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2층의 구조
선우는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버석버석해진 눈꺼풀이 시야를 덮었다.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메시지에, 사진에,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새벽녘, 동이 틀 때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눈이 떠져 버렸다.
숙면을 취한 게 언제였을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민우가 죽은 이후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잠이 들어도, 꿈을 꾸어도, 어느 한 부분은 늘 깨어 있는 기분이었다.
이선우가 불면증이라니. 민우가 들었으면 웃을 일이었다. 누나처럼 단순한 사람이? 라며 크게 웃었을 테지.
여러모로 상반되는 성격의 남매였다. 민우가 활달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면 선우는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민우가 산만할 정도로 이런저런 일을 동시에 벌였다면, 선우는 오로지 하나에만 집중했다.
성격이 살가워 친구가 많은 것도, 엄마와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웃었던 것도 모두 민우였다.
그런 민우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로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선우도 뒤척이는 날이 많았지만 민우는 방에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었다.
그런 날이면 선우는 이부자리를 들고 민우의 방으로 건너갔다.
민우야, 잠을 자야지.
제법 큰누나처럼 다 큰 민우를 타이르며 마주 보고 누웠다. 엄마 아빠 이야기를, 쫓겨나듯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동네 구석구석에 서린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하루를 지낸 이야기와 내일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물가물 잠이 들었다.
민우야. 나는 그때, 내가 널 재웠다고 생각했었거든.
아니었다. 재워야 하는 민우가 있어 자신도 잘 수 있는 거였다. 민우와 같이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민우가 있어서 어떻게든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두 사람의 삶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에, 재활 치료를 포기했을 때도, 발레단을 그만두었을 때도 후회하지 않았다.
선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했지만 이럴 때는 억지로 잠을 자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선우는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혹독한 훈련을 그만둔 뒤로 몸은 둥글어지고 부드러워졌다. 굳은살도 사라지고 달고 살았던 멍도 없어졌다.
4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섬세한 근육들은 이제 안으로 숨었지만, 오래된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는 일부러라도 이렇게 몸을 움직이곤 했다. 발끝부터 천천히 풀어 주면서 선우는 이제까지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메시지와 사진을 받았고, 그 내용은 민우의 핸드폰이 서문도 전무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호흡을 따라 몸을 풀어 주며 선우는 잡생각들을 하나씩 비웠다.
당황스러웠던 감정도 비우고, 두서없이 튀어 올랐던 의문들도 지웠다.
처음부터 다시.
시야를 흐리는 것들을 지우고 집중해야 하는 것 하나만 남겨 놓아야 한다면.
알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그날 밤의 진실. 그러기 위해서 찾아야 하는 것이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민우의 핸드폰.
그렇다면 찾아보면 될 일이다. 이 집에 들어와 있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부터 따지고 있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내일 당장 잘릴 수도 있는 일인데.
메시지가 사실이라면 서문도 전무에게 민우의 핸드폰 있을 것이고, 거짓이라면…….
막막한 그 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부딪쳐서 찾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모든 게 술술 풀릴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단서부터 따라가다 보면. 그러다 보면 민우야.
선우는 긴 호흡을 내쉬었다.
호흡 끝에, 서문도 전무를 떠올렸다. 그가 머무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선우가 해야 할 일이었다.
* * *
서유라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아침 시간은, 2층으로 올라갈 틈을 노리는 시간이 되었다.
생각으로는 혼자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것 같은데, 유심히 틈을 노리다 보니 의외로 사람들이 드나들 때가 많았다.
아침에 건너왔을 때는 상을 치워야 한다고 조리사 아주머니가 왔다 갔고, 눈치를 보며 2층 계단을 보는데 청소를 해야 한다며 옥수댁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아휴, 전무님은 언제까지 블라인드를 안 다시려는가 몰라.”
2층 청소를 하고 내려온 옥수댁 아주머니가 소파에 앉아 있는 선우를 보며 말했다.
“블라인드가 원래부터 없었어요?”
“나야 모르지. 전에 여기 살던 사람이 유명한 건축가였다는데, 거의 손 본 데 없이 그냥 들어왔다지 아마?”
“특이한 것 같긴 해요. 집이 이렇게 큰데, 방은 별로 없는 것 같구요.”
선우는 새삼스럽게 커다란 공간을 둘러보았다.
“여길 매일 청소하시려면 힘드시겠어요.”
아주머니를 따라 주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아일랜드에 놓인 스툴도 빼 주고 괜히 물도 한 잔 내렸다.
“그래서 돌아가며 하잖아. 어차피 전무님이 여기 다 쓰시는 것도 아니니까, 주로 쓰시는 공간은 매일 하고, 나머진 돌아가면서 하고. 막내 아가씨 방은…….”
