티지.”
“네. 감사합니다. 맛있겠어요.”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점심을 걸렀다는 걸 깨달았다. 허기가 몰려오며 입에 침이 고였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를 풍기는 비빔밥을 받아, 몇 술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였다.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반짝거리며 알람을 울렸다.
[당분간 올라오지 말아요.]
아…….
발신인은 서문도 전무였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망연해진 기분으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왜 올라오지 말라고 하는 걸까.
어제 혹시 뭔가 실수한 게 있는 걸까.
“왜, 무슨 문제 있어, 선우 씨?”
맞은편에 앉은 옥수댁이 선우에게 물었다. 선우는 고개를 들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스팸 문자예요.”
“에이, 남자친구는 아니고?”
옥수댁의 말에 선우는 아니라고 한 번 더 웃으면서 말했지만, 신경은 온통 문자메시지에 가 있었다.
“이렇게 예쁜데 왜 남자친구가 없어. 내가 좀 알아봐 줄까?”
“아, 괜히 오지랖 부리지 말어. 지난번에도 우리 조카 괜찮은 사람 소개시켜 준다더니, 어디서 그런 돼지 코딱지 같은 남자를 데려와선.”
“아니, 그 집이 천안에 5층짜리 건물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까.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란대?”
옥수댁 아주머니와 조리사 아주머니가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기계적으로 밥을 떠서 씹었다. 애써 외면해 왔던 지난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일어나라면 일어섰고, 엎드리라면 엎드렸던 기억들.
안을 쾅쾅 울려 대던 남자의 몸을 받으며 시트를 움켜쥐었던 기억이 전부였다.
세상이 깨어져 나가는 그 기분. 울고 싶을 정도로 강렬했던 낯선 감각과 때때로 위험하게 빛났던 남자의 눈빛. 그리고 참아도 참아도 터져 나왔던 소리들.
부끄러운 기억들이 역류한다. 목이 멜 듯이 아파 와서 선우는 밥을 간신히 넘겼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해 본다.
서툴러서였을까. 기대보다 못해서였을까. 기분을 거슬렀을까. 왜 그러느냐고 물어봐도 되는 건가. 당분간이라는 건 얼만큼일까.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입술 씹으며 고민을 하기보다는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와 핸드폰을 들었다.
왜 올라오지 말라고 하는 거냐고 직접 물어보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생각 끝에 한 문장을 썼다.
[혹시 제가 실수를 했을까요?]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떠냐고 묻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혹시 피가 비친다면 생리를 마친 지 얼마 안 됐다는 변명을 해야 하나 생각을 했었는데, 눈에 띄는 혈흔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속옷에 조금 묻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처음인 것을 눈치를 챈 걸까. 그래서 부담스러웠던 걸까.
거실을 서성이는 동안 마음이 바짝바짝 졸아들었다. 답장이 도착했을 땐, 고작 1분이 흘렀을 뿐인데 10분은 지난 기분이 들었다.
[출장.]
선우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별거 아닌 두 글자의 말이, 무거웠던 마음을 짐을 덜어 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데 옥수댁 아주머니가 선우를 불렀다.
“선우 씨, 막내 아가씨가 찾네!”
“네, 갈게요!”
선우는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인터폰 안에서 서유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