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4화 (14/168)

14. 샴푸 냄새

별채로 건너가는 길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밤이 내린 정원, 센서등이 들어오는 별채의 뒷문, 달빛이 스민 고요한 거실, 벽을 따라 길게 뻗은 계단.

모두가 그대로인데 계단을 오르는 선우의 심장만이 크게 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흑백의 사진이 자꾸만 떠올랐다.

차에 오르는 서문도의 모습이, 그 싸늘하고도 무심한 얼굴이 자꾸만.

왜 그 밤에 호텔 주차장에 갔던 거지? 정말 서문도 전무가 민우 핸드폰을 가져갔을까? 왜? 어떻게? 클럽에 갔었을까? 민우를 만났을까? 서로 아는 사이였나. 우리 민우…….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생각에 마음이 출렁거렸다. 선우는 잠시 현기증이 일어 벽을 짚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야. 모두 너무 섣부른 생각들이야.

선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고 있다. 이 모든 게 너무나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몇 장의 사진에,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이 보낸 메시지 하나에 이렇게 감정적으로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호텔 주차장에 주차했다는 이유만으로, 새벽에 그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민우의 핸드폰을 가져갔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더구나 서유라도, 최지상도, 그곳에서 놀다가 떠났던 많은 남자들도 아닌 서문도 전무라니.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침착해야 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면서 눈을 떴다. 난간을 잡고서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알아서 들어오라는 듯, 한 뼘 정도 열려 있는 문을 선우는 똑똑 두 번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다. 밤이 되어 살짝 나른해진, 단단한 목소리. 선우는 자신의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지 않기를 바라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새삼스럽게 2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서문도 전무의 공간을 눈여겨보게 된다.

거실, 맞은편의 커다란 드레스룸, 거실 안쪽으로 마스터 베드룸.

공간을 훑어본 것은 짧은 순간이지만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이 공간 어딘가일까. 안쪽의 침실에 있을까.

생각을 한 것은 정말 잠깐이었는데, 서문도가 고개를 돌려 선우를 보았다. 보고를 하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오늘 서유라 씨는.”

무엇을 했더라.

메시지를 보고 놀란 상태로 갑작스럽게 건너오는 바람에 보고를 할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선우는 잠깐 사이를 띄우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오후 1시 반 정도에 기상하셨습니다. 오후에는 박소영 씨가 건너오셨고, 인터넷 쇼핑을 하셨습니다. 저녁으로…….”

계속 이어 가려던 순간, 베스트의 단추를 풀고 있던 서문도와 눈이 마주쳤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가 민우의 핸드폰을 가지고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죠? 오늘 어디 아픕니까? 왜 자꾸 멈추지?”

서문도의 목소리에 옅은 짜증이 묻어 있었다. 선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어디까지 말을 했었는지 다시 기억을 더듬을 때였다.

“저녁으로.”

서문도가 끊어졌던 부분을 짚었다.

“저녁으로, 훈제 오리 샐러드와 호밀빵, 그린 스무디를 드셨습니다. 혼자 드시기 싫다고 하셔서 같이 먹었고요, 밤에는 SNS에 올릴 영상을 찍으셨습니다.”

선우가 보고를 하는 사이 서문도가 베스트를 벗었다. 진열대 위에 올려 두고 목덜미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잠깐 천장을 본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려 선우를 보았다.

“이선우 씨.”

“네.”

“실례되는 말인 줄 아는데, 하나만 부탁할게요.”

갑작스런 말에 눈만 깜빡이고 있는 선우에게, 문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향수가 너무 독합니다. 별채 건너올 때는 안 뿌렸으면 좋겠는데.”

“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선우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물었다.

“향수요?”

향수를 뿌린 적이 없는데 향수라니.

“꽃냄새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짙어서.”

꽃냄새라면 혹시 샴푸 냄새를 말하는 걸까.

숙소동 욕실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샴푸에 알록달록한 꽃그림이 그려져 있던 것이 기억난다. 퍼퓸 샴푸라고 쓰여 있었던 것도.

“아, 이게. 향수가 아니고 샴푸 냄새라서요.”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선우를 보며 서문도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럴 리 없을 텐데, 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선우를 향해 걸어왔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물렀다.

“숙소동에 있는 샴푸가…….”

향이 짙은 거였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내려오며 옷깃이 스칠 듯이 가까워졌다.

