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눈물의 이유
여자에게서 비누 냄새가 났다.
사실은 눈깔이 돌아가 있었지. 찻잔 두 개를 들고 올라온 말간 얼굴을 보았을 때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누 냄새를 풍기며 씻고 온 티를 냈을 때부터.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으면서도.
몹시 꼴렸다.
그래도 어지간해선 얽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비누 냄새가, 그 밑에 숨겨진 여자의 살냄새가 코끝까지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내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선우의 몸을 들어 진열대 위에 올려놓으며, 문도는 여자의 입술을 뜯을 것처럼 당겨 물었다.
날것의 혀를 깊이 쑤셔 넣어 샅샅이 여자를 탐했다. 질척이는 소리와 눌린 신음 소리가 귀를 뜨겁게 달구었다.
거침없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여자는 헐떡이며 입을 벌려 주기에 급급했다. 선우의 입에서 터져 나온 밭은 숨소리들은 전부 문도의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었다.
깊은 입맞춤에 선우의 상체가 뒤로 한껏 기울어졌다. 혀가 노골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벌어져 있던 선우의 허벅지가 긴장을 하며 문도의 허리를 조였다. 문도의 목을 감고 있는 선우의 팔에도 힘이 들어간다.
문도는 여자의 등을 손으로 받치며 입술을 살짝 떼었다.
“하아…….”
문도에게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었던 선우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타액으로 반질거렸다.
다시 금방이라도 입술을 겹칠 수 있는 가까운 거리. 속눈썹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에서 문도는 눈으로 선우의 얼굴을 쓸었다.
옅은 분홍색으로 상기된 뺨. 단내가 나는 숨. 반짝이는 갈색의 눈. 짙어진 스킨십에 바르르 떨고 있는 입술까지. 욕이 나오게 예뻤다.
어이없을 정도로 욕망이 치솟는다. 스커트를 걷고 속옷만 들춘 뒤 다리 사이를 그대로 파고들면 어떨까. 박아 넣을 때마다 매달리며 신음을 터트리겠지.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 위를 헤맬 것이다. 눈과 눈을 엮고서 깨트릴 듯이, 부수어 버릴 듯이 빠르게 밀어 넣으면 입술은 절로 벌어질 것이고, 달콤한 숨은 끊임없이 터져 나올 텐데.
상상만으로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문도는 여자의 뺨을 감싸며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었다. 우르르 끓었던 머리도 식힐 겸, 샤워도 할 겸, 한발 물러서서 엄지로 여자의 입술을 닦아 주며 말했다.
“일단은 여기까지.”
여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진열대 위에서 내려 주었다. 얼이 빠져 있던 이선우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몸을 떼고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이선우가 말했다.
“전무님. 저는…….”
문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짙게 뺨을 붉히며 여자가 말한다.
“아직, 더…….”
웃음이 터졌다. 문도는 여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모자랐어요?”
그를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의 손가락이 벌어졌다가 이내 오므라들었다. 애꿎은 스커트만 쥐는 것이 지난번의 밤과 같았다.
문도는 고개를 기울이며 몸을 숙였다. 부풀어 오른 선우의 아랫입술을 제 안으로 빨아당겼다. 말캉이는 살덩이가 사탕처럼 달았다.
조금 더. 한 번 더. 다시, 또다시.
문도가 밀려들 때마다 선우가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가볍게 물었다가 놓을 요량이었는데 여자가 문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입을 벌리며 분홍색의 혀를 서툴게 맞대 오는 순간 뒷목이 뜨끈해지며 열기가 치솟았다.
이럴 걸 뭘 빼고 그래.
낮은 웃음을 웃으며 문도는 여자의 스커트를 들추어 올렸다. 서슴없이 허벅지를 쓸어 올려 동그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가는 허리를 바짝 제 몸에 붙이고 반쯤 들어 올린 상태로 걸음을 걷는다. 입술을 빨며, 혀를 감으며 걷다가 방문을 열었다.
달큰달큰한 숨이 여자의 입에서 흘렀다. 싹싹 빨아먹으면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문도의 목을 힘주어 안았다.
어둠에 잠긴 방.
커다란 침대에 닿은 선우의 무릎이 꺾였다. 문도는 선우를 눕히며 그대로 타고 올랐다.
* * *
선우의 허리를 그러쥔 남자의 움직임이 거세어졌다. 상체를 세운 남자의 아래에서 다리를 벌리고 누운 선우의 허리가 허공에서 휘었다.
쿵, 쿵, 쿵, 쿵 남자가 선우를 쉴 새 없이 내리쳤다. 세상이 터져 나갈 것처럼 흔들린다.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선우에게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너무 아파.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아.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때 남자가 강한 힘으로 선우의 끝까지 파고들었다.
아.
견딜 수 없어 시트를 그러쥐며 허리를 비튼 순간, 남자의 움직임이 일순간 뚝 멈추었고, 허공에 들렸던 선우의 허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아랫배를 뚫을 것처럼 깊이 들어온 남자의 몸이 한 번 더 부푸는 느낌이 났다.