옥수댁이 쓰윽 몸을 낮추고 목소리의 볼륨을 줄여서 말했다.
“드러워 죽겠는데 청소한다고 들어가면 지랄 난리가 나서, 시킬 때만 하잖아.”
선우는 물 한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서유라가 머무는 공간 쪽을 돌아보았다.
현관에서 왼쪽으로 난 좁고 긴 복도 끝에 서유라의 방이 있고, 맞은편에 서유라가 쓰는 드레스룸이 있었다.
선우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의 끝, 벽면을 따라 길게 내려온 대리석 계단을 바라보았다.
서유라가 깨어나기 전에 올라가 봐야 할 텐데. 마음이 조금씩 급해지려 했다.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옥수댁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탁탁 털면서 거실 쪽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뒷문으로 향했다.
“건너가시게요?”
선우의 질문에 옥수댁이 돌아보지 않고서 손만 흔들었다. 선우는 뒷문을 열고 나가는 옥수댁의 발걸음을 지켜보았다. 숙소동 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 뒤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햇빛이 내려온 계단에 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숨을 죽여 2층까지 올라간 선우는 혹시 몰라 1층을 내려다보며 복도를 지났다.
조금 걷자 2층의 메인 홀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중문 안쪽이 서문도의 개인 공간이고, 반대편 왼쪽으로는 방문 세 개가 보였다.
발소리를 죽여 홀을 건너간 선우는 제일 오른쪽의 방문을 열었다.
벽을 둘러싼 커다란 책장과 긴 테이블, 그 위에 놓인 노트북이 보였다. 서문도 전무가 쓰고 있는 개인 서재 같았다.
살그머니 문을 닫은 뒤에 그 옆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널찍한 욕실이었다.
마지막 문을 열자 벽 쪽으로 커다란 소파가 보이고 맞은편에 하얀 벽이 보였다. 천장에는 빔프로젝트가 달려 있었다.
선우는 방문을 닫으며 숨을 깊이 마셨다. 뒤를 돌아 건너편에 보이는 짙은 녹색의 중문을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의 공간을 그려 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였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리며, 문이 활짝 열렸다. 선우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침대 시트를 품에 안은 옥수댁 아주머니가 나오며 선우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엄마 깜짝이야. 선우 씨가 왜 여기 있어?”
쿵쾅쿵쾅 심장이 마구 뛰었지만, 선우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올라왔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옥수댁 아주머니가 먼저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건넸다.
“막내 아가씨가 올라가 보래? 서 전무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가서 보고 오래? 아님 뭐라도 좀 찾아오래?”
선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옥수댁이 능청맞은 미소를 보이며 선우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밀었다.
“응, 그래. 그랬겠지. 무슨 소리가 들렸을 거야. 아유, 그럼. 막내 아가씨가 시킨 거 그런 거 나는 모르지.”
우리끼리의 비밀이라는 듯이 눈을 찡긋거리고는 옥수댁이 중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래도 선우 씨, 확실히 알아 둬야 해. 선우 씨 월급 주는 사람은 서문도 전무야. 막내 아가씨가 뭐라고 해도 휘둘리지 마. 그거 다 들어주고 그러다 자기부터 잘리는 수가 있어.”
“네. 조심할게요.”
선우는 옥수댁을 따라 걸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 전무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요. 여기 흐트러지면 바로 아셔. 막내 아가씨 여기 들어오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여기 뒤졌잖아.”
옥수댁의 말에 선우의 귀가 열렸다.
“유라 씨가요?”
“으응. 깽판을 치고 싶었는지, 뭘 찾으려 했던 건지 자기 나름 정리는 해 놔서 나는 몰랐는데, 밤에 돌아온 전무님이 장 여사님 호출했어.”
서유라는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아휴, 아침에 출근해서 얘기 듣는데 등에서 땀 나더라고. 전무님이 부리는 사람들한테 까탈스럽지는 않은데, 칼같이 정확한 데가 있거든.”
선우는 옥수댁을 위해 중문을 열어 주었다.
시트를 안아 든 옥수댁이 고맙다는 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는 머뭇거리며 옥수댁에게 물었다.
“시트 가는 거 도와 드릴까요?”
“아냐, 요령이 있어서 혼자 해야 편해. 내 말 명심하고. 응?”
옥수댁이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한 번 더 강조하듯이 말했다.
“막내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다 받아 주지 말라구. 알았지?”
“네.”
선우는 애써 미소를 보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중문 안쪽으로 들어간 옥수댁이 마스터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안으로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선우는 막막한 심정으로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