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24화 (24/168)

24. 노란 별

창문 너머로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 왔다. 새하얀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문도는 무심히 창밖을 보았다.

하늘과 정원에 푸른색의 필터를 끼운 것만 같다. 푸른색 풍경 모서리에 숙소동이 있었다.

시선 끝에 걸린 2층 창가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거뒀다. 픽, 하고 웃음이 샜다.

침대에 누웠을 때조차 어딘지 모르게 푸른 새벽을 닮은 여자는 정말이지 잠자리 실력이 형편없었다.

문도는 진열장 아래의 서랍을 열어 가지런히 수납된 타이를 훑어보았다.

3박 4일간의 중국 출장을 떠나는 날이다. 붉은 계열의 타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 목에 두르다 한 번 더 실소를 흘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겼다. 그 어설픈 실력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것도 웃기고, 올라올 때마다 무슨 표시라도 되는 양 찻잔을 들고 오는 것도 웃겼는데.

‘끝난 거…… 아니었어요?’

여자는 머뭇거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렇게 들이댔으면서 두 번은 기대도 안 했다는 건지.

웃음을 흘리며 하며 진열장 제일 윗 서랍을 열었다.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찬 뒤, 핸드폰을 챙겨 재킷을 팔에 걸었다.

공항에는 적어도 7시까지 도착을 해야 하니, 한 시간 이내에는 출발을 해야 했다. 문도는 인터폰을 들어 본관에 호출을 했다.

— 네, 전무님.

“아침은 본관에서 할게요. 간단히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 오늘 출장 가시는 날이라고 하셨죠? 바로 준비할까요?

“네. 지금 건너갑니다.”

문도는 1층으로 내려와 뒷문을 열었다. 새벽의 청량한 공기가 이마에 닿는다. 정원을 지나 본관의 다이닝룸으로 들어가자 장 여사가 문도를 반기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따라 우리 전무님 신수가 훤하시네.”

잘 자란 아들을 보는 듯한 눈으로 장 여사가 말했다. 문도는 장 여사에게 웃으며 말했다.

“신수 훤한 게 하루 이틀 일인가요.”

“그건 그렇죠. 아침은 뭘로 드릴까요? 회장님 보리굴비 잡숫고 싶으시대서 녹찻물이랑 준비했는데, 별로시죠?”

“커피나 내려 주세요.”

새벽까지 여자의 안을 파고드느라 잠이 짧았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서인지 크게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아침부터 굴비를 먹을 기분은 아니어서 간단하게 커피만 주문을 했다.

주방으로 들어간 장 여사가 잠시 후에 진하게 내린 뜨거운 커피 한 잔과 겉을 파삭하게 구운 쑥인절미에 콩가루와 꿀을 뿌려서 들고나왔다.

“부회장님은 곧 내려오신댔구, 회장님은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으니 아무래도 늦으실 것 같구요.”

장 여사가 문도가 앉은 자리에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유라는요?”

문도는 핸드폰으로 일정표를 띄우며 장 여사에게 물었다. 요즘 며칠 연속으로 별채에서 가볍게 먹고 출근을 했던지라, 서유라에 대한 소식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외출도 해, 쇼핑도 해, 요즘 뭐 신나셨죠. 낮에는 뭐야, 발레 한다고 선우 씨를 얼마나 부려 먹던지. 그걸 또 상냥하게 다 받아 주는 것도 신기해. 그러니까 운전도 시키고 쇼핑 갈 때도 데리고 가고 그러지. 막내 아가씨가 선우 씨 끼고 살아요, 요즘.”

여자도 비슷한 내용으로 보고를 했었다. 쇼핑을 갔었고, 운전을 했고, 수업을 하고, 영상을 찍었다고.

“그리고요?”

“둘째 사모님이 종종 담배 피러 건너오시구.”

문도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짧게 웃었다. 모녀가 쌍으로 남의 집에서 너구리를 잡고, 아주 편하게들 지내시네.

