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21화 (21/168)

21. 그리고 월요일

주말이 지난 뒤에 만난 서유라의 이마와 입술은 둥글게 부어 있었다. 선우를 보더니 하이, 하고 대충 손을 흔들고 하품을 크게 했다.

“아주머니께서 식사 뭘로 하시겠냐고 물어보셨어요. 토스트하고 샐러드 준비하신 거 있고, 단호박 영양밥도 준비되어 있다고요.”

선우는 소파에 풀썩 눕는 서유라에게 말했다.

“으. 됐고. 입맛 없으니까 커피만 마실래. 야, 나 좀 팽팽해졌어? 입술 괜찮아? 어색하진 않구? 시술 잘된 것 같아?”

누워 있던 서유라가 몸을 일으켜 선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피부도 팽팽해진 것 같고, 입술도 볼륨 있어진 것 같아요.”

“그치?”

“원래도 예쁘셨는데.”

“머 그건 그렇지만.”

선우의 칭찬에 서유라가 히히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선우는 인터폰으로 숙소동에 아침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린 뒤, 커피를 내리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소파에 누워 있던 서유라가 핸드폰을 꺼내 거울처럼 화면을 만들더니 연신 이리저리 들여다보면서 선우에게 말했다.

“이따 나 좀 호텔에 데려다줘. 살 거 톡으로 보내 줄 테니까 쇼핑해 놓고 쉬고 있어.”

“남자친구분 만나시게요?”

“응. 촬영 쉬는 날 만나야지. 프로그램 늘어났다고 자꾸 바쁜 척하드라. 실컷 키워 놨더니 엄한 년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닌가 몰라. 울 쟈기가 좀 생겼그든. 어휴, 스탭이며 작가며 얼마나 꼬리를 쳐 대는지. 썅년들.”

유라가 아무렇지 않게 욕설을 뱉었다. 선우는 커피머신의 전원을 누르고 에스프레소를 내리며 유라에게 물었다.

“아이스로 드릴까요?”

“응. 아, 나 담배 좀.”

박소영이 거실에서 담배를 태우고 간 뒤로, 유라도 거실에서 데크로 나가는 커다란 창을 열어 놓고 담배를 피울 때가 종종 있었다.

선우는 내려진 커피를 유라에게 가져다준 뒤, 게스트룸으로 가서 담배와 그 옆에 놓인 소주병을 들고나왔다.

거실의 창가에 앉은 서유라는 외부로 나가는 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커피를 한 모금을 쭉 마신 뒤에 아구구구— 소리를 내었다.

“너 하는 거 그거.”

창밖을 보며 담배를 태우다 말고 유라가 말했다. 선우가 바라보자 재를 톡톡 털면서 말했다.

“그거 있잖아. 발레인지 뭔지.”

“네.”

“그거 살은 빠져? 효과가 뭔데?”

서유라의 얼굴이 꼭 엄마 때문에 억지로 학원에 오게 된 어린아이 같았다.

운동 싫은데, 하기 싫은데, 연신 투덜거리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해서 눈으로는 이리저리 살펴보는.

“아, 그게요.”

선우는 상냥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요즘엔 취미로 성인 발레 배우시는 분도 많으시거든요. 효과라면, 자세가 바로잡히는 거랑 탄탄하게 몸의 라인을 잡아 주는 근육이 생기는 건데, 유라 씨는 워낙 체형도 예쁘시고 자세도 곧은 편이시잖아요.”

선우의 칭찬에 유라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가?”

“네. 몸매가 워낙 예쁜 편이시니까, 가벼운 스트레칭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흠, 하고 유라가 선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호기심도 생기고 흥미도 생겼는데 선뜻 하겠다고 나서기가 애매한 모양이었다.

“근데 나 필라테스도 좀 했고, 요가도 했거든? 너 나 가르칠 만한 실력은 되냐?”

“전공도 했고, 학원에서 수업도 했었어요.”

선우는 차근하게 대답을 한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부담스러우시면, 간단하게 영상만 찍는 건 어떠세요? 전에 방송하실 때 한번 올리시겠다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긴 했는데…….”

엉망인 식습관과 생활 패턴으로 사는 서유라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이어트는 주로 절식을 위주로 하다가 입이 터지면 야식을 흡입하는 식이었다.

필라테스와 요가를 해 왔다고는 하지만, 쭉 이어서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유연성은 있어도 근육에 힘은 하나도 없었다.

유라를 위해서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선우도 바라던 바였다.

지금보다 조금 더 친밀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시키는 일만 하는 것으로는 서유라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까.

“저게 그거야?”

“한번 보실래요?”

선우는 유라가 턱으로 가리키는 에코백을 가까이 당겼다. 그 안에 있는 포인트 슈즈와 레오타드, 하늘거리는 연한 살굿빛의 스커트를 꺼냈다. 서유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다 잘 어울리실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게 제일 예쁠 것 같아서 가져와 봤어요.”

“그, 뭐. 그렇긴 한데. 그거 다 나 줄라고?”

“네. 슈즈는 명 실장님께 사이즈만 여쭤보고 가져온 거라, 발에 안 맞으시면 새로 구해 드릴게요.”

