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로열 크라운 호텔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온 선우는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았다.
서문도라고? 서유라가 아니라?
선우는 옷장 안에서 핸드백을 꺼내 자그마한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서유라, 최지상, 김영재, 이민우. 이름들이 쓰여 있고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페이지를 열었다.
뒤로 넘기면 서유라에 대해 정리했던 것과 최지상에 대해 알아보았던 것들이 적혀 있다.
다음 장에는 경찰이 알려 준 것들과 그날 밤의 타임라인이, 그다음 장에는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연락처와 진술했던 내용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민우 핸드폰.
여러 번 동그라미를 쳤던 글자였다. 떨리는 손으로 그 옆에 선을 긋고 서문도라는 이름을 썼다. 그리고 그 옆에 물음표를 그렸다.
수첩을 덮어 다시 핸드백 깊은 곳에 넣은 뒤 핸드폰을 들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에게 확인할 것이 있었다. 마음은 떨리지만, 또박또박 자판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선우 씨!”
아래층의 조리사 아주머니가 크게 선우를 불렀다. 누구세요, 까지 자판을 누른 선우가 크게 대답을 했다.
“네!”
“별채 건너가 봐야겠어! 막내 아가씨 일어나셨나 봐!”
“네에, 내려갈게요!”
선우는 나머지 내용을 빠르게 쓴 뒤,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혹시 몰라 핸드폰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고 방문을 닫았다.
서둘러 별채로 건너가니, 박소영이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한국에 갓 도착했을 때는 얼굴에서 반짝반짝 광이 나던 사람이었는데, 며칠 사이 얼굴은 누렇게 뜨고 볼은 홀쭉해져 있었다.
“여기, 커피 좀 시원하게 내려와 봐.”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박소영이 선우에게 말했다. 얼음을 가득 넣으라는 주문을 하며 큰 목소리로 유라를 불렀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서유라가 주방으로 향하는 선우를 보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너는 내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밥을 잘도 처먹으러 간다?”
“죄송해요.”
“됐고, 나도 커피나 한 잔 내려 줘. 아이스로.”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서유라가 말했다. 선우는 네, 하고 대답을 하며 그릇장에서 컵을 꺼냈다.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르자 위잉— 소리가 나며 커피가 갈렸다.
진하게 퍼지는 커피 향기를 맡으며 디스펜서에서 얼음을 가득 받는데, 박소영의 목소리가 거실을 넘어 주방까지 들려왔다.
“아주 상전도 이런 상전이 따로 없어. 이랬다저랬다, 이거 먹고 싶댔다가 저거 먹고 싶댔다가.”
선우가 커피를 날라다 주자 박소영이 목이 탔다는 듯이 꿀떡꿀떡 마셨다.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후, 하고 살 것 같다는 소리를 내고는 서유라에게 말했다.
“담배 있으면 좀 내놔 봐.”
서유라가 투덜거리며 선우를 돌아봤다.
“내 방 창가에 담배랑 소주병 있어. 그거 들고 와.”
선우는 서유라의 침실로 향했다.
다양하게도 어질러 놓은 방의 창가에서 담배와 꽁초가 반 정도 들어 있는 소주병을 찾았다.
들고 거실로 나가니, 창 앞에 앉은 박소영이 이쪽으로 가지고 오라고 손짓을 했다.
담뱃갑을 툭툭 쳐서 라이터와 담배 한 개비를 뽑아낸 박소영이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였다. 크게 숨을 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미국에서 실컷 피다가 끊으려니까 죽겠지?”
서유라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잠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소영이 가늘게 눈을 흘겼다. 후우— 하고 길게 연기를 뱉으며 박소영이 다시 하소연을 시작했다.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나이 먹으면 애 된다더니, 아주 상애기 짓을 해요. 인생은 말년이 편안해야 하는데 이게 뭐니.”
매캐한 연기가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빠져나간다. 선우는 조용히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빠 죽다 살았는데 그럼, 그 정도도 못 들어줘? 솔직히 엄마가 하는 게 뭐 있어? 밥이나 떠 주고 손이나 주물렀지.”
서유라가 빈정거리며 유리잔을 들었다. 주방 아일랜드의 스툴에 앉은 선우는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 서유라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한 번씩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사람이 살아 움직여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것이.
처음 은정 선배에게서 서유라의 이름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는 허허벌판에서 선명한 이정표를 발견한 느낌이었던 그때를, 선우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선우 네가 하겠다고?’
‘네.’
‘왜? 돈 필요해서? 그럼 꼬맹이들 그만 가르치고 입시반 맡으라니까.’
‘돈 모아서 이모 계신 세종으로 내려가려구요.’
‘서울 있기 힘들어서?’
‘네. 이모 옆에서 작게 학원 차리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민우의 일이 있고 난 뒤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 보겠다고 해서였을까. 늘 선우에게 마음이 후했던 은정은 힘들 거라 예고를 하면서도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충동적이었지만, 서유라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서유라일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밤, 룸을 빌려 파티를 열었던 클럽 제우스의 VVIP 고객. 민우와 영재의 죽음을 목격한 여자. 서도 그룹의 보호 아래 변호사를 통해 모든 것을 처리했던 사람.
