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저는 알아요
달칵.
서문도 전무가 통화를 끝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선우는 붉은색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차라리 욕을 먹었더라면 덜 창피했을까.
남자의 입에서 새어 나왔던 김 빠진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됐습니다, 주무세요.’
적선하듯 던져진 대답에 얼굴이 터져 나갈 것처럼 화끈거렸다.
우습지도 않았겠지.
도망치듯이 물러서 놓고, 뒤늦게 변덕을 부리며 올라가고 싶다고 했으니.
선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가 끊긴 화면을 넘기자 메시지 어플이 나왔다.
이 밤, 다시 전화를 걸게 만든 메시지가 보인다.
[제가 왜 이선우 씨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냐면]
한 줄을 내렸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문장이 나온다.
[제 핸드폰도 서문도 전무가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줄을 내리면.
[범인을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핸드폰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메시지였다.
다시 한번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에 선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왜 나는.
이 사람은 왜.
왜 이제서야.
저기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민우 핸드폰도, 민우를 죽인 사람이 담긴 사진도, 모두 저기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기회를 놓쳤다.
이렇게 또다시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걸까? 내일은 기회가 주어질까. 그다음 날에는? 또 그다음 날에는?
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이 흘러가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한 마음이 출렁거렸다.
급한 마음에 카디건도 챙기지 않고 방문을 열어, 계단을 내려와 숙소동을 나섰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줄지도 몰라. 어떻게든 이유를 대면 모르는 척 불러들여 줄지도 몰라.
밤의 정원을 헤치며 걷는다. 비라도 올 것처럼 습기를 머금은 밤이었다. 발밑을 스치는 잔디가 축축했다.
그깟 게 뭐라고. 죽을 생각도 했었는데, 남자랑 자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선우의 걸음은 자꾸만 빨라졌다. 별채에 닿을 즈음엔 뛰는 것과 다름없었다. 가쁜 숨소리를 내며 뒷문을 열자 불이 꺼진 1층 주방이 보였다.
텅 빈 어둠을 보며 선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꺾어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고 그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불이 꺼진 주방을 향해 발을 막 뻗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 등이 환하게 들어왔다. 움찔 놀라서 굳어 버린 선우의 귀에 서유라의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암. 아오, 출출해.”
배를 긁으며 주방으로 들어온 서유라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 하고 눈썹을 올린 서유라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왜 왔어?”
“……핸드폰.”
숨을 몰아쉰 선우가 간신히 말을 했다. 눈썹을 치켜올린 서유라를 보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핸드폰을 놓고 간 것 같아서요.”
급하게 생각해 낸 핑계에 서유라가 아아, 하고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없음 안 되지. 찾아봐.”
선우가 안도하는데 서유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너 핸드폰 여기 안 들고 오잖아?”
“그게. 아까 보고하러 올라갔을 때 들고 왔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안 보여서요.”
“아, 그래? 그럼 2층에 있는 거 아니야? 올라가 봐.”
그렇게 말을 하고는 스툴에 앉아 핸드폰을 켜는 서유라였다.
뭐 시켜 먹지,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는데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현실감이 훅 몰려들며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올라가서 뭘 어떻게 하게.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 밤, 이 선을 넘으면 정말로 잘릴 것이다. 짐작이 아닌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다음의 기회는 영영 없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태풍처럼 휘몰아쳤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생각해 보니까, 욕실에 둔 것 같아요. 다시 가 볼게요.”
멍청하다고 비웃는 서유라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서유라가 대충 손을 저으며 인사를 한다.
숙소동으로 돌아가는 길, 선우는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진실을 알 수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주저했을까.
괜찮아. 조금만 진정을 하자.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생각을 잘 하고, 마음도 잘 정리해서, 내일은…….
내일은.
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불이 꺼져 있는 별채의 2층이 하염없이 높아 보였다.
* * *
두 개의 머그잔 앞에서 선우는 심호흡을 했다.
무선 주전자에 올려 둔 물이 바글바글 끓었다. 카모마일 티백이 들어 있는 틴케이스를 열고서 머그잔에 하나씩 넣었다.
‘올라오세요.’
다시 하루가 흘러 서문도 전무를 마주하러 가는 시간이다. 나른하고 건조한 목소리는 늘 그렇듯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던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거대한 벽을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차를 타서 올라가면 서문도 전무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바라볼까. 나는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이어 가야 할까.
막막하지만 한편으로는 담담하기도 했다. 망설임은 끝났고 이제는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되니까.
