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꽃의 그림자 @AW
일요일 오후의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우는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와 빈자리에 앉았다.
아현과의 만남을 위해 카페에 나온 참이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남아 있어 선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어젯밤, 이모에게 부재중 전화가 왔는데 다시 답전화를 하지 않았다.
민우가 죽은 뒤 몇 번 세종으로 내려오는 건 어떠냐는 권유를 했던 이모였기에,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선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 신호음이 가고 이모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선우야.
“이모, 어제는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어요.”
— 응. 그럴 거 같았어. 학원 일이 많이 바빠?
“네. 요즘 입시반 수업을 맡아서 많이 바빠요. 바쁜 일 지나면 세종으로 제가 한번 내려갈게요.”
— 응. 그래, 바쁘게 살면 좋지, 뭐. 밥 잘 챙겨서 먹고, 아무 때나 또 전화하고. 알았지?
“네. 그럴게요.”
아마 한동안은 전화를 못 할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대답을 했다.
전화를 끊고, 선우는 꽃잎이 저물어 가는 창문 너머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 달칵달칵 노트북 자판을 치는 소리. 창문 너머 바람에 흔들거리는 벚나무의 가지.
빨대로 얼음을 저으며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다가 선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한 번씩 번쩍이는 섬광처럼, 먹먹해진 머릿속에 어제의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내리꽂혔다.
서문도의 강렬한 힘. 갇혀서 꼼짝을 할 수 없었던 그때의 순간. 사방에서 덮쳐 오는 감각의 파도.
사나운 파도에 휩쓸리면 그런 기분이 들까. 물에 처박혔다가 꺼내지면 이런 기분일까.
처음이었다.
입을 맞추는 것도, 혀를 빼앗기는 것도. 남자의 아래에서 함부로 옷이 들추어지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어젯밤 별채의 2층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너무 강렬해서 도무지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 같지 않음에도, 이렇게 한 번씩 불시에 선우를 덮쳐 왔다.
“언니.”
선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깨어나 뒤를 돌았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펑퍼짐한 티셔츠를 입은 아현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현아.”
선우는 반갑게 아현을 불렀다. 아현이 조금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앉아.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 라떼?”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챙기며 물었다. 아현이 진동벨을 보이며 말을 했다.
“아, 저 주문해 놓고 왔어요.”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다음에 사 주세요.”
이제 스물세 살. 초등교사 임용 시험 준비를 하는 아현의 얼굴은 선우의 눈에 아직도 어리기만 했다.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보았던 사이라 그런지, 아현은 선우에게 스물세 살의 대학생이 아닌 민우의 초등학교 친구로 보였다.
“잘 지내지?”
선우의 물음에 아현이 그냥 웃더니 커피를 가지러 카운터로 향했다.
아현이 민우의 여자친구였다는 걸, 쓸쓸했던 장례식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3일을 꼬박 머물고 납골당까지 따라와 준 민우의 친구 중의 한 명이었다.
‘누나는 몰라도 된다니까.’
제대를 하고 유난히 핸드폰을 보며 히죽대는 날이 많길래, 여자친구라도 생긴 거냐고 물었더니 얼굴 붉히며 손을 휘휘 젓던 민우였다.
작은 집이었다. 옆방에서 통화만 해도 소리가 대충은 들리는.
한 시간씩, 두 시간씩 밤늦도록 이어지는 통화 소리를 들으면서 피식 웃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학원 그만두셨다고 해서 걱정이 되더라구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아현이 말했다.
“응. 새로 일자리를 구해서 지금은 그쪽에서 지내.”
“다행이다.”
아현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현이 무엇을 걱정했는지 선우는 알았다. 그건 선우가 아현을 걱정하는 마음과 같은 마음일 테니까.
민우의 자리를 메꾸지 못한 채로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 마음이 아파 울지는 않을까.
잠은 제대로 자고 있을까. 누구 기댈 만한 사람은 있을까. 제자리걸음만 계속하다가 무너지면 어떡하나.
선우가 아는 아현은 말수가 별로 없는 아이였다. 장례가 끝난 뒤에 저기 언니, 하면서 핸드폰의 대화 내용을 보여 주기 전까지는 그저 묵묵히 옆을 지켜 준 민우의 친구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이거.”
아현이 가방을 뒤적여 작은 상자를 꺼냈다. 민트색에 흰 리본이 둘린 상자는 주얼리 브랜드의 박스였다.
“저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구매한 사람이 찾아가질 않는다고요. 연락을 해도 답이 없어서, 거기에 적어 놓은 두 번째 연락처에 연락을 한다구요.”
선우는 박스를 열어 보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심플한 남자 반지 하나와 아주 작은 다이아가 박혀 있는 같은 디자인의 여자 반지였다.
‘누나, 여자들은 저런 데 좋아하지?’
언제였을까. 백화점 근처를 지나다, 주얼리 샵을 가리키며 민우가 물었다.