자신의 위로 고개를 숙인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선우는 어깨를 움츠렸다. 확인이라도 하듯 남자가 숨을 들이마셨고, 선우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있던 선우는 남자가 쓱 몸을 세우고 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뭐가 못마땅한 건지, 서문도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계속 이 샴푸를 썼다고요?”

한 번 더 확인을 하듯 서문도가 물었다.

“네…….”

그렇게 심한가. 선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코끝에 대어 보았다. 희미한 꽃향기가 났다. 이곳에 들어와 계속 쓰던 샴푸의 잔향이었다.

향이 진한 편이긴 했지만 익숙해져서인지, 시간이 지나며 휘발되어서인지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불쾌하다면 바꾸면 되지 않을까.

“샴푸를 바꿀까요?”

선우는 서문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우를 내려다보는 서문도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짜증과 못마땅함과 불쾌감이 뒤섞인 시선이 선우의 얼굴 위에 머무르다가 서서히 거두어진다.

“됐어요.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이만 내려가 보세요.”

선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와 중문을 닫는데 미친 새끼, 탄식처럼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모르게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 * *

여자가 정원을 걷는다.

별채의 뒷마당을 지난 여자가 숙소동과 별채 사이의 담벼락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는 모습을, 문도는 2층의 거실에서 내려다보았다.

이선우는 아치형의 입구를 통과하려다 말고 머뭇거리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문도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특수 유리를 썼으니 밖에서 보일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눈이 마주친 기분이었다.

이미 머리카락 냄새를 맡는 미친놈 같은 짓을 저질러 놓았는데, 눈이 마주친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담벼락 아래에 선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의 일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움츠러든 어깨와 놀란 듯 굳은 눈동자. 샴푸의 잔향이 지난 뒤에 맡아졌던 여자의 희미한 살내음.

잠깐 뒤를 돌아 별채를 보던 여자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숙소동의 작은 정원을 일정한 속도로 걷는다.

곧은 자세, 곧은 발걸음으로 흔들림 없이 걸어 숙소동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미친놈이라고 생각을 하겠지. 문도는 창가에 서서 피식 웃었다.

그래. 차라리 아침에 맡았던 샴푸 냄새에 발작 버튼이 눌려선 밤이 되어 지랄을 하는 미친놈이라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한숨만 나왔다.

하루 종일, 짙었던 꽃냄새가 역류하듯이 올라왔었다.

화장실에 걸어 놓은 특유의 방향제 냄새, 스치는 여직원들의 옅은 화장품 냄새, 늘상 맡아 왔던 어머니의 향수 냄새까지.

그를 스치는 모든 향들이 다디달았던 인공적인 꽃냄새로 변해서 코를 찔러 댔다.

그렇게 하루를 지나는 동안 싸구려 꽃향기는 점점 그 농도가 진해졌다.

상상 속에서 독해지고 짙어진 꽃냄새는 하루 종일 그를 따라다녔다. 나중에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멀찌감치 서 있는 여자에게 참지 못하고 굳이 말을 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멀리에서도 그 냄새가 맡아지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그 냄새가 짙어져서. 다시 맡고 싶지 않아서.

너에게서 나는 싸구려 향이 하루 종일 나를 쫓아다녔다고. 덕분에 하루에 몇 번이나 인상을 써야 했다고. 그러니 역할 정도로 지독한 그 향수, 최소한 내 앞에 설 때만큼은 뿌리지 좀 말라고.

하여 여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보았을 때 조금 어이가 없었다.

향수가 아닌 샴푸 냄새라 했을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기어코 확인을 하는 유치함을 보인 건 차라리 나았지.

문도는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여자의 머리 위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상상 속의 냄새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였다.

하루 종일 환상 속의 냄새에 시달렸다는 건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여자의 살내음이 스며들었다.

샴푸의 잔향이 지난 뒤에 맡아지는 연하고 순한 냄새가.

제 머리카락을 쥐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그렇게 짙은가? 의아해하며 그를 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목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삼푸를 바꿀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오던 이선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르겠지. 씨발 나도 모르겠는데, 너라고 알겠냐.

문도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창가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고 끝을 질끈질끈 씹다가 비스듬하게 웃었다.

모르긴 뭘 몰라.

눈 가리고 아웅을 해도 유분수지.

머리카락 냄새까지 킁킁거리면서 맡아 놓곤 뭘 모르겠다고. 어디서 누굴 속이려 들어.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스스로를 속이는 건 우스운 일이지 않나.

한숨이 나오는 일이다. 샴푸를 바꿀 게 아니라, 서유라의 트레이너를 바꾸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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