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6화 (16/168)

16. 해 봐요

‘보다 나은 환경,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서도 케미컬은 본격적인 ESG 경영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사회적 환경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될 것을 약속드리며…….’

광화문 사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도 케미컬 본사, 그 꼭대기 층에 위치한 부회장실 안에 문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라인 생중계까지 동원해 역대 최대의 규모로 치러진 정기 주총이었다.

화면 속의 서문도는 의연한 모습이었다. 쏟아지는 질문에도 매끄럽게 대답을 했으며, 시의적절한 순간에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하고 단단한 문도의 눈빛이 화면을 뚫고 서중호를 보고 있었다.

서중호는 그 모습을 웃음기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이면 홍보실에서 잘 다듬은 버전으로 각종 뉴스 사이트에도 올라갈 테지. 다음 달 사보에도 대문짝만하게 실어야겠다.

이거야말로 돈 한 푼 안 들인 광고가 아니고 무엇인가. 참으로 쓸모 있는 아들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문도는 화면으로 손을 뻗어 정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화면 안의 서문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왜 벌써. 행사도 잘 마쳤겠다, 조촐하게 저녁이나 같이할까 했는데.”

조촐한 저녁.

이희철 전지 부문 총괄대표이사, 최윤창 첨단소재 부문 대표이사, 서형규 큐셀 부문 대표이사를 포함한 열댓 명의 임원들과 함께하는 저녁이 퍽이나 조촐하겠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고생한 저희 팀원들도 밥 한 끼 사 먹여야죠. 다음에 같이하겠습니다.”

“그렇긴 하다만.”

서중호가 아쉬운 표정으로 문도를 보았다. 이만하면 자신이 할 몫은 다 하지 않았냐는 표정을 지으며 문도는 서중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미 송 팀장이 입가를 실룩이며 회식 장소를 정했을 터였다. 문도는 서중호와 김 실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무님, 명가 참치로 오시면 됩니다.]

부회장실을 나와 확인한 핸드폰에는 지도가 첨부된 송 팀장의 메시지가 있었다.

임원들 회식 자리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손발 맞추며 고생했던 부원들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때였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송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문도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내일부터는 다시 더럽게 바쁜 스케줄을 따라 움직여야 하겠지만.

누적된 피로로 눈이 뻐근했다. 문도는 이후의 일정들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술과 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취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 * *

선우는 샤워기를 틀어 머리를 적셨다.

하루 종일 서유라와 붙어 있다 보니 다른 샴푸를 사러 나갈 틈도 없었다.

무심결에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서 별채로 건너갔을 땐 서문도 전무는 이미 출근을 한 뒤여서 상관이 없었다지만, 밤에는 얘기가 달랐다.

굳이 지적할 정도로 싫은 냄새를 보란 듯이 풍기며 들어가면 안 되니까.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문도 전무였다. 민우 핸드폰을 찾아보지도 못했는데 괜히 밉보였다가 잘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선우는 손을 뻗어서 비누를 집었다. 하루면 배송을 받을 수 있다는 인터넷 쇼핑물에서 샴푸를 주문해 두었으니 내일 아침에는 새 샴푸로 머리를 감을 수 있을 거였다.

거품을 낸 뒤에는 따뜻한 물을 틀어서 뻑뻑한 머리카락을 여러 번 헹구었다. 습관적으로 샴푸와 똑같이 생긴 린스통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는 평소보다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말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저에게 왜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거죠?]

‘A’라고 저장해 둔 의문의 번호와 나눈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사진을 여러 장 보내온 A는 선우의 질문에 답이 없었다. 혹시 몰라서 검색 포털에서 핸드폰 번호를 검색도 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선우는 메시지창을 닫으며 생각에 잠겼다. 2층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낮에 몰래 2층을 둘러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오후에는 서유라가 깨어 있었고, 오전에는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했다.

잠깐씩 방문을 열어 보는 거야 어떻게 해 볼 수 있겠지만, 방 하나하나를 꼼꼼히 뒤질 만큼의 시간은 절대로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면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볼 때였다.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언니, 잘 지내고 계시죠?]

아현이었다. 선우도 오래 알고 지낸 민우의 동네 친구이자 첫 번째 여자친구였던.

[응. 잘 지내. 아현이 너도 잘 지내지?]

선우는 답을 보냈다.

[발레학원 앞에 지나다가 잠깐 들렸는데, 그만두셨다고 해서요. 잘 지내시는지 걱정돼서 연락드려 봤어요.]

[나는 잘 지내. 아현이 너도 잘 지내야 해. 알았지?]

선우가 또박또박 답장을 적고 있을 때였다. 화면이 바뀌며 벨 소리가 울렸다. 서유라였다.

“네.”

— 야, 와서 나 좀 찍어 봐.

