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 밤에, 커피를요
“뭐? 진짜?”
선우가 앉아 있는 거실까지 게스트룸에서 외치는 서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복도 쪽을 바라보는데, 게스트룸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까치 머리를 한 서유라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양팔을 벌리며 튀어나왔다.
“역시 울 아빠! 야, 나 드디어 나갈 수 있대! 와, 씨바 이게 몇 달 만이야. 가만 있어 봐, 셀러 언니한테 전화부터 걸어서…….”
기쁨의 춤을 추며 튀어나오던 서유라가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뒤적거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언니. 넘 오랜만이져어~ 네~ 저 유라에여~ 네~ 다른 게 아니구 저 요즘 컨디션 좀 괜찮아져서~ 오늘 잠깐 나가 볼까 하는데여~”
서유라가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음, 지금 준비하고 나가면 12시? 준비 좀 해 주시구여~ 네~ 그때 봬여~”
한 톤 높은 상냥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서유라는 전화번호를 훑어보더니 누군가에게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늘 쉰다고 했지? 웅웅. 유라 오늘 쇼핑 나갈 꼬예요. 잠깐 볼 수 있을까앙?”
상대방이 무어라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처럼 볼에 바람을 넣고서 말을 하던 서유라가 한순간에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서문도 그 새끼? 걔 암것도 아니야. 울 아빠가 대장이거든. 야, 당연한 거 아니냐? 회장이 높지, 전무 나부랭이가 높을까. 아, 진작 아빠 통할걸. 암튼 룸 잡고 대기 타고 있어. 룸 넘버는 톡으로 보내궁.”
손톱 끝으로 톡 소리가 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서유라가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운전하지?”
“네.”
“잘해?”
선우는 서유라가 말하는 운전을 잘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음, 하고 생각 끝에 말을 이었다.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차량 운행도 같이했었어요.”
“그래? 그럼 너 오늘 내 기사 해라.”
유라의 말에 선우는 갈등을 했다. 보아하니 외출을 허락받은 것 같은데, 그렇다는 건 오후 내내 혼자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였다. 그런데 같이 외출을 하게 된다면.
선우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2층으로 향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민우의 휴대폰이 여기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받기 전에는 하루가 길기만 하더니 메시지를 받은 이후로는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운전은 직접 안 하세요?”
서유라 성격에 면허가 없을 것 같지는 않고, 음주나 교통 법규 위반으로 운전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건가 싶어서 물어보았다.
“아, 나 면허 없잖아.”
“아…….”
뜻밖의 이야기였다. 분명히 영상에서도 사진에서도 차에 있었던 모습을 본 것 같은데 면허가 없다니. 과격하게 운전을 해서 주행 실기에서 떨어졌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아니, 무슨 상식으로 풀면 필기는 다 통과한다며? 무슨 놈의 상식이 글케 어려워? 미친 거 아니야?”
필기에서 다섯 번을 떨어졌다고 서유라는 씩씩거렸다.
“그런데 저는 좋은 차는 몰아 본 적이 없어서요. 강 기사님께서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자신을 두고 외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우가 물었다. 서유라가 냉장고를 열고 아래위로 살펴보면서 대답을 했다.
“운전은 강 기사가 잘하지. 근데 강 기사 보고 대기 타라고 하면 몰래 남친 만난 거 들키니깐. 넌 내 편이니까 입 다물고 있을 거잖아. 아니야?”
그 말에 선우는 방금 전 들었든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룸을 잡으라고 했던 게 그런 의미였었구나.
냉장고에서 딸기와 오렌지를 손질해 둔 통을 꺼낸 서유라가 뚜껑을 따고 딸기를 두 개 연속으로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볼이 튀어나오도록 씹으면서 선우에게 말했다.
“아침은 됐고, 나 준비하고 나올 테니깐 엄마한테 가서 차 키 받아 놓구 카드도 받아 와.”
꿀꺽, 하고 딸기를 넘기는 소리가 선우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딸기 두 알을 더 입에 밀어 넣은 서유라가 총총걸음으로 게스트룸을 향해 걷는다.
선우는 아쉬운 마음으로 2층을 다시 올려다본 뒤 주방의 뒷문으로 향했다.
* * *
쇼핑을 빙자한 외출은 장장 아홉 시간이 걸렸다.
가방과 의류를 시작으로 구두와 벨트, 목걸이와 귀걸이, 향수와 모자까지 구입을 마쳤을 때는 오후 4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쇼핑한 물건들을 모두 차에 싣고 돌아온 선우에게 유라는 커피를 사 주겠다고 선심 쓰듯이 말했고, 백화점과 연결된 호텔의 라운지 카페에 선우를 앉혔다.
“나올 때 전화할게. 쉬고 있어라.”
커피 한 잔을 시켜 주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진 서유라는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났을 때 나타났다.
묘하게 나른한 표정과 초점이 흐려진 동공을 하고 나타난 서유라는 코를 훌쩍거리며 선우에게 말했다.
