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카모마일
“카모마일은 어떠세요?”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순간 자신의 안에서 터져 나온 웃음이 어떤 종류인지, 문도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어이없어서인가, 재미있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기대가 되어서인가.
문도는 진열장 위에 풀어 놓았던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8분. 자정을 30분 남긴 시간에, 서유라에 대한 보고를 마친 여자가 망설이며 건넨 말이 카모마일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어제는 커피, 오늘은 카모마일.
“카모마일이요.”
말을 되짚는 순간에도 가느다란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카페인이 없어서 밤에 드시기에 괜찮을 것 같아서요…….”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문도는 뒷목을 쓸면서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빤히 바라보자 여자의 얼굴이 옅게 붉어졌다.
수줍은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것이 아니다. 창피하고 무안하여 입술을 깨물며 참아 내는 붉음이었다.
그래. 오늘 어떻게 나올지 궁금은 했었다.
순진하고도 무구한 얼굴로 다시 커피를 마시자고 할지,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보고만 하고 뒤로 물러설지.
그랬더니 카모마일이라고.
카페인이 없다고.
이걸 뭐라고 봐줘야 할까.
어설퍼서 우스울 정도였지만, 분명 유혹이라 볼 수 있는 두 번의 제안이 있었고, 두 번의 거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시도하는 미련한 유혹이라니.
이성이 보내오는 은밀한 신호를 헷갈리는 법은 없었으나, 이쯤 되면 이 꿋꿋한 권유가 정말 유혹이기는 한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남자와 여자로 주고받는 신호가 아닌,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에 오가는 과잉된 충성이나 친절은 아닐지.
잘 보이려고 차 한잔 올리겠다는 걸 이성 간의 유혹으로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지.
“그래요. 카모마일, 가져와 봐요.”
문도는 애써 초조한 기색을 감추고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여자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자신을 향해 크게 열리는 맑은 눈동자를 보자 무언가가 꿀렁, 하고 목울대를 치는 기분이 들며 아래가 단단하게 일어섰다.
“아…….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대답을 한 여자가 몸을 돌렸다. 중문을 열어 둔 채로 걸음을 빨리하여 시야에서 사라진다.
쉬운 새끼.
문도는 팽팽해진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한심해서 웃었다.
* * *
1층의 주방으로 내려온 선우는 원목으로 된 트레이에 머그잔 두 개를 올렸다. 카모마일 꽃이 들어 있는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양손으로 트레이를 잡는데, 달달달 컵이 떨리는 소리가 난다. 선우는 잠시 트레이를 내려놓고 자신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아 눌렀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은 이후로 심장이 뛰며 정신이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고 싶다고, 커피를 마시겠냐고, 카모마일 차라도 마시겠냐고 여러 번에 걸쳐서 물어보면서도 실제로 이루어질 일이라고는 사실 생각하지 않았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해서, 방법이라고는 그런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서 무작정 두드리는 마음으로 던졌던 말이었는데.
선우는 김이 오르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티백 안에서 작은 국화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후우.
긴장을 풀어 보려 심호흡을 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산 넘어 산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직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차 없는 거절의 말을 듣게 될 것 같기도 하고, 허튼수작을 걸었다는 이유로 잘릴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제 와 뒤로 갈 수는 없으니까.
오래 지체하면 남자의 방문이 닫힐지도 몰랐다. 선우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꾹 감았다 뜬 뒤 다시 트레이를 들었다.
“전무님. 차 가져왔습니다.”
선우는 중문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선우를 보는 서문도는 셔츠에 슬랙스만을 입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트레이 위의 머그잔에 머물렀다. 두 개의 머그잔을 보고는 가볍게 웃더니 성큼 걸음을 걸으며 선우에게 말했다.
“앉아요.”
앞서 걸어간 서문도가 거실의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선우도 뒤를 따랐다. 투명한 유리로 된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긴 소파의 끝자리에 앉았다.
머그잔을 들어 서문도의 앞에 놓고, 자신의 앞에 놓는데 서문도가 말했다.
“두 잔이네요.”
선우는 고개를 들어 서문도를 보았다. 서문도가 머그잔 안의 티백을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선우를 본다.
“네.”
“나랑 자고 싶어요?”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선우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를 마시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좋아졌다는 거짓 고백을 하며 접근을 할까. 잠시라도 상대해 줄 수 있냐고 할까. 상상 속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나왔던 말들이 목에 걸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잘리고 싶나?”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가는 남자의 눈빛이 선우의 척추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개기지? 내가 우스워요?”
남자의 갈색 눈동자가 선우를 향했다. 이상한 눈동자였다. 불이 타는 것 같은 밝음과 시리도록 차가운 어둠을 휘저어 놓은 것 같은 눈.