“블라인드 쳐 달라구 난린데 어떡하죠?”

“누구 좋으라고.”

문도는 빡빡하게 쓰여 있는 출장 스케줄을 한 손으로 넘기며 말했다.

“숙면을 못 취한다고 그러드라구요.”

“잘만 처자든데요.”

문도의 말에 장 여사가 푹 하고 웃었다.

“인절미도 하나만 잡숴 보세요. 햇쑥 넣고 뽑은 거라 향이 좋아. 봄에는 그저 땅 뚫고 나온 풀을 먹어 줘야 기운도 나죠. 보약이 별건가.”

문도는 일부러 커피를 들었다. 장 여사를 보면서 보란 듯이 한 모금을 마시자, 장 여사가 밉지 않게 문도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청개구리짓 할 때 보면 어릴 때 고대로구.”

“장 여사님이 먹으라면 먹어야죠.”

문도는 씩 웃으며 뒤늦게 인절미를 포크로 찍었다. 꿀을 찍고 콩가루를 찍어서 입에 넣고 씹으면서 출장 관련하여 메일에 첨부된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이선우 씨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문도는 입을 열었다.

“언제 자를까요.”

장 여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어디가 맘에 안 드셔서?”

오늘따라 피식피식 김새는 웃음이 많이 나온다. 문도는 가볍게 공기를 흘리며 웃은 뒤 대답을 했다.

“안 들어요.”

문도의 대답에 장 여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설픈 주제에 녹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뿐일까. 뒷목이 바짝 설 정도로 비좁기도 했다. 그렇게 해 댔는데 또 생각이 날 만큼.

“어디가요?”

“글쎄요. 그걸 잘 모르겠네.”

문도는 포크로 쑥인절미를 찌르면서 말했다. 잘 구워진 인절미를 씹자, 달콤한 꿀과 고소한 콩가루 뒤로 봄 내음이 진하게 났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커피를 거의 다 마셨을 때쯤, 우현희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커트에 가까운 짧은 단발머리를 쓱 넘기며 들어온 그녀는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친 모습이었다.

“오늘 차이나 플라스 간다고 했었지?”

“네.”

“평년보다 좀 늦게 열린 것 같네. 상하이?”

“네.”

금융 계열사인 서도 투자 신탁의 대표이사님께서 케미컬이 참여하는 박람회의 스케줄을 꿰고 있는 게 놀랍지 않은 건, 그녀가 우현희이기 때문이었다.

명동 신사 우창규 회장의 맏딸. 서도 투자 신탁의 대표이자 생명, 증권, 자산운용의 대주주인 우신 파이낸스의 소유자. 서도 금융 그룹의 실질적 수장.

“대표님, 홍차 드릴까요, 커피로 드릴까요?”

멀리에서 장 여사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홍차로 할까요?”

네에, 하는 장 여사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우현희가 핸드폰을 들어 무언가를 읽으며 문도에게 말했다.

“다녀오면 저녁이나 같이할까? 네오밸류 펀드, 알고 있지?”

안 그래도 알아보는 중이었다. 미국 헤지펀드에 큰아버지 서용호와 사촌인 서창도가 크게 투자를 했다기에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조금 더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다녀와서 봬요.”

슬슬 공항으로 출발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우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다녀오고.”

재킷과 핸드폰을 챙겨 들며 문도는 가볍게 웃었다. 홍차와 인절미 구이를 들고 들어오는 장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다이닝룸을 나섰다.

아침은 빠르게 밝아 와,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는 푸른 기가 걷히고 날이 완전히 밝아 있었다.

본관의 정원에는 봄이 완연했다. 메말랐던 나뭇가지에는 물이 한껏 올랐고, 검은 나뭇가지에 연두색 새잎이 솟았다.

산책로 옆으로 노란 꽃들이 피었고, 이름 모를 꽃나무에도 짙은 분홍색의 꽃이 피었다.