“덕분에 잘 놀았넹. 근데 알지? 서문도한테 보고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러고는 차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선우는 아주머니를 불러 잠에 취한 건지 약에 취한 건지 모를 서유라를 부축해서 별채로 옮겨 놓았다.
쇼핑했던 물건들까지 드레스룸에 잘 넣어 두고 나니 시간은 벌써 9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거실에 서서 선우는 2층을 바라보았다. 옥수댁 아주머니나 서유라가 있을 때는 괜히 의식이 되어서 마음 놓고 올려다보지도 못했었다.
선우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으로 걸었다. 한 발을 올려놓아 본다. 그리고 다시 한 발을. 숨을 쉬었다가 다시 한 발을. 걸음걸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렇게 다섯 개의 계단을 오르다가 선우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올라갔다가 서문도 전무가 갑자기 들어오는 상상을 해 보았다.
2층 마스터룸에 서 있다가 들켜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서 전무가 뭐 하는 중이었냐고 묻는 모습도 보인다.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더 들을 것도 없이 해고라고 통보하는 모습도 눈앞에 그려졌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계단을 내려오는 선우의 한숨이 길었다.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휴대폰을 발견할 것 같은 미련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선우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퇴근 시간인 10시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았다. 서유라는 약에 취한 건지 많이 피곤해서인지 깊게 잠이 든 상태였다.
선우는 소파에 앉아 20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이런 때조차 미련하게 시간을 지키는 자신이 싫기도 했다.
자신이 좀 더 영리한 사람이었더라면, 융통성이 많고 언변이 좋은 사람이었더라면 더 많은 것을 알아내지 않았을까.
‘귀엽네.’
피식 웃으며 지났던 서문도 전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자가 무심하게 2층을 올라간 뒤, 선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
“하아.”
선우의 한숨 소리가 허공을 맴돌 때였다. 주방의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서문도 전무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인지 한 손으로 쥔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였다.
“전화를.”
선우와 시선이 마주친 서문도가 핸드폰을 아래로 내리면서 말했다.
“안 받는다 했더니.”
“아, 네. 10시가 아직 안 되어서요.”
핸드폰은 숙소동에 있다. 시간을 이제야 인지한 듯이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정적이 흘렀다. 선우는 대화를 이어 보려는 의지를 담아 나름 말을 건네 보았다.
“본관에서 건너오시는 건가 봐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침묵만 고였다. 서문도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못해 냉담하게 느껴졌다.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으로 선우는 어렵사리 다시 말을 건넸다.
“오늘은 퇴근이 빠르시네요.”
뭐 하자는 거지.
딱 그런 눈으로 남자가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쥐어짜서 건넬 때마다 목이 말라붙는 느낌이었다.
“유라 씨 일과 보고는 지금 할까요?”
남자의 시선이 무심하게 선우를 훑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느슨하게 걸쳐진 타이가 어딘가 빈틈을 느끼게 할 법도 한데, 남자에게 피로한 기색은 있어도 빈틈은 없어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죠.”
툭 던지듯이 말을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선우는 남자를 따라 중문 안으로 들어갔다.
“보고하세요.”
탁, 하고 불을 켜면서 남자가 말했다. 성큼 걸어 오픈 드레스룸으로 간 남자는 평소처럼 시계를 풀고, 커프스링크를 풀었다.
몇 걸음 안쪽으로 들어간 뒤 멈춰선 선우는 눈만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얇은 액자 두께의 커다란 TV가 걸린 벽. 그 아래 길고 낮은 AV장. 1인용 라운지체어, 3인용 소파. 그 가운데의 소파 테이블.
선우는 한 박자를 쉬었다가 보고를 시작했다.
“서유라 씨는 11시쯤 일어나셔서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습니다. 점심은 백화점에서 저와 함께 파스타를 드셨구요, 저녁은 호텔 라운지 카페에서 파니니 드셨습니다. 돌아와서는 피곤하시다고 바로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최지상을 만난 이야기도, 다섯 시간이 넘도록 내려오지 않았던 이야기도, 아무래도 다시 약을 손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건성으로 듣고 있던 서문도가 선우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자신의 팔목에 둔 채로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려가도 좋아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무심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선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황동색의 중문 손잡이를 잡고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았다.
“전무님.”
서문도가 고개를 들어 선우를 보았다. 직선의 강한 눈빛이 머뭇거리는 선우에게 닿는다. 선우는 입술을 깨물다 결심한 듯 문도에게 물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비웃음조차 없었다. 서늘한 눈빛을 하고, 무심히 중얼거릴 뿐이다.
“이 밤에, 커피를요.”
그리고는 말없이 선우를 보았다.
남자의 눈에 서린 빛은 질책일까, 짜증일까. 선우가 애꿎은 입술만 깨물 때 서문도가 짧게 답했다.
“됐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마치 의도는 정말로 커피였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지만, 무딘 칼날에 베인 것처럼 속이 화끈거렸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조용히 중문을 닫고 나올 수밖에.
선우는 막막한 심정으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