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불쾌한 아침의 시작
창밖으로 새벽의 푸르스름한 하늘이 보였다. 문도는 드레스룸의 진열장 앞에 서서 시계를 찼다.
딱 떨어지는 슈트를 입고,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넘긴 그의 모습에는 어젯밤 마셨던 술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슈트의 재킷을 집어 드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마친 문도는 중문을 열며 마스터룸을 나왔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주방 쪽의 뒷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청명하고도 쌀쌀한 공기가 문도를 맞이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본관을 향해 걷는다. 별채의 짙은 화강암 길이 끝나자, 본관의 밝은 회색 디딤돌이 징검다리처럼 나타났다.
문도는 무심한 얼굴로 꽃이 활짝 피어난 벚나무를 지나고, 연둣빛 새잎을 뽐내는 배롱나무도 지났다.
잠겨 있지 않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 고깃국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로퍼를 벗고 거실에 올라 다이닝룸 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문도…….”
힘없이 가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서 회장이 앉은 휠체어를 박소영이 밀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흘러내리고 있는 얇은 살거죽만 남은 것 같은 서명구 회장이 틀니를 보이며 웃었다.
“나이가, 드흘면으흔……. 눈이 기냥 뜨여…….”
아침에 절로 눈이 떠진다는 이야기를 서명구 회장이 힘겹게 뱉어 냈다. 문도는 회장의 휠체어와 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어제…… 수고가아, 많았다고. 애비가, 영상…… 보여 주어서.”
“주총 영상 보셨어요?”
“으흥…….”
“제가 잘 나오던가요?”
“그으러험…….”
문도는 기특하다는 듯이 자신의 등을 툭툭 치는 서명구 회장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옆에 있던 박소영도 그런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누구 손주인데. 서 전무가 울 회장님 판박이잖아. 넘넘 잘 나오드라. 요 미간 찌푸릴 때 줄 두 개 생기는 거, 그거 너무 똑같아. 호호호.”
자신의 외모가 외조부의 물림이라고 굳게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가 들었으면 기함할 말이었지만, 문도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회장님 젊은 시절만 할까요.”
“아유, 참 우리 서 전무는 말도 예쁘게 해. 그렇죠?”
“흘흘흘…….”
바람이 새는 것 같은 회장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앞치마에 머릿수건 차림의 장 여사가 웃는 낯으로 세 사람을 맞이했다.
“어떻게 같이들 오시네요? 회장님, 어제 드시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셨던 고깃국 준비했어요. 마치맞게 잘 익은 배추김치 하고 갓 무친 무생채 하고 올릴게요.”
서 회장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때에는, 이밥에 고깃국이면흔, 최고, 남바완, 베슷흐.”
회장이 마른 나뭇가지 같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젊은 시절 미 군수 공장에서 일을 할 때 혀를 깨물어 가며 익혔다는 영어를 말미에 붙이는 건 서 회장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회장님. 자리 괜찮으시죠?”
쌀밥에 고깃국이 최고라는 회장의 휠체어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면서 박소영이 물었다.
장 여사가 회장의 취향에 맞추어 송송 썬 파를 얹고 후추를 톡톡 뿌린 맑은 국물을 유기그릇에 내어 왔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흰 쌀밥과 잘 익힌 배추김치, 맛깔스럽게 무쳐 낸 무생채도 각자의 자리에 정갈하게 놓였다.
“아이구, 다들 벌써 모이셨네.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지, 잠은 푹 주무셨어요?”
상이 차려지는 중, 서중호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뒤이어 간단한 메이크업까지 마친 우현희도 1층으로 내려와 식탁에 앉았다.
“아버님, 몸은 좀 어떠세요?”
“좋아, 베리 굿드…….”
회장의 대답을 시작으로 모두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고깃국에 밥을 말아 호호 불어 한 술씩 회장의 입에 넣어 주던 박소영이 살그머니 서명구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왜 그러냐는 듯이 서 회장이 박소영을 보자,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모아 유라, 유라, 라고 작게 속삭였다.
아아. 회장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씹던 밥알을 꿀떡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에……. 유라……. 고만, 풀어 주어…….”
아주 잠시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서중호가 잠깐 눈썹을 들어 올렸고, 문도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식사가 아무렇지 않게 이어졌다. 무생채를 집어 든 서중호가 섬뜩할 정도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박소영을 보면서 말했다.
“작은어머님, 유라 그 녀석이 나가고 싶답디까?”
“아니, 그게……. 부회장도 알잖아. 우리 유라 답답한 거 딱 질색인 거. 애를 너무 가둬 두니까, 우울증 오면 어떡하나 싶어서.”
“이런, 이런. 회장님께서 오해를 하시겠어요. 작은어머니, 말이야 바른말로 가두긴 누가 가두었나요. 스스로 건강해진 모습으로 아버지 뵙고 싶다고 들어와 놓구선. 안 그러냐 문도야?”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 회장에게서 부회장으로, 부회장에게서 서문도로 넘어왔다. 문도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태평하게 대답을 했다.
“나갈 때도 됐죠.”
“그, 그래? 그래도 돼?”
박소영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예. 두 발 달린 사람을 언제까지 가둬 놓을 수도 없는 법이고. 저야 홀가분해지고 좋습니다.”
“그치? 걔도 이제 정신 차렸어.”