아침에 약국에서 피임약을 샀을 때부터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먹어야 한다는 주의 사항을 듣고 물과 함께 한 알을 삼키고 난 뒤에는 기이한 평온이 찾아왔다.
잡생각은 도리어 방해가 되었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냥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약국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평상시처럼 서유라와 시간을 보냈다. 퇴근을 한 뒤에는 샤워를 오래 했다.
새로 사 온 샴푸로 머리를 감고 그조차도 냄새가 역하다고 할까 봐 여러 번을 헹구었다. 새 속옷을 꺼내어 입고 머리도 물기 없이 말렸다.
이제 남은 일은…….
차를 들고 올라가는 일.
선우는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같은 높이로 두 잔을 채운 다음 트레이를 들었다.
짙은 녹색의 중문 앞에서 가볍게 문을 두드린 뒤,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타이의 매듭을 내리던 서문도가 눈을 들어 선우를 보고는 그대로 다시 시선을 거두어 갔다.
차를 우려서 올라왔으니 뭐라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남자는 무심하게 타이를 끌어 내릴 뿐 선우에게 한 줌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소파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오늘 서유라 씨는.”
선우는 일단 보고로 운을 띄웠다. 묵묵히 커프스링크를 풀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오늘처럼 서늘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11시쯤 기상하셨습니다. 브런치로 아보카도 샌드위치 드셨고, 두 번째 수업을 했습니다. 영상도 찍어서 올렸고, 저녁은 본관에서 드셨습니다. 밤에는 게임 하신다고 들어가셨구요.”
입술을 떼어 말을 하고 있는데도 투명한 공기가 된 느낌이었다. 피가 바짝 마르는데, 상대는 무심히 입을 연다.
“수고했습니다. 내려가세요.”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다. 남자는 거대한 벽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입구도 계단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
“전무님.”
선우는 일단 남자를 불렀다. 달칵 소리가 나도록 커프스링크를 진열장에 내려놓은 서문도가 고개를 틀어 선우를 보았다.
눈빛이 무감했다. 불렀으니 돌아는 보아준 느낌.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자신을 보는 냉담한 눈빛 앞에서 선우는 한없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죄송하지만…….”
모르겠다. 그냥 솔직해질 수밖에.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가 웃음을 웃었다.
“무슨 기회.”
당신이랑 잘 수 있는 기회. 그리하여 내가 저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 그 말을 어떻게 돌려서 해야 하는지 몰라 선우가 머뭇거릴 때였다.
“장난하나.”
남자가 목 뒤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보고는 피식 웃는다.
“차 한 잔 들고 달랑달랑 올라오면 얼씨구나 좋다고 할 줄 알았어요? 혹시 나하고 썸 탄다고 착각해요? 내가 언제 이선우 씨한테 그런 신호를 준 적이 있던가?”
일순간 서문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실금 같았던 비웃음조차도 거두어져 버린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저는.”
선우는 입을 열었다. 어둠을 더듬어 길을 찾는 사람처럼, 남자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얄팍한 수는 들키고 말 거야. 선우는 진실 위에 거짓을 섞었다.
“처음이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선우는 말을 이었다.
“제가 남자한테 먼저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도 처음이었고, 진도가 너무 빨라서 당황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어서……. 겁이 났어요.”
하.
짧은 한숨을 쉰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기회를 달라고.”
서문도가 중얼거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간절해질까. 선우는 입술을 씹으면서도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선우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질문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이선우 씨는 알아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알기는 뭘 아냐는 눈빛으로 남자가 입매를 비틀었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서문도를 향해 한 걸음을 걸었다. 남자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마침내 서문도의 앞에 서게 된 선우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고서, 입을 연다.
“저는 알아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발꿈치를 들어 올리며 입을 맞추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어깨를 잡은 손은 바르르 떨려 왔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에 선우는 입술을 떼었다. 떨리는 눈을 들어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갈색 눈이 찌를 듯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제발.”
선우는 속삭이듯 말하며 다시 한번 발꿈치를 들었다. 입술을 꾹 누른 채로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발,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나는 이제 물러설 곳이 없어.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남자가 선우의 얼굴을 쥐며 고개를 틀었다. 눌려 있기만 했던 아랫입술이 남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알긴 뭘 안다고 그래.”
몸이 반짝 들어 올려졌다. 파고드는 남자를 위해 입을 벌려 주며, 선우는 문도의 목을 힘껏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