그럼 좋아하지, 라고 대답을 했었다. 민우가 히히 웃었고, 선우는 왜 여자친구 사 주게? 라고 놀리듯이 물었다.
예고 없이 눈물이 뚝 떨어진다.
선우는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그리고 아현을 보면서 애써 웃었다. 아현도 눈시울을 붉힌 채 웃고 있었다.
“민우가 이런 생각도 하고. 기특하네.”
“그날 무슨 생각인지 제 번호를 적었대요. 혹시 자기가 연락이 안 되면 여기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보통은…….”
아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물을 참으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여자친구한테는 비밀로 하잖아요. 맨날 깜짝 선물 줄 거 있다고, 기대하라고, 비밀이라고 해 놓고.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던 걸까요.”
그러게. 민우는 뭔가를 예감했을까.
선우는 고개를 들어 초록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납골당에서 아현이 보여 준 메시지에는 두 사람이 사귄 이후로 나누었던 대화가 들어 있었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앞둔 민우는 낮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영재가 일하는 클럽의 호출을 받는 대리운전을 하고 있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한 손님들을 대신해 운전하는 것을 걱정하는 아현에게 급하게 돈을 모아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오래 할 건 아니라고도 했었다.
연예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영재를 걱정하기도 했고, 양아치 같아 보여도 애는 착한 애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클럽에서 알바를 하는 영재의 대타를 뛰게 되었고, 페이가 짭짤하니 다음 날 맛있는 것을 사 주겠다고 했었다.
민우야. 너는 돈을 모아서 커플링을 하려고 했었구나. 백일을 꼽아 가면서, 여자들은 어떤 걸 좋아하냐고 물어 가면서. 기특하네, 우리 민우.
“이거 언니가 가지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현이 반지 케이스를 선우의 앞으로 밀어 주면서 말했다.
“왜. 너 주려고 샀을 텐데. 가져가기 부담스러워?”
“아뇨. 민우 돈으로 산 거고……. 민우 반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아현을 보다가 선우는 빙그레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잇는다.
“그럼 이렇게 하자. 민우 반지는 내가 낄게. 아현이 네 반지는 가져가. 우리 하나씩 나누자. 그러면 너무 부담스러울까?”
선우의 말에 아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선우가 내미는 작은 반지를 끼어 본다.
선우도 민우의 반지를 들어 검지에 껴 보았다. 헐렁하게 돌아가는 반지를 아현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많이 크다. 목걸이를 하든가 해야겠다.”
“그러게요.”
아현이 흐릿하게 웃었다. 창문 너머 거리에는 벚꽃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4월도 이제 끝나 가는구나, 선우는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 * *
문도는 인천에서 있었던 ‘서도 데블스’의 시범 경기를 관람하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관람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고 프런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고충을 헤아리겠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 주요 일정이었다.
대동했던 그룹 홍보실과 수행비서들과 함께 경기장을 둘러보고, 선수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 뒤로 프런트와 간단한 면담을 진행하고 경기 초반을 관람했다.
야구장을 떠나 서울에 진입을 했을 때는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붉은 등이 들어왔다. 서서히 속력을 줄여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운 문도는 좌측 방향지시등을 켰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켜지자 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좌회전 신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차창 앞을 스쳐 가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길을 건너는 사람들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수수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앞을 여미지 않은 트렌치코트를 입고서 다른 여자와 함께 길을 건너고 있었다.
바람에 트렌치코트의 앞섶이 날리고, 이선우의 머리카락도 흩날렸다. 문도의 시선이 여자를 따랐다.
웃는 얼굴이었다.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는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이선우는 같이 걷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함이 철철 넘치는 눈빛이었다. 길을 건넌 뒤에는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한다.
같이 걸었던 어린 여자는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데, 이선우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빠앙.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에서 가벼운 경적 소리가 울렸다. 문도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엑셀을 밟아 큰 호선을 그리며 좌회전을 하였다. 시선은 여전히 이선우에게 붙여 놓은 채였다.
골목의 한쪽에 차를 세운 문도는 룸미러를 통해 뒤쪽을 보았다. 골목을 올라오는 이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벌어졌던 트렌치코트의 앞섶을 여미면서 이선우가 걸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 아래를 지나는 여자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문도는 여자의 걸음걸음을 바라보았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차창으로 스미는 오후의 봄볕은 금빛이 섞인 오렌지빛.
바람이 불고, 꽃가지가 흔들렸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아름드리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꽃의 그림자가 여자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어제 그의 밑에서 떨었던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고요한 표정이었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가쁜 숨만 몰아쉬었던 이선우는 과연 다시 차를 권할 것인지.
권한다면 언제가 될 것인지. 이제 더 권하는 일은 없을 것인지.
자신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문도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그림 같은 풍경을 스쳐 지났다.
룸미러를 통해 이선우가 차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이내 멀어지고, 멀어진다.
문도는 문득 담배를 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