전화가 뚝 끊겼다. 낮에 서명구 회장에게 건너갔던 서유라는 싱글벙글하며 별채로 돌아왔었다.

아빠가 외출도 나갈 수 있게 해 주고 새집도 알아봐 준다고 했다며 신나게 최지상과 통화를 했었다.

그리고는 무슨 쇼핑몰에서 협찬으로 마스크팩을 받았다고 했다. 그걸 찍어서 올려야 하네 마네 둘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밤이 되어서야 찍을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선우는 아현에게 답장을 마저 써서 보냈다. 보고를 하려면 어차피 건너가야 하는 별채였다. 주머니 안에 핸드폰을 넣은 선우는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 * *

딩, 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가 들렸다.

서유라가 고무팩을 바르고 눕는 모습을 찍어 준 뒤 게스트룸의 문을 닫고 나오던 선우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센서등이 들어와 있고, 그 아래 서문도 전무가 서 있었다. 반쯤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눈을 감고서.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몇 초쯤 그렇게 서 있던 남자는 후, 하는 짙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젖히며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서서히 눈을 뜨던 서문도와 선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묵묵한 시선이 버거워질 때쯤 남자는 실금 같은 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건조한 눈빛이 된다.

서문도는 아무 말 없이 뚜벅뚜벅 걸어 주방으로 향했다. 걸음엔 휘청거림이 없었고 얼굴도 딱히 붉어졌다 보기 어려웠지만 술을 마신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왠지 말을 걸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기왕 만났으니 보고를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선우는 천천히 문도의 뒤를 따랐다.

유리컵을 꺼낸 서문도는 얼음을 가득 받고, 그 위로 물을 가득 받았다. 곧바로 목을 뒤로 젖히며 단숨에 마셨다.

조용한 거실 위로 꿀꺽꿀꺽 물을 넘기는 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렸다.

“저…….”

선우는 얼음만 남은 컵을 아일랜드 위에 툭 내려놓는 서문도를 불렀다. 손목으로 입가를 닦던 남자가 눈을 들어 무슨 일이냐는 듯 선우를 바라보았다.

“오늘 서유라 씨는…….”

“내가 전화를 했던가요.”

선우의 말을 남자가 잘랐다. 희미한 술 냄새가 선우에게로 번져 왔다.

“네?”

“건너오라는 말, 한 적 없을 텐데.”

“아, 그게. 서유라 씨가 호출을 해서 건너왔습니다. 전무님 뵌 김에 보고를 하려 했는데, 하지 말까요?”

서문도는 말없이 얼음이 든 컵을 다시 냉장고의 디스펜서에 가져다 댔다. 물이 조르륵 얼음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며 컵을 채웠다. 거의 가득 찬 물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서문도가 말했다.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꿀꺽꿀꺽 크게 몇 모금을 마신 뒤에, 컵을 내려놓으며 선우를 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해 봐요.”

굳이 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는 투였다.

“서유라 씨는 오늘…….”

이렇게 여기서 해 버리면 안 되는데.

준비해 두었던 보고를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선우는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이 밤의 몇 분만이 2층에 올라가 서문도 전무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이렇게 헛되게 흘러가고 있다니.

“11시에 기상을 하셨고, 아침으로 그린 스무디를 마셨습니다.”

거기다 방금 전 스치듯이 들은 말이 선우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에 선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누가 누구를 잘랐어야 했단 말일까. 자르는 사람은 서문도 전무일 테고, 잘리는 사람은……. 불길한 예감에 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 이제 시작이었는데, 내쫓기면 어떡하지. 귓가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렸다.

비스듬히 물컵을 내려다보고 있는 서문도는 지금 당장이라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자를 것만 같다.

방법은…….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당장은 하나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선우는 원피스 자락을 쥐었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 2층에 가서 마저 하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서문도가 시선을 선우에게로 돌렸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냐는 눈빛이었다.

오해를 하건 곡해를 하건 상관없었다. 선우는 빤히 자신을 보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무거운 적막 끝에, 서문도가 짧게 웃는다.

“됐습니다. 보고는 들은 걸로 하죠.”

서문도가 쥐고 있던 물컵을 놓았다. 몸을 돌려 주방을 나가려 했다. 선우는 무슨 말이라도 잇고 싶은 다급한 심정으로 말했다.

“샴푸.”

문도의 걸음이 멎었다. 선우는 그를 향해 돌아서면서 말했다.

“샴푸 바꿨어요. 냄새가 싫다고 하셔서.”

두어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서문도가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긴장되고 초조한 마음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왔다. 한참 선우를 보던 서문도가 피식 웃었다.

“귀엽네.”

그리고 그대로 스쳐 지났다. 선우는 2층 계단을 오르는 서문도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짙은 술 냄새만이 홀로 남은 선우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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