박소영이 환하게 미소를 지을 때였다. 문도는 박소영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쯤에서 아버지도, 저도 오늘부로 완전히 손을 떼는 걸로 하죠. 고모님 관련해서 앞으로 다시 뵙는 일은 없는 줄 알겠습니다.”
누군 좋아서 데리고 있었는 줄 아나.
10년 전쯤이었나. 흔히들 하는 말로 본처였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회장은 20년을 끼고 살던 애첩을 본가 안방으로 들이겠다고 선포를 했다.
차기 후계자를 노리던 아버지 서중호는 자식들 중 유일하게 회장의 편에 서며 박소영 모녀를 끌어안았고, 그 뒤로 회장 보란 듯이 살뜰하게 챙기는 시늉을 하고 있다.
차기 회장이 되기 위한 아버지의 눈물겨운 노력은 그뿐이 아니었다.
건설과 중공업. 그 당시 서도의 알짜배기만 쏙쏙 가져간 서용호가 실시간으로 나락 길을 걸을 때, 아버지는 명동 큰손이었던 외가의 자금으로 금융 계열사를 번듯하게 세워 볼륨을 키웠다.
어머니가 총력을 기울여 키워 낸 금융 계열사의 자금력을 기반으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화학을 소생시키는 데 성공을 했다.
때마침 불어온 시대의 바람이 날개를 달아 주었고, 화학은 이제 서도의 주력 사업이 되었다.
그럼에도 회장은 결정적인 서도의 지분을 넘기지 않았다. 정말로 숨이 간당간당해진 지금에서야 서중호 일가로 지분 승계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아버지 서중호는 굴비가 매달린 밥상에 앉아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굴비가 한 칸 한 칸 내려올 때마다 침을 꿀떡꿀떡 삼키는 중이고.
밥상머리에서 밀려나 문간에 앉은 서용호와 서미경은 그 밥상이 뒤집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떨어지는 살점 하나라도 건져 보려고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이가 박소영이고, 그 옆에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게 서유라였다.
회장의 건강도 괜찮겠다, 망나니 서유라 챙기는 시늉도 했겠다, 승계 작업도 절반 이상 진행 중이겠다, 이쯤에서 아량 있게 보내 주는 것도 괜찮은 그림이 될 테지.
문도는 박소영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어떻게, 명 실장 불러 드릴까요?”
박소영은 태연하게 묻고 있는 서문도를 바라보았다.
명 실장을 부른다는 건 살 집을 알아보게 한다는 건데.
이참에 서유라에 관해서 완전히 손을 털겠다는 서문도의 뜻을 읽은 박소영의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정말 나가 살아도 된다고? 대신 앞으로 유라가 사고를 치는 족족 내 책임이 되는 거고?
그럼 수습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부탁을 해야 하는 거겠지?
박소영은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회장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유, 아주 나가서 살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저 좋아하는 쇼핑 정도는 허락해도 되잖아. 그 정도만 해 달라는 거지, 누가 나가고 싶대? 유라한테도 여기가 좋지. 아직 건강 회복도 덜 됐고. 나도 있고 회장님도 있고. 그쵸?”
“으응…….”
회장이 대충 고개를 꺼떡였다. 잿빛에 가까운 눈동자는 이지를 잃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누구보다 교활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잠시 대화가 멈춘 것 같은 그때, 차분히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우현희가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도 생각이 있으면 조심해서 지내겠죠. 건강도 많이 회복했고 하니 외출 정도는 괜찮을 듯한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나야 당신 말에는 언제나 찬성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하십시다. 나가서 사는 건 조금 더 지켜보고 결정을 하도록 하고, 작은어머님이 유라 외출은 책임지시는 걸로요. 회장님, 어떠세요? 이 정도면 괜찮으시지요?”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중호가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은 그만하면 된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서 국물에 적신 밥이나 한 술 더 넣으라는 듯이 입을 벌렸다.
모두가 원하는 바를 적절히 이룬 자리였다.
회장은 박소영의 청을 들어주었고, 박소영은 서유라의 외출을 얻어 냈다. 서중호는 유라가 울타리 밖에서 저지를 짓에 대한 책임을 미루었다. 그렇게 서유라는 여전히 별채에 남게 되었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서유라에게 붙여 놓은 여자에게로 흘러갔다.
2층으로 올라가고 싶다며, 샴푸를 바꾸었다고 어필을 했었던 여자에게로.
문도는 숟가락을 든 채로 잠시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숱한 유혹을 받아 보았지만, 그런 앞뒤 맥락 없는 어필은 처음이었다.
이선우가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인 건지, 쌍팔년도 버전의 숙맥 곰탱인 건지 모르겠지만.
귀엽긴 했지. 꼴리기도 했고.
애꿎은 원피스만 쥐어짜던 모습이 생각나 피식, 하고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왔을 때였다.
식탁 아래로 박소영의 허벅지를 주물럭거리는 회장과 그 옆에서 살갑게 웃으며 밥을 떠먹이고 있는 박소영이 눈에 보였다.
아니, 밥은 먹고 좀 더듬지?
때와 장소 못 가리는 추접스런 행태에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여자의 샴푸 냄새를 굳이 확인했던 자신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어설프기 짝이 없던 여자의 유혹까지 연달아 떠올라 버렸다.
젠장. 하필 회장과 박소영의 모습에 겹쳐 보일 것은 무엇인가.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럼 저는 먼저 출근하겠습니다.”
밥맛이 뚝 떨어진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불쾌한 아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