그 여자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서문도라고.
민우의 핸드폰을 가진 사람이, 서문도라고.
“얘, 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니? 하는 게 없다니? 내가 지금 누구 좋으라고 영감 비위를 맞추는 건데? 내가 너 하나 호적에 올리려고 일본으로 쫓겨나기까지 했는데, 응?”
선우가 상념에 빠진 사이 거실에서는 박소영이 억울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웃기네. 엄마,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팔자 고쳐 보겠다고 아빠 만난 거 아니야. 애도 몰래 가진 거고.”
선우의 귓가에 서유라와 박소영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선우는 높아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날 밤, 클럽의 룸을 출입했던 사람들의 명단에는 서문도의 이름이 없었다.
최지상도, 서유라도, 파티에 참석했던 모델 에이전시의 멤버들도, 사망한 김영재와 이민우도 있었지만 서문도는 없었다.
‘거 뭐냐, 약 좀 하고 놀았던 모양이지. 유명해, 서유라. 근데 이제 와 검사해 봤자 흔적도 없다니까? 그리고 일단 약 하고 논 거랑 사망사건이랑은 관련이 없어요.’
‘여기, 김영재 지문 묻은 샴페인 병 있고, 동생분 머리에 상처 있고. 넘어지면서 대리석 테이블에 부딪혔고, 뇌출혈 있었고. 김영재 사인은 약물 부작용, 동생분 사인은 약물 과다에 뇌출혈.’
‘봐봐요, 최지상은 두 사람 죽기 전에 나갔고요. 아, 서유라 혼자 장정 둘을 어떻게 죽여. 이거느은, 그냥 사망사건이라서 기소가 안 된다니까.’
누나분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는데, 라고 담당 형사는 건성으로 말했었다.
관련이 없다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그쪽도 재수 없게 얽힌 거지. 그쪽이야말로 무슨 고생이야, 라고 덧붙이면서.
그날 서문도 전무도 그곳에 있었던 걸까.
그곳에 있었다면 무엇을 했던 걸까.
무엇보다, 정말로 서문도 전무가 민우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까.
가지고 있다면, 왜 가지고 있는 걸까.
생각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켜들었다. 일단, 의문의 번호로부터 답이 오기를 기다려 보자고 생각하며 선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 * *
늦은 밤, 숙소동으로 돌아오는 선우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핸드폰을 가지고 올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마음을 태우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이제나저제나 숙소동으로 돌아갈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던 선우는 거실에 모여 TV를 보고 있는 직원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뒤, 2층 방으로 올라왔다.
베개를 치우고 핸드폰을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화면을 켜 보았지만,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는 알람은 없었다.
[누구세요? 민우를 아시나요?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증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선우가 점심에 보냈던 답 메시지가 제일 아래에 있었다.
알 수 없는 발신인으로부터 온 문자 한 통을 가지고 무턱대고 서문도 전무를 의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이용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골리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일단 모든 것들은 돌아오는 대답을 보고 판단해 보자고 생각을 했는데, 종일 아무런 답이 없다니.
“하아.”
선우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일까. 장난 문자였나. 장난이라면 누가 이렇게 못된 장난을 했을까.
누구인지 추측해 보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선우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기에.
민우의 친구들, 영재가 소속되었던 에이전시의 직원들, 영재의 지인들, 클럽 직원들, 변호사와 형사들.
그날 밤에 대한 아주 작은 이야기라도 좋으니 무엇이 되었든 꼭 좀 알려 달라는 메시지를 선우는 숱하게 뿌리고 다녔었다.
직접 만나서 적어 주기도 했고, 전화로 부탁하기도 했고, 메시지로 남겨 놓기도 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이 없다는 건 장난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지만, 선우는 흩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일들이 없지 않았다. 한번 만나 보자는 연락도 받았었고, 대뜸 돈부터 요구하기도 했었다.
이번에도 장난이었나 보다. 한숨을 쉬며 허탈한 마음으로 충전기에 핸드폰을 연결할 때였다.
[로열 크라운 호텔 주차장입니다.]
새로운 메시지였다.
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흑백 사진 여러 장이 보였다.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된 주차장으로 서문도 전무가 걸어오고 있는 장면이었다.
차로 다가와 문을 열었고, 안에 탑승을 했고, 차를 몰아 자리를 뜨는 연속된 사진이었다.
화면 안에 찍혀 있는 시간은 2월 5일, 오전 5시 8분.
로열 크라운 호텔. 클럽 제우스의 바로 옆에 있는 4성급 호텔의 이름이었다.
사진을 다시 보려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올리는데, 핸드폰에서 갑작스런 소리가 터져 나오며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깜짝 놀라 바라본 화면에는 여섯 글자가 떠 있었다.
‘서문도 전무님.’
“네.”
— 건너오시죠.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