남자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선우를 보면서 다시 한번 쿵, 하고 몸을 밀어 넣었다.
아아.
선우는 눈을 감았다. 빈틈없이 맞붙은 하체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시트를 움켜쥔 선우의 손이 바르르 떨려 왔다.
긴 한숨을 내쉰 남자가 잡고 있던 선우의 허리를 내려놓았다. 고통스럽게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며 차가운 공기가 체액이 흘렀던 자리에 닿았다.
“밖에 욕실 있으니, 씻고 내려가요.”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마스터룸에 연결된 욕실로 향한다.
숨만 쉬고 있던 선우는 바닥난 기운을 끌어올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며 다리 사이가 열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다리를 그러모아 침대에 모서리에 앉으니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자신의 옷가지가 보였다.
억지로 힘을 주어서 일어난 선우는 바닥에 떨어진 스커트와 속옷, 브래지어와 티셔츠를 하나씩 주웠다.
이대로 이곳에서 사라져 자신의 숙소로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솟구치려는 어떤 감정들을 애써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옆의 협탁. 책들을 올려 둔 낮고 긴 수납장. 욕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위치한 파우더룸. 아마도 그 안쪽에 있을 욕실.
커다란 방의 구조를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일었지만, 어금니를 꾹 물고서 협탁으로 걸었다. 뒤져 보아야 하는 첫 번째 서랍이었다.
한 손으로 옷가지를 끌어안고서 다른 손으로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매끄럽게 열리는 서랍 속에는 남자가 아까 꺼내었던 콘돔들이 흩어져 있었다. 무선 이어폰과 핸드폰 케이블이 보였고, 동전 몇 개가 있었다.
여기는 아니고.
선우는 서랍을 닫고서 다른 쪽 협탁을 열었다. 그 안에도 별게 없었다.
고개를 돌려 침대 맞은편에 벽과 같은 사이즈로 제작된 원목의 수납장을 보았다. 커다란 서랍이 세 개. 뒤져 볼 시간이 될까.
한 발을 딛다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걸음을 멈추고 아랫배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끊겼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선우는 입술을 깨물며 방문 쪽으로 걸음을 디뎠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자신을 이루고 있던 무언가가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달칵.
방문을 닫고 나온 뒤, 선우는 어둠 속에서 속옷을 입었다. 자꾸만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가면서 브래지어의 버클을 채우고 티셔츠를 입었다.
몸을 숙여 연노랑색의 플리츠 스커트를 입는데, 눈물이 툭 떨어진다. 선우는 황급히 손을 들어 눈물을 밀어냈다. 울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물을 닦아 내고서 거실을 눈으로 훑었다. TV 아래의 AV장을 제외하고 물건을 수납할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수납장이 많은 드레스룸은 찬찬히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이만큼이면 잘한 거야.
어디를 찾아야 할지 알았잖아. 이제는 찾아보기만 하면 될 테니까.
들어줄 사람도 없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선우는 손등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자꾸만 이유 모를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떨리는 숨을 삼켜 본다.
숨을 길게 내뱉은 뒤 걸음을 걸었다. 괜찮아. 잘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걸음마다 욱신욱신 통증이 일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통증이야말로 선우에게는 익숙한 감각이었으니까.
매일매일 시린 얼음물에 오래 발을 담구어 가며 연습을 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숨죽여 별채를 빠져나온 선우는 숙소동까지 쉼 없이 걸었다. 다행히 1층의 불은 꺼져 있어서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온 선우는 탁 소리가 나도록 방문을 닫은 뒤, 잠금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잠시 머물 뿐인 작은 방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공간이라고 마음이 편해지며 긴장이 풀어진다. 선우는 방문에 등을 기댄 채로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멍하니 자그마한 방을 본다. 1인용의 침대와 벽에 걸린 작은 그림. 옷장과 이어진 책상. 자그마한 스탠드.
쪼그려 앉은 선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보 같아. 왜 우는 건데.
눈물을 흘리는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으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감정을. 이 느낌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선택이었고, 많이 고통스러웠지만 닿는 느낌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 버린 기분이었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눈을 감으면 순간순간이 번쩍거렸다. 자신에게서 나온 것 같지 않았던 신음과 가슴을 핥았던 남자의 뜨거운 혀. 시트에 짓눌리던 뺨과 남자의 의지대로 벌어졌던 다리.
그건 어떤 경계가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어제의 이선우와 오늘의 이선우가 같은 사람일 수 없는, 넘어가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남자는 단숨에 부숴 버렸다.
부수기만 했을까. 알고 싶지 않았던 감각들도 깨워 냈다. 선우는 고개를 숙여 헐렁한 티셔츠의 목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머금었던 부분들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선우는 눈물을 닦았다.
몸이 닿을 때 싫지 않은 사람이라서,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일이지만 그래도 서문도 전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선우는 눈을 감았다.
오래된 피곤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