정원석 틈 구석구석까지 소박한 야생화가 피었다. 화단에는 튤립과 수국이 가득이었다.

나이가 들면 꽃이 좋아진다고 서 회장이 한마디를 한 뒤로, 정원은 온통 꽃밭이었다.

상근하는 정원사가 철에 따라 꽃을 심고 거두며 풍성하고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어머, 회장님. 이제 정말 봄이야, 봄.”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문도는 회장이 머무는 공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크로 향하는 커다란 유리문이 열려 있고, 무릎에 담요를 덮은 회장과 휠체어를 밀면서 야살스럽게 웃고 있는 박소영이 보였다.

“우리 산책해요. 꽃 냄새가 너무 좋다.”

흐음~ 하고 봄 내음을 맡는 박소영을 회장이 초점이 풀린 눈으로 보면서 헤엑헤엑 웃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박소영의 엉덩이를 도닥거린다. 정정. 주물럭거린다.

아니 씨발. 돈을 처들여 심어 놨으면 꽃이나 볼 것이지, 뭐 하는 짓이야.

잠깐 들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문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슬슬 엉덩이를 어루만지던 회장이 손을 떼고는 말했다.

“소……소오여엉히. 저기.”

회장이 손가락으로 꽃이 주렁주렁 피어 있는 산책로 쪽을 가리켰다.

“회장님, 저쪽으로 가요?”

“으응. 화, 황매, 매화가 조오하.”

박소영이 휠체어를 밀어 황매화가 늘어진 가지 옆으로 회장을 옮겨 주었다.

회장이 곱은 손을 들어 연두색 이파리 사이로 피어난 노란색의 꽃을 들었다. 콧구멍을 벌름이며 냄새를 맡고는 벙글 미소를 지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노란색 꽃을 똑 떼더니 박소영에게 이리 가까이 오라 손짓을 한다.

박소영이 허리를 굽혀 몸을 숙이자 흐흐흐 짓궂은 웃음을 흘리곤 손을 뻗어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환장하겠네.

문도가 혀를 차는 사이 박소영이 아잉, 하면서 몸을 틀었다. 이러면 들어갈 고예요~ 하고 콧소리를 내자 회장이 으흐으흐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박소영의 귀 옆에 노란색의 꽃을 꽂아 주었다.

“노란, 노호란, 별. 스, 슷하. 옐로우, 슷하.”

“어머 정말, 노란 별 같네?”

흐뭇한 표정의 회장이 박소영을 올려다보았다.

“자기, 나 예뻐?”

박소영이 꽃을 꽂은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회장에게 물었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묻는 모습에 회장이 침이 질질 흐를 것 같은 허벌 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예……예뻐. 뷰우티풀.”

“말로만?”

“아니, 아니지.”

슬슬 허벅지를 더듬는 회장의 손을 박소영이 밉지 않게 흘겨보며 아잉, 하고 콧소리를 냈다.

“이거 말구. 나 차 한 대만 더 사 줘요. 내 차 요즘 유라가 쓰잖아.”

“뽀바. 뽀오바. 예쁜 걸루, 아일 기부 유 어 카.”

그 말에 박소영이 허리를 굽혔다. 새 부리 같은 주둥이 두 개가 쪽, 하고 만났다가 떨어진다.

하. 진짜. 하나만 하지?

욕정이면 욕정, 순정이면 순정 하나만 해도 욕이 나올 판에, 추잡한 욕정 위에 피어난 꽃 같은 순정이라니. 최악의 조합 아닌가.

주변은 진흙 뻘밭을 만들어 놓고 당사자들은 좋다고 연꽃 같은 참사랑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하필 진탕 여자를 탐한 다음 날이라니,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감사하게도 이렇게 또 한 번 큰 교훈 주셨구요.

알러뷰. 사랑을 고백하는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도는 출장길 한번 더럽게 상쾌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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