그 눈이 자신을 진득하게 바라보자 목구멍이 딱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아니요. 저는…….”
선우는 말라붙은 목을 열었다. 남자의 타는 것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 버릴 것처럼 보고 있었다.
비뚜름하게 비틀린 입술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 시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어요.”
뭐가, 라는 눈빛으로 서문도가 선우를 보았다.
“전무님 같은 분이랑, 자게…… 되면…….”
선우의 낯이 활활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인데 뱉어 내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다. 남자가 짙은 웃음을 삼켰다.
이쯤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남자는 선우가 어디까지 스스로 내뱉는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습니다.”
남자가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혹은 기대한다는 듯이 웃으며 선우에게 말했다.
“판 깔아 줄 테니까 해 봐요, 그럼.”
* * *
문도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투명했던 여자의 뺨은 홍조가 뒤덮고 있었다.
곤란한, 난처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두 눈동자에서 문도는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떻, 게…….”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아주 자그마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문도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잘.”
문도는 소파 깊이 등을 기대며 여자에게 말했다.
“잘 해 봐야지 않겠어요?”
그 말에 이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막막한 눈으로 문도를 보았다.
남자를 먼저 유혹해 본 일이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이 나름의 수법인가. 그렇다면 제법 탁월한 방법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붉게 물든 뺨이며, 물기 머금은 눈이며, 부끄러움 대신 씹고 있는 입술이 아랫배를 뻐근하게 하였다.
가까이 다가온 이선우가 엉거주춤 무릎을 굽혔다. 여자가 팔을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이쯤에서 여자를 당겨 키스를 리드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문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여자가 몸을 기울이며 다른 손으로 문도의 어깨를 잡았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헛웃음을 머금는 순간 선우가 다리를 벌려 문도의 무릎에 걸터앉았다.
“하.”
아랫배가 맞붙지도 않았는데, 문도에게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맹랑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문도는 자신의 다리 위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자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고개를 들게 하자, 흔들리는 여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훑듯이 바라본 문도는 여자의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입술이 맞붙은 순간 여자에게서 숨을 들이마시는 작은 소리가 났다.
문도는 맛을 보듯이 부드럽게 여자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가볍게 머금었다가 놓아주는데 여자의 뻣뻣하게 굳어 버린 상체가 느껴졌다.
내숭인 것을 알아도 흥분이 되었다. 문도는 여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자신에게로 당겼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포개자 여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입술을 빨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굳어진 여자의 몸은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문도는 입술을 떼고서 말했다.
“키스 처음 하나? 이따위로 할 거면 내려가고.”
여자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든다.
동그란 이마와 엷은 색깔의 잔머리. 선이 고운 콧대와 도톰하게 벌어진 입술.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가는 몸.
숨결이 스칠 만큼 가까이에서 보는 여자는 처연할 정도로 예뻤다.
“…….”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질 때였다. 여자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뻣뻣하게 굳었던 팔을 들어 문도의 목에 감았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먼저 포개어 왔다. 부드러운 입술을 벌리며 문도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머금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입술을 떼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눈앞이 뜨겁게 물드는 기분에 문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되기는 뭐가 돼.”
여자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으며 머리카락을 휘어 감았다. 놀란 듯 굳어진 여자의 입술을 깨물어 벌리고 깊게 혀를 넣었다. 뱀처럼 감아 아프도록 빨았다.
헐떡이는 달큰한 숨을 마시며 엉덩이를 쥐었다. 입술이 닫힐 틈을 주지 않으며 샅샅이 핥았다. 하아, 아, 여자에게서 나는 끊어진 신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프도록 문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달큰한 냄새가 여자에게서 물씬물씬 풍겨 왔다. 젠장. 뭐가 이렇게 야해.
문도는 몸을 비틀어 여자의 위로 올라타며 원피스를 걷어 올렸다. 하얗고 매끈한 허벅지를 쓸어 올리고 허리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납작한 배를 더듬어 브래지어에 손을 대는 순간, 여자의 팔이 문도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잠깐만요.”
움직임을 멈추자 흐트러진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으로 내몰린 사냥감처럼 여자는 떨고 있었다.
“그만할까.”
여자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짙은 숨을 내쉰 문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키지 않으면 할 필요 없으니까, 내려가요.”
문도의 말에 여자는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몇 번의 숨을 쉰 뒤에 끝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싶어요. 키스까지만.”
황당한 제안이었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문도는 낮은 웃음을 웃었다.
“그러니까……. 끊어 가고 싶으시다.”
여자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면?”
여자의 눈동자가 당황하며 흔들렸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예상 못 했던가. 픽 웃음이 나왔다.
문도는 누워 있는 여자의 볼을 툭 건드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차가운 샤워가 필요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