유라가 담배를 끄고 선우의 곁으로 왔다. 준비해 왔던 레오타드와 스커트를 들추면서 뭐 별거 아니네,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에 어린 관심은 선우가 가르치던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 이따 저녁에 한번 해 볼까? 영상두 올려야 되구. 요즘 머 새로운 아이템 올린 게 없긴 했어. 그치?”

서유라가 풀어진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에 대답을 하듯이 선우도 미소를 지었다.

“나 씻고 준비할 테니까, 너도 준비하고 있어.”

“키는 지난번처럼 본관에서 받아 올까요?”

“아냐. 내 방에 있으니까, 그냥 준비나 해.”

그렇게 이야기를 한 뒤 욕실 쪽을 향해 걷던 서유라가 뒤를 돌았다.

“야, 근데 넌 좋겠다. 나같이 맘 좋은 애 만나서. 내 덕분에 쇼핑도 하고 호텔에서 커피도 마시구. 진짜 나 같은 고객 잡은 거 완전 횡재겠다, 너.”

진심으로 본인의 시중을 드는 것이 횡재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저야……. 유라 씨한테 감사하죠.”

선우는 순순히 서유라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르게. 나 같아도 존나 고마울 거 같아. 그러니까 알아서 잘해라.”

“네.”

선우는 웃었다. 웃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대답이 없기도 했지만, 웃는 것이 마음을 감추는 제일 쉬운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라가 의심 없이 선우를 편하게 생각하는 날.

언젠가는 시시콜콜 이야기를 흘리게 되는 날.

그날까지 선우는 서유라에게 상냥하게 웃어 줄 생각이었다.

* * *

밤 11시. 퇴근을 했고, 건너오라 전화를 했고, 여자가 올라왔다.

“보고하세요.”

문도는 드레스룸 한가운데 있는 진열장 앞에 서서 말했다. 거실의 중간쯤에 서서 그를 보던 이선우가 입을 열었다.

“백화점으로 쇼핑을 다녀왔습니다. 운전은 제가 했고요,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영상을 찍었습니다.”

흘깃 쳐다보았더니 여자가 말을 잊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계속하세요.”

그가 말하자, 선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게임 하신다고 들어가셨고, 저는 퇴근을 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문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커프스링크를 풀고, 타이를 풀고, 벨트를 풀어 허리에서 빼내기만 했다.

진열대 위에 하나씩 물건이 놓일 때마다 달칵달칵 유리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선우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 어, 음,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럼 저는.”

그래 너는.

문도는 이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 밤은 어떡할 건데.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망설임 끝에 여자가 말했다. 문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중문을 향하던 이선우가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여자는 내려가 버렸다.

이거야 원.

다시 유혹을 해 와도 받아 줄까 말까 한 판에, 지레 겁먹은 얼굴로 제가 먼저 그만두겠다는 건 무엇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몇 번을 들이대 놓고 정작 기회가 왔을 때 멈춘 것은, 그래, 작전상 후퇴라고 봐줄 수 있었다.

다시 스텝을 밟아야 할 시기에 망설이다 결국 물러서는 것은 무엇인지. 이 정도에서 멈추려고 끈질기게 들이댔던 건가.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주저하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웃겼다.

순진한 여자를 연기하기 위함이라면 이미 늦지 않았나. 정말 순진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고용주에게 자 보고 싶단 말을 안 했을 테니.

설마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 중인지 파악도 못 하고 내가 먼저 들이대기를 기다리는 중인가. 문도는 헛웃음을 웃으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이쯤에서 끝. 신경을 긁어 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거추장스럽기만 한 여자 따위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을 생각을 하며 문도는 욕실로 들어갔다.

벨 소리가 울린 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소파 위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이 위잉위잉 진동을 하며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이선우.’

액정 위에 뜬 세 글자가 보였다. 이제 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어쭙잖은 변명을 우물거릴 거라면 늦었다는 것도 모르나.

문도는 핸드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바꾸어 놓은 뒤에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문도의 말에 이선우가 저어, 하고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 혹시 괜찮으시면.

괜찮으면, 뭐.

— 다시 올라가도 될까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뭘까, 이 여자는.

밀었다 감는 것도 어지간히 예상이 되는 범위가 있을진대, 이 여자는 놓을 것처럼 끝까지 풀었다가 한 번에 감아 버린다.

“지금 다시 올라오겠다고요.”

— ……네.

문도는 대답을 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 거실의 창가에 섰다. 숙소동 2층, 이선우의 방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다시 올라올 거면, 뭐 하러 갔어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였다. 전화로 할 거였으면 눈앞에서 하는 게 낫지 않은가.

밤이었고, 둘이었고, 그 밤의 연속선이었다.

바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 눈치만 보다가 물러나더니, 이제 와서 올라오겠다고?

망설이는 것인지, 이유가 따로 없는 것인지 여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구는 것을 어디까지 받아 줘야 하나 고민을 할 때였다.

— ……씻고 가려고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목덜미 어디쯤이 뜨끈해졌다.

“오늘은 가슴 만지게 해 주나?”

— …….

“내일은 넣게 해 주고?”

— …….

문도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됐습니다. 주무세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자그맣게 대답을 한다. 욕망을 부풀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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